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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월호 ‘팽목바람길’을 걷다

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

팽목바람길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팽목항을 찾는 이들에게 마련된 도보여행길이다.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 숲길, 갈대밭을 한 바퀴 도는 데 서너 시간이 걸린다.

좀처럼 무뎌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2014년 4월16일 이후로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다. 여전히 세월호, 세 글자는 우리 가슴을 짓누른다. 다시 4월이다. 기억과 애도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던 차에 ‘팽목바람길’ 이야기를 들었다. 참사 초기부터 꾸준히 팽목항을 지켜온 동화작가들과 진도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지난해 4월 개통한 걷기여행길이라 했다.

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

길은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 숲길, 갈대밭을 끼고 한 바퀴 도는 약 13.5㎞ 코스다. 팽목항에 들른 이들이 참배만 하고 떠나지 말고 진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잠시라도 눈에 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걸으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그간 참사 후유증으로 고통받은 진도 주민들도 생각하자는 것이다. ‘기억과 상생의 도보여행길’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었다. 먹먹함과 기대가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진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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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팽목기억관(옛 팽목분향소) 앞 추모 조형물에 걸려 있는 노란리본. 바래고 녹슨 모습이 참사 후 지난 5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듯 하다.

기억과 상생을 위해 걷다

팽목바람길은 팽목항 방파제를 길게 덮은 ‘기억의 벽’에서 시작한다. 기억의 벽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글과 그림이 그려진 타일 4600여장을 모아 붙여 만들었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메시지들이 손바닥만 한 타일 안에 빼곡했다.

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

팽목바람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팽목항 방파제. 한쪽 벽에 4600여 개의 타일을 이어붙여 만든 ‘기억의 벽’이 마련돼 있다.

“진실을 인양하라” “잊지 말자 덮지 말자 기억할게” “슬픔은 저 바다에 희망은 우리 가슴에” 길을 걸으며 떠올릴 법한 모든 말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그날 이후 자주 들어 익숙하고 어쩌면 지겹게 느껴질 법도 한 말들. 하지만 당연하다 생각할수록 쉽게 잊는 게 사람 아니던가. 거듭 읽고 쓰고 소리내 말하면서 너의 다짐은 나의 다짐이 되고 그렇게 모두의 굳건한 약속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우리를 아프게 한 상처도 결국엔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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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방파제에 가득 매달린 노란리본. “미수습자를 가족품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 가운데 단원고 남현철·박영인 군, 양승진 교사, 일반인 탑승객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다.

토요일 오전인데도 둘씩 셋씩 팽목항을 찾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기억의 벽을 따라 녹슨 추모 조형물 사이로 색 바랜 노란리본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방파제 끝 빨간색 ‘기억의 등대’엔 “남겨진 5명의 기다림”이란 문구가 선명했다. 방파제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5명의 ‘미수습자’ 중 한 사람 단원고 박영인군의 축구화에도 눈길이 머물렀다.


돌아나오는 길, 기억의 벽에 남겨진 유가족들의 편지에 하릴없이 목이 메었다. “아들이어서 행복했다 준영아 사랑한다” “지성아 수학여행이 너무 길구나 보고 싶어…” “승현아 아빠랑 누나가 이길 수 있게 지켜줘” “사랑한다 우재야 잊지 않을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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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방파제 ‘기억의 벽’에 남겨진 세월호 유가족의 메시지. 피붙이를 그리는 애끓는 절규가 보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다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우재 아빠 고영환씨(50)는 아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팽목항을 5년째 지키고 있다. 고씨는 팽목바람길을 찾은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의 풀리지 않은 과제를 설명하고, 길을 걷고 온 이들에겐 따뜻한 저녁밥을 대접한다.


기자가 팽목항을 찾은 날, 마침 경기도 여주의 한 사립도서관 독서동아리에서 온 11명의 중·고생이 팽목바람길을 함께 걸었다. 학생들은 출발 전 팽목기억관(옛 팽목분향소) 옆 ‘세월호 가족식당’에서 고씨의 말을 경청했다. “오늘 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대로 행동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에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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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우재 아빠’ 고영환씨는 참사 후 5년째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씨는 팽목바람길을 걷고 온 이들에게 직접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준다.

“영원히 잊지 않을게”

가벼운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일행은 길을 떠났다. 팽목항 앞바다의 잿빛 풍경이 이어지는 팽목방조제를 지나 길은 마사선착장으로 이어졌다.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을 오르자 산으로 향하는 숲길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가 반겼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왼쪽 바다에선 파도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바닥에 쌓인 낙엽이 걸을 때마다 부스럭 소리를 냈다. 참가자들은 팽목바람길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을 주변 나뭇가지에 묶어 뒷사람에게 길을 알렸다.

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

팽목바람길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이 나무에 걸려 있다. 노란색은 세월호의 상징색이면서 대지와 흙의 색이기도 하다. 파란색은 팽목바람길에서 만나는 하늘과 바다를 의미한다.

“가다가 탑을 쌓을 테니까 무겁지 않은 돌을 하나씩 챙겨주세요.” 인솔자의 말에 한 줄로 잘 가던 대열이 금세 흐트러졌다. 틈만 나면 앞뒤로 걷는 친구들과 떠들고 장난치는 모습에서 그 또래 특유의 활기가 느껴졌다. 내리막길에서 서로 조심하라며 살피고 챙겨주는 모습은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어른스러웠다. 극단적 상황에서도 친구를 먼저 걱정했던 세월호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픔의 자리에 낸 약속의 길··· 세

팽목바람길은 바다와 산을 넘나들고 마을과 들판을 오간다. 차분히 걷는 여정은 아픔의 길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길이기도 하다.

