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혁 ‘에러’ 퍼포먼스를 이해 않으려는 낡은 권위의식, 그게 '에러'
이찬혁 솔로 앨범 ‘에러’ 음악방송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대중 문화 매체의 무례함
솔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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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앨범 <ERROR>로 활동 중인 이찬혁의 최근 활동은 ‘에러(error)’에 대한 존재론적 실험처럼 보인다. 음악방송에서 보여준 그의 난해한 퍼포먼스를 무례함이나 자의식 과잉이라 공격하는 일부 소비자와 그들의 목소리에 기생한 상당수 연예매체의 주장처럼 이찬혁의 실험이 에러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존재가 그 자체로 에러일 수는 없다.
단어와 품사의 배열을 결정하는 문법적 규칙 안에 어떤 단어가 얌전히 정렬되지 않고 일종의 비문(非文)을 만들며 돌출될 때, 비로소 그 단어는 에러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 20일 Mnet <엠카운트다운> 무대에서 관객석과 카메라를 등지고 노래를 부르고 MC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나, 23일 SBS <인기가요>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상당히 낯설지만 그 자체로 에러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가수로서 관객을 만나는 자리, 혹은 음악방송의 문법 안에서 허용해주지 않을 때, 맞지 않는 톱니바퀴의 역회전과 함께 전체적인 오작동이 일어난다. 이찬혁을 과거 악동뮤지션(악뮤)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자기이해를 지녀왔던 가수로 신뢰한다면, 이러한 오작동은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윈도의 블루스크린 에러라면, 심지어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당연히 화부터 내는 게 맞다. 하지만 한 명의 진지한 예술인이 상호작용을 기대하며 의도한 오작동이라면, 단순히 오작동이라고 판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오작동으로 무엇을 드러내려 하느냐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연예매체에 가장 기대하기 어려운 덕목이 되었다.
이찬혁의 지난 한 주에 대해 악의를 숨기지 않는 기사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스포츠투데이는 ‘“지디병도 정도껏” 악뮤 이찬혁, 성적도 인성도 ERROR’, ‘“의미라도 있었으면” 당혹스러운 이찬혁 퍼포먼스’라는 제목의 기사를 하루 걸러 냈으며, 스포츠조선은 ‘이찬혁-YG, 무례한 침묵 퍼포먼스… 하고 싶은 거 그만해’라는 제목으로 그의 기행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비난했다. JTBC의 ‘<음중> 이찬혁, 또 뒤통수 무대… 과도한 콘셉트 여전’이란 기사도 마찬가지다. 해당 퍼포먼스들이 난해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난해함의 일관성 안에서 맥락을 구성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야말로 대중문화 매체가 공론장에 일부 기여하는 방법이다.
카메라 등지고 노래 부르거나, 머리를 자르는 무대 위 낯선 행위들
앨범 속 ‘죽음’ 혹은 ‘마지막’ 모티브는 모든 기행의 맥락을 가늠케 해
의미를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아서, 열애설에 침묵해서…
연예인에게 쏟아내는 ‘무차별 폭격’은 무책임하고 게으르다
문화적 역동성을 흡수 못 한다면, 교체되는 것은 낡은 그들이 아닐까
이찬혁은 타이틀곡인 ‘파노라마’에서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 가네 파노라마처럼’이라고 노골적일 정도로 악뮤 시절 자신이 제한해야 했었던 한계를 벗어나 늦기 전에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화자는 ‘TV의 악무 걔’(목격담)라는 타인의 숨 막히는 시선 앞에서 ‘숨을 쉬어 인마 정신 차려 (중략) 안 비키는 건 다 밀고 가줘요 아저씨 제발 이러다 큰일 나’(siren)라며 탈주를 꿈꾼다. ‘파노라마’와 ‘Time! Stop!’ ‘A DAY’ ‘장례희망’ 같은 곡에서 반복되는 죽음 혹은 마지막의 모티브는 그것이 생물학적 차원이든 실존적 차원이든 더는 탈주를 미룰 수 없다는 간절함과 조급함을 드러낸다. 내일의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비로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신의 비문(碑文)을 상상하며 예술적 허용으로서의 비문(非文)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러한 맥락의 구성을 통해 이찬혁의 무대 위 퍼포먼스, 무대 바깥에서의 기행은 상당히 일관되게 정렬된다. 그러니 셀럽미디어의 ‘이찬혁, 맥락 없는 기행’ 같은 기사 제목이야말로 무책임하고 게으르다.
