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이국종 교수·칠곡 할매… 노년에 보이는 삶의 풍경

김훈 산문집 ‘연필로 쓰기’

경향신문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소설가 김훈(70)이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를 펴냈다. <라면을 끓이며> 이후 3년 만에 펴낸 산문집은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는 하루 하루를 반복하며 쓴 글들이다. 김훈은 일흔의 나이에 접어든 노년의 삶의 풍경을 이야기하며,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배설 행위의 결과물인 ‘똥’을 매개로 우리 사회에 대한 사유를 펼쳐 보이는가 하면,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깊이 사로잡았고,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쓰게 만들었던 이순신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복원해낸다. 또 목숨을 걸고 위험한 질주를 하는 배달노동자들의 불안정한 노동, 뒤늦게 글을 배운 ‘할매’들의 신산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경향신문

산문집에서 노년의 풍경부터 배달노동자의 삶까지 풀어낸 소설가 김훈.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제 노년에 접어든 김훈에게 ‘보이는’ 것들의 폭이 넓어진 것일까. 산문집에서 다루는 주제는 일상부터 정치적 소재까지 다양하다. “나이를 먹으니까 나 자신이 풀어져서 세상 속으로 흘러든다. 이 와해를 괴로움이 아니라 평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늙어간다”는 책의 구절처럼, 일흔의 남성 작가로서 세상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그의 흔적을 보는 것이 이 산문집을 읽는 재미다.


<칼의 노래>로 부족했던 걸까. 김훈은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우리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중일기>에서 부하의 목을 벤 일과 파도의 높낮이를 똑같이 건조하게 기록했던 이순신은 온갖 고난과 절망도 ‘사실’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승리로의 전환을 도모할 수 있었다. “수백척의 적선 앞에서 단지 12척뿐이라는 이 비극적 사실을 그 사실로서 긍정함으로써 그 사실 위에서의 전환을 그는 도모하고 있다”며 ‘전환의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김훈은 또 사고로 길바닥에 미끄러져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엎어진 짬뽕 국물을 바라보는 오토바이 배달 청년의 시선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그가 직고용이 아니라 대행업체 소속이라 모른다는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달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분노한다. “가난은 다만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소외, 차별, 박탈, 멸시이다”라고 말한다.


김훈의 팬이라 알려진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의술은 이 황잡한 세상의 모순, 질곡, 비겁함, 치사함과 더불어 존재하고, 거기에 짓밟히면서 저항하다가 나가떨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내 눈에는 그가 중증 외상환자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여든에 가까워 한글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 칠곡과 곡성 할머니들의 글을 보고서는 “할매들의 글에는 문자가 인간에게 주는 환상이 없고, 인간의 문자와 문장 안에 이미 들어와서 완강하게 자리 잡은 관념이나 추상이 들어 있지 않다. 할매들의 글은 삶을 뒤따라가면서 추스른다”며 “할매들의 글은 생활이고 몸이다”라고 말한다. 김훈은 이어 말한다. “한 문명 전체가 여성의 생명에 가한 야만적 박해와 차별을 성찰하는 일은 참혹하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오늘의 실시간
BEST
khan
채널명
경향신문
소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