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길을 더듬어 ‘새’ 멋을 만나는 빛고을 시간여행
“인자 질로 오진 동네여라”- 광주 원도심 양림동 & 동명동
‘호남의 예루살렘’ 양림동
100년 전 선교사의 발자취 따라
동서 건축·예술이 공존하는 골목
예향 지키는 토박이 화가 미술관
근대역사와 함께 걷는 ‘달빛투어’
‘오랜 부촌의 변신’ 동명동
광주천 건너 아시아문화전당과
5·18 영화 ‘26년’을 촬영한 그 집
근사한 집들은 개성 만점 카페로
폐선로 ‘푸른길’엔 뚜벅이의 여유
미국 남부 양식으로 1910년대 지은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 이르는 언덕. 400년 된 호랑가시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
빛고을 광주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기 좋은 도시다. 정치·경제의 중심이 옮겨가며 쇠락해가던 원도심이 특히 그렇다. 양림동과 동명동은 최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며 문화·관광의 중심지로 활력을 되찾고 있다. 광주천과 충장로·금남로를 사이에 낀 두 동네는 광주라는 도시가 형성된 과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변화하는 도심 풍경도 잘 보여준다. 그곳엔 100년 전 광주의 모습과 오늘의 ‘힙’한 여행지가 사이 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1930년대로 떠나볼까
양림동은 버드나무 숲이 울창한 마을이라는 뜻의 양촌과 유림을 합친 지명이다. 광주에선 흔히 ‘서양촌’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20세기 초반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자리 잡으며 생긴 마을은 광주 기독교의 발상지다. 지금도 주민의 65%가 기독교인이다. 6개의 대형교회가 밀집해 있는데 그중 셋이 정통성을 다투듯 ‘광주양림교회’란 이름을 함께 쓴다. 세 교회 모두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처음 광주에서 예배를 연 ‘1904년 12월25일’을 창립일로 머릿돌에 새겨놨다.
선교사들은 포교만 한 것이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세워 신문물의 혜택을 전했다. 양림동엔 이들이 세운 다양한 근대 건축물과 함께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전통 건축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다.
1899년 지은 이장우 가옥 안채 토방마루에 앉으면 무등산 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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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기 앞서 오래된 한옥을 멋스럽게 개조한 ‘양림쌀롱 여행자라운지’에 들렀다.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의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여행자라운지는 ‘1930년대의 광주’를 주제로 꾸몄다. 당시 양림동에 살았던 시인 김현승이 좋아한 미국 브랜드 ‘힐스브로스’ 원두로 만든 커피와 그 커피를 첨가한 수제맥주를 파는 식이다. 개화기에 유행했던 양장과 한복을 빌려주는 모던의상 대여(2시간 1만5000원),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양림동의 근대 건축물과 문화공간을 돌아보는 ‘양림달빛투어’(1시간 1만5000원) 등 재밌는 프로그램이 많다. 여행자라운지는 근대역사문화마을인 양림동 여행을 돕는 종합안내소 역할도 한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월요일 휴무)하는데 7000원에 하루 이용권을 구입하면 짐 보관, 여행서적 열람, 디지털 기기 충전, 음료 무제한 셀프바, 여행 안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선구자들의 흔적을 따라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인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여행자라운지에서 안내받은 코스대로 산책에 나섰다. 1914년 지어진 오웬기념각은 유진 벨과 함께 양림동에 첫 교회를 설립한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를 기려 동료들이 세운 것이다.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사각형 건물은 한쪽 모서리를 차지한 강단을 중심으로 출입문과 좌석이 좌우 대칭으로 펼쳐져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지켜 양쪽의 출입문은 남녀가 따로 이용했고 실내에서도 가운데 커튼을 쳐 분리한 채로 예배가 진행됐다고 한다.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이 가장 낮고 교인들의 자리는 높도록 경사지게 설계된 내부 공간은 포교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 이 건물에서 광주의 첫 오페라, 첫 독창회, 첫 연극 공연이 열렸고 첫 시민단체(YMCA)가 태동했으니 개화기 광주 신문화의 요람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호랑가시나무 잎 |
400년 된 호랑가시나무가 버티고 선 양림동 언덕배기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 있다. 미국 남부 양식으로 1910년대 지은 우일선(로버트 M 윌슨) 선교사 사택이다. 워싱턴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1908년 한국에 들어온 우일선은 당시 천벌로 여겨졌던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우고 집에선 고아들을 돌봤다. 그가 원장을 지낸 제중원이 지금의 광주기독병원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가장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수술한 병원이기도 하다. 사택은 현재 호남신학대 학생들이 침묵으로 기도하는 ‘윌슨영성센터’로 사용된다.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지만 정숙만 지킨다면 고풍스러운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 딱 좋다.
