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역시 ‘흥정’이지
(119) 울주 남창 옹기종기시장
재래종 배추 |
우리나라에서 읍이 가장 많은 곳은 어느 군일까? 울주군을 돌아다니면서 든 생각이다. 울주군은 참으로 넓었다. 이름도 비슷한 언양읍에서 온양읍까지는 차로 30분 족히 걸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나 ‘읍’ 표지판이 보이기에 궁금함이 밀려왔다. 지도를 찾아보니 언양읍 주변으로 범서읍과 삼남읍이 있다. 온양읍은 온산읍과 청량읍과 마주하고 있어 울주군에만 6개의 읍이 있다. 보통 군 단위에는 많아야 두서너 개다. 여섯 개의 읍이 있으니 사방팔방 교통 표지판에 읍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울주군과 같은 숫자는 달성군이 있다. 인구 숫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둘 다 배후 도시가 크고 대기업체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돈이 돌면 사람이 모인다는 당연한 순리를 두 도시가 보여 주고 있다.
재래종 배추·문어·초피같은 싱싱하고 알찬 식재료에 사람도 북적…다양한 볼거리에 즐겁다
문어 |
어느 날 동영상 시청 중에 남창 옹기 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울산은 태화 종합시장을 작년에 다뤘기에 고민 중이었다. 고민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시장이었다. 안 가면 안 될 정도로 규모가 꽤 있었다. 때마침 울주군 식품 종사자를 위한 식재료 강연 의뢰가 왔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속담이 딱 맞아떨어졌다. 기왕이면 해돋이 사진도 찍을 겸 해서 밤에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울산 날씨를 보니 구름 한 점 없었다. 구름 움직임이 나오는 레이더 기상 사진까지 확인하고 출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동틀 무렵 오늘의 목적지 남창 시장과 가까운 서생면의 진하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어두움은 하늘은 밝음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 열리고 있었으나 정작 해 뜨는 방향은 여전히 어두웠다. 두꺼운 구름이 거기에 있었다. 모든 게 뜻대로,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일. 구름 너머 올라오는 해를 마주 보고는 3, 8장이 서는 남창 옹기 시장으로 향했다.
초피같은 싱싱하고 알찬 식재료에 사람도 북적 |
부산과 울산을 오가는 전철이 서는 남창역 바로 앞에 시장이 있다. 오전 7시30분 정도임에도 장이 이미 서 있었다. 이미 장을 보고 가는 이도 여럿 있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나만 옷이 얇다. 가을 점퍼 속에 얇은 오리털 조끼만 입고 돌아다녔다. 울주 사람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다녔다. 서울내기 티를 옷차림으로 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쌀쌀했다. 상인들은 작은 화로를 끼고 있거나 난로를 주변에 두고 있었다. 김이 나는 어묵통 주변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시장엔 겨울이 오고 있었다. 취재하러 가면 일을 끝내고 밥을 먹는다. 이날 만큼은 쌀쌀함에 국밥을 먼저 찾았다. 남창 시장은 보통의 시장이 그렇듯 우시장이 같이 열렸었다. 그 흔적을 시장의 국밥집으로 남겼다.
갓 퍼낸 고슬한 밥·뜨끈한 선지국·난로 곁 옹기종기 상인들…몸도 마음도 훈훈해진다
갓 퍼낸 고슬한 밥 |
뜨끈한 선지국 |
시장이라면 으레 순대국밥이 많이 있다. 남창 시장은 순댓국집보다는 소머리국밥이나 내장탕 하는 곳이 많았다. 그중 한 곳을 들어갔다. 주문하고 앉아 있으니 이내 상이 차려진다. 햄버거보다 빠른 패스트푸드가 국밥이라 생각 들 정도로 빨랐다. 밥이 나오는데 다른 곳과 달랐다. 주방 앞 솥에서 바로 퍼주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다른 테이블 또한 밥을 퍼서 나갔다. 국밥이나 탕을 주문하면 토렴하지 않는 이상 공깃밥이 딸려 나온다. 우리나라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대부분 그렇게 한다. 국을 아무리 맛있게 끓여도 공깃밥으로 밥의 숨을 죽여서 내는 순간 맛있는 국의 맛은 반으로 뚝 떨어진다. 고슬고슬 살아 있는 밥과 공기 안에서 짓눌린 밥을 국에 마는 순간 맛의 시작점이 달라진다. 고슬고슬한 밥이 50% 더 맛있게 시작한다. 생각지 않게 국밥을 맛있게 먹고 나왔다. 식사를 든든하게 하고 나니 쌀쌀한 날씨마저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해가 뜬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뚝배기선지국밥 (052)239-2508
남창 시장은 가운데 채소전을 두고 좌우로 나뉘었다. 한쪽은 어물전, 한쪽은 옷이나 잡화 등을 판다. 양쪽 끄트머리는 채소를 비롯해 다양한 상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물전엔 문어가 인기다. 상인도 많고 사는 이도 많았다. 삶아서 판다면 사고 싶었으나 그냥 생물 판매만 했다. 내 팔뚝보다 커다란 개우럭 또한 강렬한 유혹을 보냈다. 다음날 강연이라 입맛만 다셨다. 채소 전은 미나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파는 게 미나리지만 찬 바람이 도는 만큼 향이 진해지는 것이 미나리다. 이제부터 서서히 맛이 들기 시작한다. 또 추워야 맛이 드는 시금치 또한 아직까진 이파리 색이 여린 녹색이다. 여린 녹색이 진하다 못해 검은빛이 돌 때가 가장 맛으로 빛날 때다. 11월은 맛이 들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모든 것에 단맛이 깃드는 시기이기도 하다. 눈으로 구경 다니기는 단풍철이고, 맛으로 다닐 때는 지금부터다.
