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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릴 뻔했다가 되찾은 1400년전 '신라의 미소'…얼굴무늬 수막새의 조각가가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잃어버릴 뻔했다가 되찾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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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새해를 여는 1월1일 아침 신문 1면에 수수께끼 광고가 실렸다. 빨간 스마일 마크인지, 혹은 윙크 얼굴인지 모를 도형 하나만 가운데 놓고 그 밑에 ‘새해 복많이 받으시라’는 신년 인사만 달아놓았다.

이 수수께끼는 연휴가 끝난 4일 아침 신문의 전면 광고에서 풀렸다. ‘럭키금성이 LG로 바뀐다’는 LG그룹의 광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LG의 출범과 함께 제정된 새 심벌마크가 ‘신라의 미소’로 통하는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제2010호)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는 사연이 소개됐다. ‘얼굴무늬 수막새’를 ‘과거의 얼굴’로, 그것에 영감을 얻어 제정한 심벌마크를 ‘미래의 얼굴’로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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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의 얼굴이 된 신라의 미소


기업의 얼굴인 ‘CI(Corporate Identity)’는 디자인이나 미학의 측면에서도 고객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1400년이나 묵은, 고리타분한 구 시대의 유물 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CI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1998년 열린 경주 엑스포의 공식 심벌마크도 ‘얼굴무늬 수막새’였다. 지금도 경주 시내 곳곳에서 경주와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 얼굴이 됐다. ‘백제의 미소’가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라면 ‘신라의 미소’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하마터면 이 ‘신라의 미소’를 잃어버릴 뻔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것도 언제 어떻게 수습됐는지 모르게 일본인에게 팔렸고,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반출되었는 지도 몰랐다가 1970년대초가 돼서야 기증 귀환한 사실도….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글(‘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의 발견과 수증 경위’, <신라문물연구>8, 국립경주박물관, 2015)로 자초지종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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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1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에 처음 소개된 ‘얼굴무늬 수막새’. 오사카 긴타로(필명은 오사카 로쿠손)가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의 허락을 받아 이 특이한 기와를 소개한다고 했다.|허형욱의 논문에서


■일본인 의사가 구입한 특이한 기와


“…기와의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좋은 표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이 딱 정면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교묘(巧妙)함을 보이고 있다….”


1934년 6월 1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제229호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877~1974년 이후 사망)라는 인물이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라는 필명으로 쓴 글(‘신라의 가면화·假面瓦’)이 실렸다. 기와의 사진을 곁들인 이 글은 “이 기와가 경주 야마구치(山口) 의원의 의사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구리하라(栗原) 골동품상에서 몇개월 전에 구입한 유물”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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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지는 경주읍 사정리 흥륜사지(지금은 영묘사지로 수정됨)라 한다. 조사해보니 확실하다…가운데 면은 틀로 만들어낸 흔적이 없고 전부 손으로 눌러 만들었는데, 손가락 끝으로 세공한 것이 드러나 있다.”


오사카는 “경주 출토의 신라 기와는 다종다양한 무늬가 수준급이라 자랑할 만하지만, 이런 가면와는 단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면서 “이 와당의 출현은 신라 예술 연구상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 생각된다”고 극찬했다. 오사카는 소장자인 다나카의 허락을 얻어 이 기와를 소개했노라고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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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주 야마구치 의원 내 신라기와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 다나카가 수집한 기와들일 것이다. |다나카의 유족 기증품

수막새의 소장자로 소개된 다나카 도시노부(1905~1993)는 어떤 인물인가. 28살 때인 1933년 오사카(大阪) 의대를 수석 졸업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경주군 공의(公醫)로 근무했다. 다나카가 근무한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현재의 화랑수련원 자리(경주 시내 동부동 경찰서 건너)였다. 일제강점기의 사진 엽서에는 병원의 ‘취미실’이라는 곳에 신라 기와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진열된 모습이 보인다. 다나카가 이 무렵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신라 기와를 수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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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장자인 다나카의 동의를 얻어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는 누구인가. 1915~30년 사이 경주 공립보통학교(계림초교 전신)에서 교사-교장으로 근무했다가 정년퇴임했다. 이후 1932년 국립부여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장으로 역임했고, 1934년 경주분관으로 돌아온 뒤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냈다. 그러니까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1934년 6월이면 오사카가 부여에서 경주분관으로 복귀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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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종적을 감추었을까


수막새는 3개월 뒤인 1934년 9월 교토(京都) 제국대 출신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0~1983)의 보고서(<신라고와의 연구>·제13책)에도 도판과 설명문이 수록됐다.