고향을 지키는 화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응용한 양림동 청아빌라 벽의 부조. |
사택이 있는 언덕 일대엔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가져온 흑호두나무와 피칸나무, 은단풍나무 등이 높다란 거목이 돼 버티고 있다. 세월을 반추하며 호남신학대 교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고독의 시인’ 김현승의 시비와 만난다. 평소 좋아하던 커피잔을 든 사진과 함께다. 펜촉을 형상화한 시비는 애초 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해 시인이 즐겨 노래하던 무등산이 보이도록 설계됐지만 지금은 학교 기숙사 건물에 가려 앞이 막혔다.
양림동 청아빌라 벽에 설치된 이이남·김태군 작가의 부조 작품엔 양림동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응용한 작품엔 양림동에서 활동한 선교사들과 함께 광주 최초 목사 최흥종, 음악가 정율성, 독립운동가 조아라 등 양림동을 대표하는 근대 인물들이 익살스러운 포즈로 표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양림동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한희원미술관. |
서양화가 한희원(64)이 사재를 털어 꾸민 한희원미술관은 양림동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다. 화가는 고향마을 양림동의 흔적을 끈덕지게 작품 안에 담아왔다. 재개발로 무너진 주택가에서 주워온 창틀을 액자 대신 쓴 그림의 제목은 ‘남광주역을 떠나는 막차’다. 여수에서 교사로 일했던 본인의 추억이 담긴 작품이다. 버려진 대청마루 나무판자에도 옛 동네의 집 그림을 그렸다. 광주천에서 철거된 뽕뽕다리(공사장에서 쓰는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붙은 이름) 구조물은 주워다 테이블을 만들었다. “순수한 정신의 예술가가 한 사람쯤은 고향을 지키고 있어야 동네가 망가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죠.” 미술관을 안내한 화가의 며느리 김윤서 실장의 설명이다.
오래된 공간이 주는 매력
동명동 옛 금호문화회관에서 5·18을 소재로 한 영화 <26년>을 촬영했다. |
양림동에서 광주천을 건너 북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동명동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관료와 상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부촌인데 해방 후에도 시장·도교육감·시교육감·미국공보원장 관사 등 고급주택이 들어선 부자동네로 유명했다. 지금 시장 관사 터엔 노인복지관이 들어서 있고 미국공보원장 관사 자리엔 노인들을 위한 식당 ‘실버피아’가 운영 중이다. 권력자의 집이 누구나 드나드는 복지시설로 탈바꿈한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건 동네 주민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근사한 집들은 대부분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가까운 동명1동에 몰려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집 중 하나가 옛 금호문화회관이다. 원래 1970년대 초반 사업가 권승관씨가 주거용으로 지었다가 호화주택이라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아 지역 기업인 금호그룹에 매각했고, 이후 금호문화회관 이름을 달고 전시회와 문화행사 등에 사용됐다. 한옥 형태의 2층 건물은 대리석으로 만든 현관 기둥과 2층 테라스를 두른 도자기 모양의 난간 등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원엔 소나무와 향나무,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잘 가꿔져 있다. 5·18을 소재로 한 영화 <26년>을 여기서 찍었다. 건물은 금호그룹의 경영난으로 2001년 한 건설회사에 소유권이 넘어가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관리인에게 양해를 구하면 마당과 건물을 구경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준다.
동밖에 마실골목의 벽화. 동명동은 이제 개성 뚜렷한 거리로 자리 잡았다. |
마당 딸린 2층 양옥집들은 요즘 대부분 근사한 카페와 식당으로 변신 중이다. 2000년대 중반 학원가가 형성되면서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 덕분에 커지기 시작한 동명동 카페거리는 이제 개성 뚜렷한 100여곳의 점포가 성업하는 상권으로 발전했다. 영국 유학파 플로리스트 양희재씨(30)가 운영하는 ‘희재가’는 바닥과 벽을 옥돌로 바른 호화주택을 그대로 살린 공간으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고 있다. 탄노이 스피커로 재즈를 들으며 차 한 잔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카페 투어도 물릴 즈음이면 ‘푸른길’이 기다리고 있다. 푸른길은 광주 도심을 관통하던 경전선이 폐선된 후 그 부지에 만든 공원이다. 폐선로를 따라 8㎞에 걸쳐 형성된 길은 동명동에 이르러 수변공원이 된다. 녹음이 우거진 길은 여름 땡볕에도 서늘해 산책 코스로 그만이다.
광주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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