산길이 끝나고 작은 선착장이 있는 ‘다신기미’에 도착했다. 다신은 따뜻하다는 뜻이고, 기미는 움푹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전라도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바다에서 인근 마사마을 주민들이 멸치와 디포리를 잡던 곳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선착장에서 일하던 주민들은 바다 건너 팽목항에서 들려오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를 생생히 들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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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의 한 사립도서관 독서동아리 소속 학생들이 다신기미 앞 소망탑에 각자 주워온 돌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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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기미 앞에 마련된 소망탑에 학생들은 저마다 주워온 돌을 하나씩 올렸다. 몇몇은 돌 위에 사인펜으로 글도 남겼다. 길 안내를 맡은 동화작가 임정자씨(53)가 바다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게 진도관제탑이에요. 세월호 참사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들 아시죠?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꼭 슬픈 마음으로 걸을 필요는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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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 등 남겨진 과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학생들은 서로를 꼭 안았다.

당부 덕분인지 학생들의 표정은 시종 진지했지만 어둡지 않았다. 김성주양(16)은 “집에만 있다가 이렇게 밖에 나와 친구들과 걸으니 시원한 바람도 맞고 너무 좋다. 시간이 되면 바다 구경도 하면서 좀 더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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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표로 만든 팽목바람길 이정표

치유와 위로의 길

예전에 말이 떨어졌다는 바닷가 낭떠러지가 있는 ‘잔등너머’를 지나자 숲길이 끝나고 작은 마을이 나왔다. 마사리(馬紗里)는 이름 그대로 제주에서 서울로 보내는 말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마장과 모래 해변이 유명한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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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맞은편의 마사마을은 옛부터 말을 키우는 마장과 모래 해변이 유명했다. 팽목바람길은 마사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말소리를 들었는지 문이 빼꼼 열렸다. 김옥희 할머니(77)가 얼굴만 내민 채 일행을 소리쳐 불렀다. “이리 와서 커피 한 잔씩들 하고 가.” 회관 안에는 마을 노인 여남은 명이 놀며 쉬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와줘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 “우리 동네 경치 좋지?” 살가운 인사에 금세 웃음꽃이 번졌다. 알고 보니 매번 길을 걷는 사람들을 불러다 차를 내주고 이야기도 나눈다 했다. 세월호 유류 오염 등으로 어업과 관광 피해가 컸던 진도 사정을 생각하면 의외의 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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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리 노인들은 팽목바람길을 찾은 길손들을 마을회관으로 불러 차도 내주고 이야기도 나눈다. 환한 표정과 푸근한 말투에 금세 마음이 따뜻해진다.

팽목바람길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마사리 임원식 이장(39)은 “처음엔 지역 이미지 나빠진다고 걱정했던 어르신들도 유가족이나 자원봉사자들과 자주 부대끼면서 차츰 마음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팽목항을 드나들던 동화작가들이 진도 어민들의 미역 판매를 돕고 진도의 초등학교에 책을 보내는 등 꾸준히 지역사회와 교류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덕분에 팽목바람길에는 마사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옛길인 바닷가 숲길이 포함됐다. 잡풀과 관목이 무성했던 버려진 길을 동화작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정돈해 도보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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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마을을 벗어나면 들판을 온통 푸르게 물들인 보리밭이 한동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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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너머 물가엔 갈대들이 춤을 추고 오후 햇살을 받은 물결은 은빛으로 일렁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풍경이다.

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너른 들판과 하천, 갈대밭으로 이어진다. 파랗게 싹이 오른 보리밭 위로 거센 바람이 불면서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이리저리 춤추는 갈대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은은한 빛을 내며 일렁였다. 그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팽목마을에 접어들자 언덕 위에 도열한 팽나무 군락이 푸른 하늘 위로 어지러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오래도록 한자리에서 풍상을 겪은 나무의 자태에서 왠지 모를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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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바람길은 참사 후 줄곧 팽목항을 지켜온 동화작가들과 진도 군민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 지난해 4월 개통식을 한 뒤로 많은 문화예술가들이 길을 가꾸고 알리는 일에 동참해왔다. 팽목바람길 회원인 연극 연출가 김수희씨가 이정표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팽목항은 가족 잃은 피울음과 원통함이 곳곳에 맺힌 비극의 현장이었다. 팽목바람길은 그 아비규환의 자리에 새로운 길, 아픔의 길이자 약속의 길을 다시 냈다. 그 길에서 나무도 풀도 바람도 파도 소리도 모두 걷는 이에게 위로였다. 아직 해원(解寃)하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며 떠났다가 도리어 힘을 받고 돌아온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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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이 있는 팽목마을은 팽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팽나무 군락은 마을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듯 도열해 있다. 비바람 맞으며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킨 나무의 형상이 오래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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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팽목 앞바다

팽목바람길 가이드


팽목바람길 걷기 모임은 매달 네 번째 토요일 오후 2시에 진도 팽목항 ‘기억의 벽’ 앞에서 출발한다. 전체 코스를 걷는 데 서너 시간이 걸린다. 참가비는 1만원. 배지와 스티커 등 간단한 기념품과 물, 저녁식사가 제공된다. 다음 카페 ‘ 팽목바람길’이나 페이스북 페이지(@Paengmokbaramgil)를 통해 미리 예약하면 좋다. 팽목바람길은 길동무와 후원회원도 상시 모집한다(농협 351-1002-1562-93 예금주 팽목바람길).


세월호 5주기에 맞춰 이달엔 넷째주가 아니라 참사 당일인 16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팽목바람길 걷기 행사가 열린다. 이후 팽목항에선 청소년 체험마당, 추모극 공연, 예술마당 등 다양한 추모행사가 저녁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전날인 15일에도 팽목항 인근에서 추모문화제와 토론회 등이 예정돼 있다.

진도|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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