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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경향신문

유명 라디오 DJ와 만화가의 데칼코마니 같은 PC(정치적 올바름)주의 비판 [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의 리플레이

혐오와 차별을 교정하지 않는 또다른 불통…‘괴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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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만들어낸 서로가 묻혀진 데칼코마니 같아.” 지난 9월11일 JTBC <히든싱어 6>에 출연한 화사는 모창 능력자들과 함께 마마무의 ‘데칼코마니’를 열창했다. 우연이겠지만 그의 열창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두 남성 명망가가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 같은 발언을 했다. 9월9일, 작가 허지웅은 자신이 진행하는 SBS 라디오 <허지웅쇼>의 오프닝에서 영화 <뮬란>이 중국 신장 지역 촬영에서 신장 위구르족을 탄압한 중국 당국의 도움을 받고 감사를 표한 이슈를 다루며 “옳고 그름에 관한 대중문화의 신탁처럼 굴어온 디즈니가 정작 관객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는 감금과 세뇌와 민족말살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이익을 추구”했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여기까진 합리적 비판이지만, 그의 논리는 갑작스레 점프해 “강박적인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주의라는 게 이렇”다며 “PC주의가 이제는 괴물이 되어 정치, 사회, 대중문화 전 영역을 좀먹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9월17일 밤, 만화가 주호민은 만화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트위치 라이브 방송 중 “지금 웹툰은 검열이 진짜 심해졌는데 그 검열을 옛날에는 국가에서 했다.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한다”고 우려(그 과정에서 나온 ‘시민독재’라는 말에 대해 그가 추후 실언임을 인정했기에 그 표현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하며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에 보통 일어”나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작품을 만났을 때 그것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려고 하면 확장을 할 수 없다”고 특정 독자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한쪽에선 창작자가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되어 대중문화를 좀먹고 있다고 비판하고, 다른 한쪽에선 독자 혹은 소비자 역시 도덕적 우월감으로 작가와 작품을 옥죈다고 비판한다. 창작자가 소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독자가 창작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서로 좌우가 반전된 데칼코마니 같지만 가운데로 접으면 PC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하나의 형상으로 포개진다.


<뮬란> 제작에서의 문제를 그간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 디즈니의 행보로부터 연역한 논리의 빈약함에 대해, 역시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을 ‘검열’이라는 개념으로 싸잡는 성급함에 대해 충분히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정말로 그들이 우려하듯 PC주의가 창작자도 소비자도 억압(사실 이쯤 되면 전지전능한 수준이다)하는 실체 있는 ‘괴물’인지 따져보겠다. 이것은 한 세계에 대한 해석적 차이의 문제 이전에, 과연 우리가 같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마치 영화 <물괴>의 모티브가 된 <중종실록> 속 괴물에 대한 기록처럼 실체 없는 소문의 대상을 쫓는 기분이 든다.


허지웅의 말처럼 “무조건 내가 옳고 너는 불편하다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그런데 정말 그가 비난한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여 오래된 원작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작품의 완성도보다 인종과 성별을 역전시키는 데만 주력”한 디즈니가 정말 그런 고집불통 “교조주의”의 함정에 빠졌다 말할 수 있을까. 실사화된 <알라딘>은 어머니가 인도 혈통인 나오미 스콧과 이집트계 메나 마수드를 주연으로 썼다. 이것이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나오미 스콧이 연기한 자스민은 원작 애니메이션에는 없던 ‘Speechless’를 부르며 최근의 할리우드에 요구되는 주체적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과연 이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좀먹고” 있는가. <알라딘> 원작을 비롯해 디즈니의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사랑해온 이들을 차별주의자로 폄하한다면 그것은 정말 교조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Speech less’에 대해 디즈니에도 페미(니즘) 묻었다며 비난하는 이들을 성차별주의자로 부르지 않아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인어의 이미지로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의 에리얼부터 떠올리는 이들이 차별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실사 <인어공주>에 흑인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흑인 여부를 떠나서 저게 어떻게 인어공주냐? 넙치나 가자미지’(실제 네이버 댓글) 따위의 폭력적 말을 내뱉는 이들은 원작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무조건 내가 옳고 너는 불편하다는” 근본주의자가 아닌가?