난로 곁 옹기종기 상인들 |
시장에 배추가 보였다. 익숙하게 봐왔던 속이 꽉 찬 배추 옆에 작고 빈약한 배추가 보였다. ‘청방배추 5000원’이 쓰여 있었다. 청방배추는 재래종 배추다. 재래종 배추 중에서 결구하는 배추다. 토종 배추는 흔히 먹는 배추와 달리 씹는 맛이 좋다. 크기와 무게만을 추구하는 개량 배추와 달리 내실 있는 맛이 있다. 천천히 자라 씹는 맛이 좋고 씹을수록 맛을 내준다. 김치 담가 찌개를 끓이면 여느 김치찌개와 다른 맛을 낸다. 잘 샀다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기다란 배추가 보인다. 여름에 의성에서 샀던 의성배추보다 잎사귀가 길다. 토종 배추와 갓의 교잡인가 싶었다. 우거지 만들어 탕을 끓였다. 사극에서 보면 주막에서 주모가 퍼주던 우거지국밥의 우거지가 이런 배추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배추는 임오군란 이후 자리를 잡은 호배추이니 내 추측이 맞지 않을까. 오래 끓여도 숨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토종 배추의 특징이다.
시장에서는 초피가 많았다. 보통은 제피, 혹은 산초라 부르는 것이다. 화한 맛에 살짝 상큼함이 있으면 초피(제피), 없으면 산초다. 경상도는 초피나 방아 등의 향신료를 잘 쓴다. 이쪽 동네 특징이 물회를 주문하면 매운탕이 같이 나온다. 나오는 매운탕에 빠지지 않고 초피로 마무리하고 내온다. 물회는 시원한 맛으로 먹는 음식으로 여기기에 여름에 많이 찾는다. 식당도 여름 한정으로 하는 곳도 많다. 실상은 물회는 지금부터가 맛있다. 물회의 주인공인 회가 지금부터 제맛이다. 게다가 같이 나오는 채소 또한 여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이 훨씬 맛있다. 맛으로 따진다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여름보다 3만배 더 맛있다. 물회를 시원한 맛이 아닌 회가 주는 맛으로 먹는다면 지금부터다.
매운 수제비 |
물회도 맛있지만 울주군에서 하나만 먹으라면 나는 이 음식이다. 일전에 청도에서 소개한 매운 수제비다. 사람 괴롭히는 캡사이신이 아닌 초피의 아린 맛이 내주는 매운맛이 일품이다. 게다가 방아 잎까지 넣어 맛을 한층 더 깊게 했다. 방아 잎에서 비누 맛을 느끼는 이에게는 싫어하는 음식 1순위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축복 같은 음식이다. 고추장 푼 국물인지라 맵게 보여도 맛은 생각보다 순하다. 순한 맛 사이에서 초피와 방아가 연타로 맛있는 향을 내준다. 쫄깃한 반죽과 함께 먹다 보면 금세 바닥이다. 매운 수제비를 먹을 때는 밥을 같이 주문해야 한다. 밥을 말지 말고 숟가락에 뜨고는 국물에 적셔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가 있다. 거기에 수제비 하나 올리면 국물, 밥, 수제비의 세 가지 맛이 내는 하모니를 맛볼 수가 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수제비나 밥의 양이 조금 부족한 편이라는 것. 많이 먹지 않는 필자임에도 나온 수제비나 밥의 양이 부족했다. 양지혜 매운수제비 (052)262-1008
남창 옹기종기장에 옹기는 보이지 않았다. 옹기마을이 남창에 있어서 그리 부르는 듯싶었다. 그런데도 볼거리가 많은 시장이다. 아래로는 부산이, 위로는 울산이 있기에 사람도, 물건도 많았다. 오랜만에 시장에서 흥을 느꼈다. 흥이 오가면 정이 생긴다. 흥정이 넘치는 시장이었다.
김진영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