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스승' 희랑대사 실제상, 최고의 걸작 인정받아 국보 된다
힘줄, 뼈마디, 팔자주름까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예고된 ‘건칠희랑대사좌상’. 희랑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고승이다. 이 좌상은 희랑대사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구현했다. |해인사 소장 |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희랑대사의 좌상(坐像)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이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고려시대 고승(高僧)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고 2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또 15세기 한의학 서적 ‘간이벽온방(언해)’과 17세기 공신들의 모임 상회연(相會宴)을 그린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등 2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긴 얼굴에 뾰족한 턱, 큰 귀…. 그리고 자연스러운 주름이 조화를 이룬다. 또 코 양 옆에서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은 희랑대사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영락없이 인자한 노스님의 인상이다.|해인사 소장 |
보물 제999호 ‘건칠희랑대사좌상’은 나말여초에 활약한 희랑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이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목조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8년 X-레이 촬영 결과 뒷면은 목조지만, 정면은 건칠로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건칠은 목재인 목심을 뼈대로 삼지 않고 모시나 삼베와 같은 헝겊을 여러 겹 바르고 칠을 거듭해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건칠기법은 힘줄이나 뼈마디까지 아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희랑대사상의 가슴에 작은 구멍(지름 1.6㎝, 깊이 약 8㎝)이 나있다. 화엄삼매(마음의 고요한 경지) 때 빛을 발한 자취라는 설이 있고, 해인사에 모기가 들끓자 희랑대사가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해인사 소장 |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의 조사결과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서 만들었으며, 후대의 변형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각상은 높이 82.2㎝, 무릎너비 60.7㎝의 등신상이다. 극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여 역대 초상 조각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마른 몸에 결가부좌 다리 위로 양손을 포개 단정히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툭 튀어나온 울대뼈와 쇄골, 손의 힘줄과 손가락 뼈마디…. 건칠 기법의 장점을 제대로 살렸다.
긴 얼굴에 뾰족한 턱, 큰 귀…. 그리고 세가닥 깊은 이미 주름과, 미간 및 눈가의 자연스러운 주름이 조화를 이룬다. 또 코 양 옆에서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은 희랑대사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튀어나온 광대는 살짝 올라가 있고, 높은 미간에서 이어지는 크고 오똑한 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얇은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다. 영락없이 인자한 노스님의 인상이다.
보물로 지정 예고한 <간이벽온방(언해)> . 1525년(중종 20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병(疫病·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학서적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희랑대사상의 가슴에 나있는 작은 구멍(지름 1.6㎝, 깊이 약 8㎝)이 이채롭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해인사 기행문(‘가야산기’)은 “대사의 상…양쪽 유방 사이에 앵두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다”면서 “아마도 생전에 쑥뜸한 흉터를 형상한 것이거나, 조각한 지가 오래되어 썩고 좀먹어 구멍이 생긴 흔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덕무는 이어 “세상에서는 희랑대사를 흉혈국인(중국 남쪽 지방의 나라)이라 했다”고 전했다.
가슴의 구멍은 ‘흉혈국 사람들이 화엄삼매(마음의 고요한 경지) 때 빛을 발한 자취’라는 것이다. 혹은 해인사에 모기가 들끓어 스님들이 수행하기 힘들어하자 희랑대사가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희랑대사는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서 고려건국에 큰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져왔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 관련기록이 나와있다. 즉 경남 합천 미숭산에서 후백제 왕자(월광)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마치 귀신처럼 신묘했기 때문이다. 왕건은 결국 해인사로 들어가 주지인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비책’을 청했다. 그러자 희랑대사는 신병(神兵)인 용적대군을 보내 고려군을 도왔다. 후백제 왕자 월광은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찬 것을 보고 두려워 항복했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선조 연간(1567~1608)에 공신이 된 구공신(舊功臣)과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년) 11월 충훈부에서 상회연(相會宴)을 개최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동아대 석당박물관 소장 |
비록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합천에서 고려-후백제 전투가 빈발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희랑이 보냈다는 용적대군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해인사 소속의 승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승 덕에 후백제군을 물리친 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한다.
황정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사는 “희랑대사좌상은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이라면서 “제작 당시의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 가치도 뛰어나다”고 밝혔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간이벽온방(언해)>는 1525년(중종 20년) 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병(疫病·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학서적이다.
전염병 치료에 필요한 처방문을 모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 언해하여 간행했다. 책의 내용을 보면 병의 증상에 이어 치료법을 설명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전염병 유행 시 유의해야 할 규칙 등이 제시되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간이벽온방(언해)’는 ‘선사지기(宣賜之記·왕실에서 하사했음을 증명해주는 인장)’가 찍혀 있다. 선조가 성균관박사 김집에게 이 책을 하사했음을 기록한 내사기(內賜記)가 보인다.
‘만력6년(1578) 정월 모일 상균관박사 김집에게 간이벽온방 1건을 내리니 임금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인사는 생략해도 좋음. 도승지 신 윤(수결)”.
이 기록을 토대로 <간이벽온방(언해)>는 현재까지 알려진 동종 문화재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판본임을 알 수 있다.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간이벽온방(언해)>는 조상들이 현대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서적이며, 조선 시대 금속활자 발전사 연구에도 활용도가 높은 자료”라고 밝혔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46호)은 선조 연간(1567~1608)에 공신이 된 구공신(舊功臣)과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년) 11월 충훈부에서 상회연(相會宴)을 개최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신·구공신은 총 151명이다. 이중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에 적힌 참석공신들은 1604년 상회연 당시 생존해 있던 63명 중 58명이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을 거쳐 3건의 국보 및 보물로 지정예고건을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