이렇게 반짝 소개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이후 자취를 감춘다. 다나카 본인이 1940년 귀국한 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까지 필리핀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기 때문이다. 다나카가 얼굴무늬 수막새를 일본에 가져간 것은 1935년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패전 이후 다나카는 규슈(九州) 후쿠오카현(福岡縣) 기타 규슈(北九州)시 야하타니시구(八幡西區)에서 병원(다나카 의원)을 개업했다. 다나카는 한국에서 수집한 기와 88점 등을 포함한 161점을 기타규슈 시립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유족에 따르면 다나카는 수집 기와 중 얼굴무늬 수막새를 가장 아끼고 좋아했으며, 자기 방에 걸어두고 늘 감상했다. 기타규슈 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할 때도 이 수막새는 제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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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깨워진 ‘신라의 미소’의 기억


물론 1970년대초까지 국내에서 훗날 ‘신라의 미소’로 거듭날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까맣게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던 1972년 2월 15일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1913~1975)이 나라(奈良) 시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박일훈은 1927년 5월부터 1929년 3월까지 경주공립보통학교(현재 계림초등학교)를 다닌 바 있다. 이때 오사카 긴타로가 이 학교의 교사였으니 박일훈과는 스승·제자 사이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박일훈은 스승이 관장으로 있던 경주분관(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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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박일훈은 일본 방문 길에 옛 스승을 찾는다. 오사카는 96세의 고령이었지만 제자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사람을 보내 마중까지 나와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제자는 주로 1930년대에 공유했던 신라 문화 이야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는 순간 박일훈 관장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참 예전에 선생님이 소개한 인면문와당(얼굴무늬 수막새), 지금 어디 있나요? 다나카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오사카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다나카가 지금 기타규슈(北九州)에서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박일훈 관장은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와당을 경주박물관으로 기증하도록 주선해보면 어떠냐”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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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선생에게 말했다. ‘그 와당은 단 한 개 뿐인 귀중한 자료인데 개인이 소장하면 바로 사장(死藏)이 아니냐. 그러니 곧 신축될 경주박물관에 기증한다면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냐’고….”(박일훈의 ‘퇴임을 앞두고 쓴 문화재와 나’, <문화재>7호, 1973년 1월)


박일훈 관장은 제자의 감성을 담아 다시 한번 96살 노령의 스승에게 매달렸다.


“만약 기증한다면 신축 경주박물관의 개설기념으로 진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개인으로 봐서도 명년이면 정년퇴직인데, 최후의 업적으로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자의 간곡한 부탁에 오사카는 “알겠다. 다나카에게 기증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보겠다”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박일훈 관장은 다나카가 얼굴무늬 수막새를 100원에 구입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1930년대 기와집 한채값은 1000원 정도인데, 한쪽이 깨진 기와 한 점 가격이 100원이라면 엄청난 가치가 아닌가. 박일훈 관장은 ‘소장자인 다나카가 상당한 돈을 주고 구입한 유물을 선선히 내줄 리가 없을 것’이라고 내심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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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장의 ‘레전드 업적’


그런데 반전이 벌어졌다. 3월4일 귀국한 박일훈 관장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다나카가 기증의사를 밝혔다”는 오사카의 편지였다. 그것도 박일훈 관장 부부를 일본으로 초청해서 직접 유물을 기증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사정상 해외여행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박관장은 오사카를 통해 “이왕이면 경주와 와서 직접 유물을 기증하는게 어떠냐”고 간곡히 요청했다. 무엇보다 되도록 소장자(다나카)가 유물을 직접 들고와 신축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기증식을 여는게 모양새가 좋았다. 박일훈 관장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업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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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일훈-오사카 긴타로-다나카 도시노부 3자가 10여차례 편지를 주고 받은 끝에 얼굴무늬 수막새의 기증이 결정됐다. 1972년 10월14일 경주를 방문한 다나카 부부는 훗날 ‘신라의 미소’로 자리매김한 얼굴무늬 수막새를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서엔 “보는 이의 마음 깊이 감명을 주는 기와를 작업한 와공의 절절한 정성을 생각할 때 느끼는 바가 있어 신라의 국토에 안주(安住)의 땅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증이유를 밝혔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분관(경주) 1564호’라는 번호를 받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으로 등록됐다. 정년 퇴임을 앞둔 박일훈 관장으로서는 ‘얼굴무늬 수막새의 귀환’은 그야말로 마지막 업적이 됐다.


