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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을 칼로 쪼개는 아픔"…전염병의 참상에 맞선 조선의 분투

경향신문

1774년(영조 50년) 현직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특별시험(등준시·登俊試)의 무과 합격자 18인을 기념하여 제작한 초상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 ). 이중 김상옥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서 두창(천연두) 흉터가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 슬프다. 너는 지금 나를 버려두고 돌아갔는가. 오장(五臟)을 칼로 쪼개는 것만 같구나…”. 1625년(인조 3년) 3월 조선의 예학자 정경세(1563~1633)가 두창(천연두)으로 죽은 맏아들 정심(1597~1625)을 기리며 쓴 제문의 첫머리다. 정심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경세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아들이었다. 26살인 1623년 가을부터 1년간 향시와 소과, 대과 등 모두 10차례 시험에서 연속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대과급제후 1년도 안된 1625년(인조 3년) 사람됨이 단아하고 아버지를 닮아 예학에 능하다고 해서 예문관 검열(정 9품·사관)로 발탁됐다. 사관은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사실(史實)을 기록하던 직책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삼장(三長)이라고 해서 문장력(才)과 학문(學), 통찰력(識)을 겸비한 인물이어야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모으며 청요직(淸要職)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에 갑작스럽게 불행이 찾아왔다. 예문관에서 숙직근무를 서다가 그만 두창이 걸려 사망한 것이다. 정경세의 제문에는 촉망받던 아들이자 가문의 자랑이었던 아들을 전염병으로 보낸 아버지의 애끊는 심정이 구구절절 배어있다.


“네가 검열에 임명됐을 때 두창이 서울에 퍼져 있었다. 난 네가 ‘병들었다’고 아뢰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검열 임명이 입신의 시작이고, 왕명을 병을 핑계로 받들지 않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아….”


아버지(정경세)의 한탄이 이어진다.


“게다가 전염병이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창궐하니 어딘들 피할 수 있을까 여겼다. 차라리 서울에 오면 내가 간호할 수도 있고 또 서울에는 의약이 많아 몸을 온존히 보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라오라 했는데….”(<우복집>)


더욱 심금을 울린 것이 있다. 아들(정심)이 죽기 하루 전에 정심의 아내가 고향집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정경세는 “자식을 낳아 기뻐했을 며느리가 5일 후 남편의 부고를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애통하겠느냐”고 가슴을 쳤다. 정경세는 “자식 잃은 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면서 “관직을 벗어 던지고 너의 관을 싣고 돌아가 네 무덤을 만들고 네 어린 자식을 기르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을 뿐”이라고 울부짖었다. 정경세는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은 아비의 마음을 “오장(五臟)을 칼로 쪼개는 것만 같다”고 표현했다.

의원의 목숨건 진료 덕분에 전염병의 마수에서 피한 예도 있다. 영조대 노론의 대표학자인 이재(1680~1747)는 손자 2명의 두창을 치료한 의원(장경현)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시를 남겼다.(<도암집>)


‘거듭 찾아와 준 것은 바로 신의에 바탕을 두어서이니(重來已是信爲基) 위급함에 처해서야 비로소 재주가 뛰어남을 알았다(危處方知着手奇). 세상에 약한 자를 사랑하는 의리를 어찌 한정하겠는가(何限世間慈弱義) 백발의 나 자신이 의원에게 심히 부끄럽구나(白頭吾甚愧良醫).’


고마워할 만 했다. 이재는 50이 넘어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아들을 8살 때 두창으로 잃었다, 그런 이재에게 손자 2명이 잇달아 두창에 걸린 사실은 과거의 고통을 되살아나게 했을 것이다. 귀신조차 이(理)와 기(氣)의 교묘한 합으로 여겼던 유학자 이재로서도 두창은 극복하기 어려운 두려움의 역병이었다. 의원조차도 자칫 감염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찾아와 손자의 목숨을 구해준 의원의 의로움과 뛰어난 의술에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같은 영조 시대의 문신인 심익운(1634~?)이 1761년(영조 37년) 8살에 두창으로 죽은 아우(심용득)를 위해 지은 묘지명도 가슴이 아프다. 7년 뒤인 1768년(영조 44년) 부친상 때 지은 아우의 묘지명인데, 아우의 죽음 이후 딸과 누이, 제수씨, 아내, 아버지까지 잃는 비극을 겪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하지만 정경세와 이재, 심익운의 기록은 조선 전염병 역사에서 극히 미미한 사례에 불과하다. 전염병은 세균과 바이러스 관련 지식이 없었던 왕조시대엔 수많은 백성이 속수무책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었다. 예컨대 1750년(영조 26년) 조선을 강타한 전염병으로 1~9월 사이 무려 22만3578명이 몰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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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11일부터 6월21일까지 상설전시관 1층 중근세관 조선2실에서 개최하는 테마전(<조선, 역병에 맞서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러한 전염병의 공포에 어떻게 대응해갔는지를 조명하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유새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사는 “300~400년전 사람들의 전염병 극복의지를 전함으로써 코로나19로 혼란을 겪고 지금,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테마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테마전에서는 조선시대 유행했던 대표적인 전염병을 소개하고 역병에 희생된 사람들과 역병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앞서 인용한 정경세가 죽은 아들을 위해 쓴 제문과, 심익운의 동생 등 두창으로 죽은 아이들의 묘지명 등이 전염병의 참상과 슬픔을 전한다. 아이 묘지명 중에는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1604~1651)의 맏아들이 3살에 두창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기록한 백자 접시도 있다. 또 앞서 언급한대로 영조시대 학자 이재가 두창에 걸린 두 손자를 치료해 준 의원의 의로움과 뛰어난 의술에 감사하는 시도 소개한다. 코로나 19 치료를 위해 분투하는 작금의 의료진에게 보내는 감사의 시이기도 하다.


