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듣명’ ‘유교걸’…웹예능 ‘문명특급’은 어떻게 밀레니얼 대세가 되었나
유튜브 웹예능 ‘문명특급’ 만든 이은재·홍민지 PD
웹예능 <문명특급> 을 이끄는 홍민지(왼쪽)·이은재 PD가 14일 SBS 목동사옥 13층 복도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팀의 강점으로 “소재나 기획 결정권자가 90년대생”이라는 점을 꼽았다. 김기남 기자 |
밀레니얼 세대 일상 콕 집은 ‘숨듣명’ ‘유교걸’…이게 ‘신문물’
“밖에선 아는 척도 안 하지만, 집에서는 따라 춤춰봤을 그 노래! …. ‘깡서트(깡+콘서트)’ 열어주세요.” <문명특급> 진행자 이은재 PD가 지난 5월4일 공개한 유튜브 영상에서 한 말이다.
MBC <놀면 뭐하니?>가 ‘깡’ 역주행 현상을 다루며 비를 직접 불러냈다면, 앞서 ‘숨어 듣는 명곡(숨듣명)’으로 비를 먼저 소환한 프로그램이 <문명특급>이다.
2018년 2월 SBS ‘스브스뉴스’의 한 코너로 출발했다. 세대 공감 토크쇼 ‘다시 만난 세대’ 시리즈를 거쳐 ‘숨듣명’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지난해 7월 유튜브에 독립 채널을 개설했다. <문명특급>의 구독자 수는 24일 기준 80만명으로 1년 만에 스브스뉴스(59만명)를 추월했다. 이은재(30)·홍민지(28) PD가 코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문명특급> 슬로건은 ‘글로벌 신문물 전파 프로젝트’다. 밀레니얼 세대의 일상과 관심사에서 소재를 찾았다. 첫 에피소드 ‘재재의 비혼식’은 비혼주의자는 축의금을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두발자유화에 반대하는 국회의원·학부모 대표를 찾아다니며 토론을 벌였다. 1020세대 일상을 재기발랄한 기획으로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여성들이 자조적으로 쓰는 신조어 ‘유교걸’을 유행시킨 것도 <문명특급>이다. 지난 1월 가수 이효리의 히트곡 ‘유 고 걸(U-Go-Girl)’을 개사한 패러디곡 ‘유교걸’을 선보였다. “제가 장녀인데, 재산 상속은 남동생한테 간다고요? 안 돼!”라는 내레이션이 압권으로 꼽혔다.
‘재재’로 불리는 이 PD의 인기는 연예인 못지않다. ‘연반인(연예인과 일반인 합성어)’이란 별명이 붙었다. 아이돌 그룹을 대하는 남다른 태도로 화제가 됐다. 직접 춤추고 노래할지언정 억지로 개인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생활이나 민감한 주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SBS가 내놓은 자식’으로 불리던 <문명특급>은 추석 특집 파일럿으로 지상파 TV에 진출한다. 예능판에서 ‘가장 바쁜’ 두 사람, 이 PD와 홍 PD를 지난 14일 SBS 목동 사옥에서 만났다.
“90년대생인 우리가 기획·소재 결정…1824세대 공감 끌어냈죠”
아이돌도 전문직 감정노동자… 편한 분위기 만드니 재밌게 찍어요
촬영 때라도 ‘인간 대 인간’ 배려… 돌아오는 것은 콘텐츠의 인기죠
인터뷰 전 사진 촬영을 먼저 진행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익숙한 이 PD가 여유롭게 웃으며 쉴새 없이 포즈를 바꿨다. “재재 정말 대단하다.” 홍 PD 반응에 이 PD가 답했다. “야, 너도 그냥 웃어.” 촬영 장소인 사옥 13층 복도가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꽉 찼다. 촬영 내내 농담을 주고받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허락된 시간은 한 시간.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이 PD가 “준비됐다”며 기자를 재촉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자 농담기는 사라졌다. 진지하고 차분한 자세로 기획력의 원천 등을 설명했다. 추가 전화 인터뷰(18일)도 반영해 정리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그 자체로 신문물’
닉네임 ‘재재’로 불리는 이은재 PD(왼쪽에서 두 번째)는 사생활이나 민감한 주제는 언급하지 않는 진행 방식으로 아이돌과 팬들에게 사랑받는다. 문명특급 화면캡처 |
‘유교걸’이 인기를 얻으면서 ‘K장녀’란 말이 유행했는데요.