그러나 그저 ‘마지막 업적’이라는 단순한 상찬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잊혀진, 아니 영영 잃어버릴 수 있었던 ‘신라의 미소’를 되찾았으니 말이다. 가히 ‘레전드 업적’이라 하겠다. 물론 96살 고령에도 기증을 위해 다리를 놓아준 오사카와, 내주지 않아도 될 소장품을 선뜻 기증한 다나카에게도 경의를 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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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신라의 미소’를 되찾아온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박관장은 ‘얼굴무늬 수막새’의 귀환을 일생의 ‘마지막 업적’으로 여겼다. | 박일훈 관장 유족 제공

■웃는 얼굴로 악귀를 쫓는다?


그렇다면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어째서 ‘신라의 미소’라는 찬사를 얻었을까.


오사카가 1934년 이 기와를 ‘가면와(假面瓦)’라는 이름의 매우 특이한 예로 소개했다. 당시엔 비슷한 작품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엔 황룡사터에서 발굴된 대형 망새(치미)와 미륵사지 출토 기와편에서도 사람 얼굴 무늬가 확인된다.


기와는 건축물의 상부에 위치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장치로 인식됐다. 옛 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로 장식했다. 기와에 건축물의 위엄을 높이고 재앙을 피했으며,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았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무서운 형상의 동물 및 도깨비 문양(귀면문) 기와였다. 이렇게 무서운 형상으로 만들어야 건축물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기왓골의 끝을 메워 보호하고 장식하는 수막새는 이러한 ‘벽사(피邪·사악한 기운을 뿌리침)’의 의미를 담아 더욱 무섭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신라의 미소’라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벽사의 의미로 만들었다면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저런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는 말인가. 도깨비나 무서운 동물을 내세워 호통을 쳐도 될까 말까 한데 저런 미소로 무엇을 해볼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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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새보물납시었네’ 특별전에 출품된 ‘얼굴무늬 수막새’. 어두운 전시관에서도 돋보이는 유물이다.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는 전략으로


새삼스레 얼굴무늬 수막새를 뜯어보자. 우선 이 수막새는 진흙의 함유량이 일반기와보다 많고 매우 단단하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사람 얼굴이 음각된 목제틀에 넣고 찍어냈다.


그러나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오사카의 맨처음 언급대로 한가운데 면은 틀로 만든 흔적이 없고, 기와 장인이 자기 손 끝으로 눌러 세부를 표현했다. 그러다보니 일반 기와와는 달리 양쪽 눈과 광대뼈가 비대칭을 이룬다. 그러니 오히려 이런 자연스러움이 얼굴에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또 튀어나온 눈과 큼직한 코, 도톰한 입술, 그리고 위로 올린 입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이 기와의 가치를 독보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왜 이 기와장인은 우락부락한 도깨비나 맹수가 아닌 ‘웃는 사람의 얼굴’로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려 했을까. 그렇다. 연구자들은 바로 이것이 매력이라는 것이다. 즉 도깨비 형상 및 동물 무늬 기와는 눈을 부라리고 이빨을 드러내어 병과 불행을 몰고 오는 악령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진짜 악귀라면 그런 정도의 도깨비나 동물 얼굴 쯤은 얼마든지 깔아뭉갤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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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무늬 수막새’는 이 점을 노린다는 것이다. 험상궂거나 무서운 표정 대신 넉넉한 미소로 사악한 기운을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사실 출몰하는 악귀에 섣불리 피식거리며 웃음을 보였다가는 악귀의 화만 돋울 것이다. “날 우습게 아는거냐”고 방방 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난 당신을 해코지 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환대하니 당신(악령)도 날 해치지 마”하고 온화한 웃음으로 마주하면 어떨까.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는 속담처럼 악귀도 경계를 풀며 ‘피식’ 거리며 물러날 수도 있다. ‘별꼴이야!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하며….