출품유물 가운데는 두창에 걸린 인물들의 초상화도 포함돼있다. 즉 1774년(영조 50년) 제작된 <등준시무과도상첩>에 실린 김상옥(1727~?)·전광훈(1722~?)·유진하(1714~?)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 두창의 흉터가 확인된다. 두창은 두창 바이러스가 원인인 급성 발열성 발진성 질환이다. 전염성과 사망률(대두창의 경우 30%)이 매우 높아 한때 전세계 인구 사망 원인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두창을 앓고 회복된 사람에게는 곪은 부분에 생긴 딱지가 떨어지면서 피부 표면이 움푹 파이는 흉터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얽은 자국(곰보)’이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두창 흉터를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은 조선시대 내내 두창이 매우 일반적인 전염병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김동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수록된 18인 중 3명에게 흉터가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두창의 위력을 짐작케 하는 동시에 역병을 이겨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밝혔다.


테마전은 또 17세기 초 온역(溫疫·티푸스성 감염병), 18세기 홍역 등 새로운 감염병의 출현에 대응한 조정의 노력을 조명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신찬벽온방>(보물 1087호)은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일종의 전염명 매뉴얼이다. 전염병 발생 두어달 안에 편찬과 배포까지 마무리했으니 그 시대 기준으로는 참으로 발빠른 대처라 할 수 있다.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인 이정구(1564~1635)은 “<신찬벽온방> 편찬으로 누추한 시골의 후미진 골목이라도 다 처방문을 의지하여 구해 살게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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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신찬벽온방>에서 ‘운기의 부조화’, ‘위로받지 못한 영혼(여귀·려鬼), 청결하지 못한 환경, 청렴하지 않은 정치 등을 전염병 창궐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지 않아도 광해군은 “전염병 재앙은 과언의 허물 탓”이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니 과인이 책임지고 퇴치할 것”이라고 다짐한 바 있다. 허준 역시 전염병의 종식에는 통치자의 반성과 함께 공동체가 고통을 분담하여 대처하는 인술(仁術)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허준은 또 ‘운기(運氣)의 부조화’를 전염병의 원인으로 꼽았다. 인간의 신체도 기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듯 자연의 기운도 조화를 잃으면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허준은 ‘운기의 부조화’를 두고 ‘따뜻해야 할 봄이 춥거나 더워야 하는 여름이 서늘하거나 서늘해야 하는 가을이 덥거나 추워야 하는 겨울이 따뜻하거나 하는 경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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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마누라도’. 예전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호구신(戶口神)이라 했다. 집집마다 돌면서 일으키는 역병이라는 뜻이다. 이런 역병이 돌 때 역할을 한 것이 무속신이었다.|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이번 테마전에는 어의 강명길(1737~1801)이 정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종합의서(<제중신편>)도 소개된다. <동의보감> 이후 변화와 발전된 의학 이론과 민간의 임상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새로운 표준의서로 제시하여 민간의료를 지원하고자 한 뜻이 담겨 있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긴급 구호 명령인 <자휼전칙>도 전염병의 공포를 약자에 대한 보호와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역사의 지혜를 보여준다. 테마전은 또 전염병의 공포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본다.


조선시대 내내 위협적이었던 두창은 질병 자체가 고귀한 신으로 받들어져 호구마마, 호구별성 등 무속의 신이 되었다. 괴질이 돌 때 역할을 한 <대신마누라도>(가회민화박물관), 전란과 역병 같은 국가적 재앙에서도 구원해 준다 여긴 석조약사불(국립대구박물관) 등이 선보인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전염병은 끔찍한 공포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큰 변곡점이 되기도 했다”면서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역병 속에서도 삶을 살아 낸, 그리고 그 공포를 적극적으로 함께 이겨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의지를 테마전에서 느껴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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