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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는지 따라 배제의 선 긋는 사회…그 안의 욕망을 응시하다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 펴낸 김혜진 작가


달동네 ‘남일동’ 재개발 이야기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의 ‘분할선’

넘어온 이와 넘으려는 이 그려


‘믿을 건 부동산뿐’이라는 욕망

되풀이되는 한국 사회의 자서전


“구별 짓기 넘어서지 못할 때의

자기모멸·모순 그리고 싶었다”

경향신문

재개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 을 펴낸 김혜진 작가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집과 거주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지닌 각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말했다. 현대문학 제공

도로 하나, 작은 언덕 하나 사이로 수천만원이 오르고 내린다. 같은 생활권과 엇비슷한 환경, 차이가 있다면 동네 이름뿐이다. 그런데 이 차이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학군이 달라지고, 값도 달라진다. 그런 종류의 사뭇 진지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으레 ‘불안감’이란 게 찾아온다. 그 차이로 미래조차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집을 구할 때면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김혜진의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분할선’들이 등장한다. 재개발의 광풍마저 피해간 낙후된 동네, 화자인 ‘홍이’ 가족은 다섯 번 넘게 이사를 했지만 좀처럼 남일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일동 일부가 부촌인 중앙동으로 행정 편입되면서 가족은 마침내 중앙동 주민이 된다. 소설은 섬처럼 고립돼 원래 이름 대신 ‘남일도’라 불리는 이 달동네를 배경으로 재개발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불안과 좌절, 욕망과 집착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장편 <9번의 일>을 펴낸 소설가 김혜진이 중편소설로 돌아왔다. 그는 2012년 등단한 이후 희망퇴직을 강요받는 통신회사 설치기사(<9번의 일>),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의 이야기(<딸에 대하여>) 등 소외와 배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온 작가다. 김혜진은 2009년 용산참사가 발생한 곳이자 도시개발 잔혹사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남일당’에서 한 글자를 바꾼 ‘남일동’이라는 공간을 소설 위에 불러낸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특정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은 아니에요. 남일동은 용산참사를 생각하며 지은 이름은 아닌데, 쓰고 보니 많은 분들이 ‘남일당’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재개발은 흔히 접하는 일이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잖아요. 복잡한 이해충돌이 있는 이슈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집과 거주의 문제에서 사람들이 지닌 각각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경향신문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런 각자의 사정과 어려움이 있다. 행정구역 재편으로 중앙동 주민이 됐지만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남일동을 경멸하는 아버지를 홍이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본다. 경매에 뛰어들고, 집을 사고팔기를 반복하며, “걸어가면 10분도 안 걸리는 그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 마음과 에너지 전부를 집에 쏟아붓고 있었던”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홍이는 남일동에 이사온 ‘주해’와 그의 어린 딸 ‘수아’를 만난 뒤, 낙후된 남일동에도 변화가 가능할 것이란 희망을 갖게 된다. 주해는 구청을 찾아다니며 동네에 마을버스를 들여오고, 민원을 넣어 어두운 골목 가로등의 불을 밝힌다. ‘동네 분위기’를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입학을 꺼리는 중앙동 초등학교에 수아를 가까스로 입학시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수아가 ‘남민(남일동에 사는 난민)’으로 불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홍이는 ‘3학년 8반 남토(남일동 토박이)’로 불렸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절 남일동 골목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을 ‘가겟집 애들’이라 부르며 선을 긋던 엄마에게 남일동은 곧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 사는 한 그런 마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것들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누군가에게 옮아가고 번지며, 마침내 세대를 건너 대물림되고 또 대물림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홍이는 수아가 ‘남민’으로 불리는 것을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오히려 다시 시작된 재개발사업에 집착하는 주해를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주해마저 재개발을 통해 이 분할선을 넘기로 작정한 것이다. 소설은 ‘편입 욕망’을 드러내는 주해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 홍이, 그런 홍이에게 ‘당신의 정의와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듯한 주해를 교차하며 재개발지역 위의 계급적 분할선을 선연히 드러낸다. 김 작가는 “홍이가 주해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또 편승했다고 실망한 것은 둘 사이에 중앙동과 남일동이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쨌든 홍이는 주해보다 나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려다보고’ 있는 거죠. 무언가를 옳다, 그르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많은 이들에게 집은 ‘사는 곳’이자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이들에게 주거와 투자는 흑백으로 확실하게 나뉘지 않는다. 집에 집착해온 홍이 아버지 역시 집이 가족의 마지막 성공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보통 사람이다. 엄마가 남일동에 대해 갖는 실체가 불분명한 두려움은, ‘남토’가 ‘남민’이라는 멸칭으로 이어질 때 그 분명한 얼굴을 드러낸다. 소설은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래서 더더욱 ‘믿을 건 부동산뿐’이라는 위태로운 욕망이 되풀이되는 이 사회의 ‘자서전’일지도 모른다.


김 작가는 “재개발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윤리적인 얘기가 아니라 구별 짓기, 그걸 넘어서지 못했을 때의 자기모멸이나 모순 등 사람의 여러 내면에 대해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노동의 문제도, 주거의 문제도 “나와 동떨어진 사회문제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고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라서” 쓴다는 그는 올여름 두번째 소설집으로 독자들과 만날 계획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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