물론 비평적 역할을 포기한 연예매체의 악다구니를 목격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앞서의 JTBC 기사 중 “이 같은 침묵 퍼포먼스는 최근 열애설 이후 묵묵부답으로 일관 중인 이찬혁 태도와 맞물리며 비판에 직면했다”는 문장, YTN ‘침묵에 삭발까지… 이찬혁의 기이한 솔로 활동’이란 기사 중 “이 파격적 행보의 진짜 에러로는 최근 불거진 그의 열애설에 대한 식상한 대응이 꼽히고 있다” 같은 문장으로부터 기자들이 이찬혁에게 드러내는 반감의 얄팍하고도 직접적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취재에 우호적이지 않은 대상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건, 최소 지난 10년간 공신력과 영향력 모두 무너지기 시작한 연예매체가 자신들의 권위를 확인받기 위한 발악에 가깝다. 그 대상이 대중에게도 우호적이지 않다면 심지어 그 몸부림은 일시적으로 성공하기도 한다. 연예매체가 영향력을 잃은 건 대중에게 연예부 ‘기레기’라는 멸시의 대상이 되어서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불특정 다수 대중의 목소리에 아부할 땐 잠시 권위를 이양받아 마음껏 비난할 권력을 행사한다.
바로 이것이 이찬혁이 스스로의 존재를 돌출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낸 대중문화 소비 사회의 문법이다. 어떤 존재는 단지 대중과 언론에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 문법 안에서 오작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여기서 이찬혁이라는 에러를 삭제하고 문법에 맞게 매끄럽게 교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비문(非文)의 역동성도 허용하지 못하는 규칙의 경직성과 편협함에 대해 따져볼 수도 있다.
앞서 인용한 기사들이 이찬혁의 인성과 무례함을 지적한 건 우연이 아니다. 대중의 주관적 불쾌함에 영합한 이들 기사는 무례하니 대중이 불쾌하며 대중이 불쾌하니 무례한 것이라는 순환논법에 기댈 수밖에 없다.
<엠카운트다운>에서 MC 질문에 침묵으로 대응한 것이 각 MC에게 당황스러운 경험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성이나 예의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무대에서의 뒤통수 퍼포먼스에서처럼 서로 합의되었다고 가정된 규범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또한 그것이 의도적인 위반임을 드러내며 어색한 순간을 연출한 것에 가깝다. 그 어색함을 견뎌내는 것이 MC들에게 또는 일부 시청자들에겐 힘든 순간이었을 수는 있지만, 사람을 무시하는 개인 이찬혁의 인성 문제로 환원하기보다는 그 어색함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
사실 음악방송에서의 일반적 인터뷰야말로 진실한 문답 대신 서로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정보값 없는 덕담을 교환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정 콘셉트를 수행하는 것에 가깝다. 즉 이찬혁의 침묵 퍼포먼스는 평범한 대화의 장에서 자기 콘셉트를 고집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콘셉트 수행만이 허용되는 공간에 자신의 콘셉트를 기입한 것이다. 침묵은 그 자체로 에러가 아니라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어색함을 통해 에러가 된다. 마찬가지로 같은 상황에서 가수나 MC가 자기 목소리 대신 소비자에게 익숙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가정 위에서만 이찬혁의 침묵은 무례함이 된다. 과연 이 가정은 충분히 타당한가.
위근우 칼럼니스트 |
과도한 콘셉트, ‘지디병’ 따위의 부정적인 표현으로 이찬혁의 자의식 과잉을 지적하는 일부 대중과 매체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소비자 자의식 과잉, 언론 자의식 과잉을 고백한다. 감히 대중가수 주제에 웃고 고개 숙이지 않아서, 익숙한 무대를 만들지 않아서, 친절하게 의미를 떠먹여주지 않아서, 열애설 여부에 대해 아무 취재 소스도 주지 않아서 그 존재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과잉된 것으로 느껴지고 오작동을 일으킨다면, 실은 하나의 단어나 구절이 에러의 원인이 아니라 이 구문론적 세계 자체가 틀려먹은 것에 더 가깝다.
앞서 오작동이 왜 일어나는지 질문해야 한다고도 했지만, 실은 질문이 멈춰선 지점에서 오작동이 일어난다. 상호작용을 포기하고 소비자의 안온한 지위와 권력, 매체의 권위만을 주장할수록 오작동은 더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찬혁에게, 혹은 또 다른 고분고분하지 않은 연예인에게 에러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 담론적 역동성을 흡수하지 못하며 자의식만 남아 도태된다면, 종국에 에러 해결을 위해 교체되는 것은 낡은 그들이 될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