이은재(이하 이) = (홍 PD를 바라보며) ‘유교걸’ 요즘 대학교 강의에도 나오는 거 알아? ‘유교걸’의 시작은 회사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밍키(홍 PD)가 던진 ‘나도 장녀인데 사촌오빠가 재산상속 받더라’라는 말 한마디였어요. 전 비록 차녀이지만 주변에 유독 남동생을 둔 누나들이 많아요. 명절을 쇠고 오면 그렇게들 억울해하고 짜증을 내요. ‘유교걸’ 내레이션은 밍키와 지인들의 경험담에서 탄생했어요.
홍민지(이하 홍) = 이게 진짜 아이템이죠. 제가 할머니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노래로 풀어낸 것이기도 하고요. 팀 강점은 소재나 기획 결정권자가 저희라는 거예요. 누구나 경험담을 풀어놓을 수는 있지만, 콘텐츠 소재로 채택되기는 쉽지 않죠. 저흰 저희가 하겠다고 결정하면 그만이에요. <문명특급>이 1824세대에게 공감대를 얻은 건 이 부분이 중요했다고 봐요. 대부분의 조직에선 90년대생이 결정권자는 아니잖아요.
콘텐츠 소재 결정권은 처음부터 주어진 건가요.
이 = 당연히 초반엔 아니었어요. 저희가 아이템을 가져가면 팀장이 힘들어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도 저희를 새롭게 봐주고 많이 수용해주셨어요. 그 덕에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고 봐요.
‘숨듣명’도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일하면서 생각 없이 듣기 좋은 가요’라는 의미의 ‘노동요’ 모음이 유행하던 때였다. 노동요 홍수 속에 광희 등이 속했던 그룹 제국의아이들이 불렀던 곡 ‘마젤토브’를 발견했다. ‘라틴 걸, 멕시칸 걸, 코리안 걸, 재팬 걸’ 등 언뜻 이해하기 힘든 노랫말이 나열된 이 노래는 2010년 발표 때 히트를 치지 못했다.
제국의아이들 멤버 하민우와 ‘마젤토브’의 작곡·작사가 한상원을 직접 만나 가사 의미를 물었다. 하민우는 곡을 처음 받아보고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눈물을 흘렸다며 뒷얘기를 전했고, 한상원 작곡가는 멤버들에게 미안하다며 진땀을 뺐다. 곡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추억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 자체로 신선함을 주는 콘텐츠였다.
이후 남녀공학의 ‘삐리뽐 빼리뽐’(2010), 나르샤의 ‘삐리빠빠’(2010), 파이브돌스의 ‘이러쿵 저러쿵’(2011), 비의 ‘깡’(2017) 등 지금 K팝의 토대가 된, 유치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당당한 노랫말로 된 곡들을 속속 발굴해 수면 위로 ‘끌올(끌어올림)’했다.
자칫 노래나 가수에 대한 희화화 또는 조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선’을 넘지 않았다. 첫째, 안 웃기면 웃을 필요 없다. 둘째,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한다. 셋째, 아이돌을 전문 직업인으로 대우한다. 세 가지 원칙을 내걸었다. 대형 아이돌 소속사가 먼저 협업을 요청하고, 아이돌 팬들이 가수에게 <문명특급> 출연을 제안하는 기현상은 이런 원칙 덕에 가능했다.
<문명특급>은 아이돌을 전문직으로 대한다고 했어요. 직장인으로서 감정이입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홍 = 네, 맞아요. 이입을 많이 했어요. 열심히 한 결과물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때, 성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억울하잖아요. 아이돌도 직장인으로 따지면 앨범이 일종의 성과물이에요. 춤 연습도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근데 가는 곳마다 애교 부려보라는 요구만 받고, 이상형이 누구냐,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이 먼저 나오죠. 정말 억울한 일이에요. 그런 지점에서 우리 프로그램에선 이런 질문, 이런 요구하지 말자. 팀원 모두가 공감했어요.