‘벽사’의 의미를 지닌 ‘얼굴무늬 수막새’는 바로 이 점을 노린다. 험상궂은 얼굴로 맞서는 대신 넉넉하고 온화한 미소로 악귀를 무장해제시킨다는 것이다. ‘얼굴무늬 수막새’에는 신라인들의 기발한 해학이 녹아 있다(윤병렬 홍익대 교수의 ‘수막새에 새겨진 선악의 철학-신라의 미소 수막새를 통한 고찰’, <문화재> 53 통권 87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논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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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미소’의 조각가는 양지 스님?


그렇다면 이 수막새는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뭐 수막새에 제작자를 새기지 않았으니 특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저런 방증자료를 토대로 흥미롭게 스토리텔링 할 수는 있다.


연구자 중에는 신라시대에 활약한 소조(塑造·조형미술)의 대가인 ‘양지 스님’을 주목하는 이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얼굴무늬 수막새’는 심상치않은 절터에서 확인됐다.


오사카가 1934년 처음으로 수막새를 소개할 때 출토지를 ‘흥륜사터’라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흥륜사터로 알려진 사정동 일대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 등의 ‘영묘사’명 기와들이 수습됐다. 그래서 요즘은 ‘얼굴무늬 수막새’의 출토지를 ‘영묘사’로 단정하고 있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이 창건(635년)한 절이다. 무엇보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세가지 신비로운 예측)’로 유명한 곳이다. ‘지기삼사’ 중 하나가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절 인근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아내 전멸시킨 ‘신묘한 사건’이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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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영묘사에 각종 소상(塑像·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을 만든 조각가가 있었으니 바로 양지(良志)스님이다. <삼국유사>는 “여러가지 기예에 통달한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벽돌탑의 기와, 그리고 사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 등을 제작했다”(‘의해·양지사석’)고 기록했다.


<삼국유사>는 “양지가 삼매(三昧·대상이 집중하는 정신력)의 태도로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자 성 안의 백성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고 덧붙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양지는 ‘소조 전문’ 조각가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로 영묘사터에서 출토된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사천왕사에서 확인된 ‘녹유신장상’ 등은 양지 스님이나 혹은 그의 유파가 남긴 작품일 가능성이 짙다.(김유식 국립제주박물관장의 ‘6~7세기 백제와 신라의 기와교류’, 백제 왕흥사 창건 1440주년 기념 <백제 왕흥사와 창왕> 학술심포지엄, 2017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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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미소’ 모델은 미시랑?


영묘사, 그리고 얼굴무늬 수막새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만들 수 있다.


<삼국유사> ‘탑상’를 보면 영묘사와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 등이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다.


즉 왕명을 받은 진자스님이 영묘사 인근에서 놀고있는 소년이 ‘미륵선화’라는 것을 간파했다. 소년은 진자 스님에게 “일찍 부모를 여의어 성은 모르지만 이름은 미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진자 스님은 미시랑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갔고, 임금은 국선(화랑의 우두머리)로 삼아 존경했다.


그런 미시랑이 7년 후 홀연히 사라지자 진자 스님이 매우 슬퍼했다. <삼국유사>는 “대성(大聖·미시랑 즉 미륵선화)이 진자 스님의 정성에 감동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에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라 설명했다. <삼국유사>는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고 하고 남에게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의 유풍”이라 전했다. 영묘사 절은 미륵, 화랑과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며, 화랑들의 추모 공간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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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에 조각된 녹유신장상. <삼국유사> 에 따르면 양지 스님이 이 녹유신장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그렇다면 영묘사터에서 출토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신라인들이 그리워한 화랑이자 미륵의 화신인 미시랑의 얼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또한 해볼 수 있는 즐거운 상상이다.


아무튼 이렇게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신라의 미소’를 영영 잃어버릴 뻔 했다니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상징유물이어서 서울에서는 좀체 만나 볼 수 없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2017~2019년 사이에 국보·보물이 선보이는 ‘새 보물 납시었네-신국보보물전’ 특별전(22~9월27일)이다. 약간 어두운 전시실인데, 넉넉하고 소박한, 그러나 환한 웃음이 단박에 아우라를 풍긴다. 이렇게 ‘신라의 미소’를 친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순우의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둘>, 하늘재, 2003이 이 기사를 쓰는데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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