그나마 주호민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실증적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논란이 된 ‘시민독재’란 발언을 사과하고 해명한 두 번째 방송에서, 한 신인 작가가 일진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만화를 그리자 ‘어떻게 이런 걸 그릴 수 있느냐’는 댓글이 달려 ‘나중에 일진들이 갱생하는 내용’이라고 작가가 해명한 예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갱생하는 내용을 그리려면 나쁜 걸 그려야” 하며 단순히 초반의 나쁜 모습이 불편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작품의 평가에 있어 성급할 수 있다. 비슷한 일은 최근에도 있었다. 네이버웹툰 신작인 <성경의 역사>에선 이제 막 스물이 된 주인공 성경에게 흑심을 품는 학원 남선생이 어떻게 자기망상에 빠지는지 노골적으로 풍자하는데, 남선생의 시점으로 진행된 첫 화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혹 남성 관점에서 합리화하는 게 아닌지 우려·비판하는 댓글과 6점대의 낮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3화 만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역전됐다. 분명 무엇이 당장 불편한 느낌을 준다는 것만으로 작품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무시한 채 비판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다만 이것이 PC주의에 의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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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네이버 연재작인 <정보전사 202>는 남파 간첩이 유튜브를 통해 북한 주체사상을 전파하려 시도한다는 참신한 발상의 개그만화인데 이 작품 첫 화에는 ‘북한미화만화’라는 베스트 댓글을 비롯해 4점대의 별점이 기록됐다. 과연 이 작품으로부터 성급히 북한 미화를 읽어낸 이들도 PC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 최근 표현 수위로 논란이 되고 휴재에 들어간 <헬퍼2: 킬베로스>의 경우도 딱히 해당 문제와는 상관없이 작품의 연출이나 파워 인플레이션, 작가 대필 루머 등으로 최소 10주 동안 비난 댓글과 별점 테러를 당했다. 웹툰에 대해 단 한 회만으로 작품 전반을 판단하거나, 진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별점으로 응징하는 모습을 보기란 어렵지 않지만, 이것은 PC주의와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벌어지는 문제다. 작화가 별로라며 연재 초반부터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건강 문제로 연재를 중단한 웹툰 <돼지만화>의 마지막 회 베스트 댓글들은 “이런 작품을 연재 중단 안 해서 욕먹는 거 아님?”, “꼭 이런 사람을 작가 자리에 앉혀야겠어? 원인 제공자는 우리가 아니라 네이버 당신네들인 거 같은데?” 따위의 적반하장적인 태도로 가득하다. 만약 정말 독자 검열이란 게 있다면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이야말로 그 주체가 아닐까. 혹은 200원으로 유료 회차를 구매하면 작가를 모욕할 권리까지 구매한다고 믿는 이들의 신자유주의적인 갑질에 그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왜 전반적인 웹툰 독자들의 과도한 간섭 중 작품의 여성혐오나 장애인 혐오에 대한 지적만이 과대표 되고 비난의 표적이 되는 걸까.


실제 현실이 이러니 PC주의에 대한 비판은 PC 근본주의자가 지배하는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가정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해진다. 허지웅은 9월22일 라디오 오프닝에서 정부가 책을 금지한 세계를 그린 소설 <화씨 451>을 소개했다. 그는 불편한 사상을 담은 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려 했을지 모르지만, 소설에서 책을 금지하게 된 이유 중 굳이 “소수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작품은 골칫거리가 되기 전에 불태워버려라”라는 대사를 골라 인용한다. <화씨 451>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평소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나 흑인의 성격을 바꿔달란 간섭 등에 치를 떨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허지웅이 묘사한 “한 점의 불편함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진 예능과 드라마를 하루 종일 보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으로부터 PC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더 망칠지 지켜보고 있”다는 9월9일 오프닝 멘트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래서다. 물론 당연히 PC주의가 근본주의화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체적인 권력이 된다면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실제로 불통으로 세상을 끔찍하게 만들고 있는 건 누구인가.


주호민 작가는 해명 방송에서 자신이 최근 논란이 된 <복학왕>이나 <헬퍼2: 킬베로스>를 옹호한 게 아니며 해당 작품들을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해도 무책임한 말이다. 정말로 작품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려”는 이들이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적어도 그런 이들이 비판하는 작품의 문제 요소들과 누적된 논의들을 확인했어야 하지 않을까. <복학왕>에서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과 고아를 사회적 통념에 기대 차별적으로 묘사해 비판받은 건 이미 1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도 단순히 불쾌한 표현과 실제로 특정 사회 구성원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혐오표현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비판했다. 하지만 사과는 했어도 변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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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위근우

나는 여기서 PC 근본주의자의 불통보단, 그동안 하던 혐오와 차별을 교정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불통을 본다. 앞서의 노래 가사를 다시 인용하겠다. 그들은 “서로가 만들어낸 서로가 묻혀진” 억울한 세계에서 “데칼코마니”처럼 서로가 믿고 싶은 가상을 서로에게 비춰주는 중이다. 이제 서로가 아닌 바깥을 봐야 할 때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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