측은지심을 느낀 거네요.
홍 = 그건 아니에요. 측은하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희가 제일 측은하거든요.
이 = 맞아요. 저희가 제일 불쌍해요.(웃음) 그래서 게스트를 고압적인 태도 없이 대했던 것 같아요. ‘어디 한번 해봐라’ 이런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홍 = 저희 프로그램에선 재재가 감정노동은 직접 다 하죠.
이 = 아이돌 멤버들이랑 눈 마주치면 ‘힘드시죠? 우리 인생이 그렇죠’ 하면서 웃어넘겨요.
홍 PD는 자신의 블로그에 ‘90년생은 프로불편러라는 수식어를 창조한 영광의 첫 세대다. 우리처럼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후배를 외면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분노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절대로 잊지 말자’라고 썼다. 이런 마음가짐이 프로그램 제작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포털사이트에 ‘프로불편러’를 검색하면 ‘매사 예민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도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해서 논쟁을 부추기는 유난스러운 사람’이라는 설명이 나오죠. 홍 PD는 프로불편러인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했어요.
홍 = 학창 시절 선생님들과 엄청 싸웠어요. 중학교 때 출석부 이름 옆에 주소를 쓰게 했거든요. 동네 특성상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주소를 본 뒤에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걸 봤어요. 학교에 주소기입란을 없애야 한다고 요구했죠. 근데 안 없애더라고요. 모든 반을 돌면서 칼로 출석부를 찢었어요. 학생부에 끌려가서 엄청 혼났지만,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최근에 엄마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셨어요. 예전엔 왜 가만히 있지 않고 매사 불만이 많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제가 다 옳았다고요. 요즘도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아무리 남편이랑 싸워도 아침밥을 꼭 차려주겠다는 식의 ‘서약’을 하면 분개해요. 식장에선 아무도 동조 안 해주는데, 저희 팀에 오면 다들 ‘미친 거 아니야?’라면서 제 말에 맞장구를 쳐요. 아,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모이게 해버렸구나.
이 = 대학생 때만 해도 ‘자취하고 잘 취한다’ 하는 농담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놀았어요. 웃긴 농담이라고 여기고 웃고 즐기고 소비하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순간에 이런 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사소한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해요. 가끔 너무 검열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검열 안 하는 것보단 심하게 검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여초에, 젊고,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직장이다 보니 제가 오히려 동료들을 보면서 배워가는 게 많아요.
홍 = 불편함과 재미는 다른 영역이라 생각해요. 편하면서도 충분히 재밌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어요.
한 아이돌 매니저는 “매니저로 일하는 10년 동안 이렇게 편한 촬영은 처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문명특급>이 특별히 편한 현장이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홍 =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요. 원래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 리액션이 크면 오디오가 맞물린다고 해서 조용히 시켜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배웠고요. 연출자가 되어보니 현장에서 (스태프가) 웃는 걸 억지로 웃지 말라고 하는 게 이상했어요. 제작진과 출연자로 만나는 것이긴 하지만 ‘초면’인 사람들이 모인 자리잖아요. 같이 웃거나 감정표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웃음소리가 너무 크면 편집할 때 소리를 좀 줄이면 돼요. 인간 대 인간으로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배려하자 싶었죠.
아이돌 그룹을 많이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 = 업계와 아이돌 간의 갑을관계가 확고해요. 만났을 때 과하게 인사를 하거나, 과하게 밝은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엔 성격이 좋은 분들이 많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예계 종사자들을 많이 만나고,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게 되니 시각이 180도 달라졌죠. 아, 이거 문제구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거네요.
홍 = 네. 저희와 다를 것 없는 노동자들인데, 회사에서 웃으라고만 시키면 정말 못할 일이잖아요.
이 = 저라면 벌써 퇴사했어요.
홍 = 근데 이분들은 하고 있어요. 그것도 너무나 어린 나이에. 무조건 밝아야 하고 과하게 인사해야 하고, 이런 일이 직업의식으로 불린다면 좀 이상한 거 아닌가요. 아이돌이라고 해서 촬영 현장에서 계속 웃고 있을 수는 없어요. 중간중간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무표정할 수도 있죠. 이런 부분은 편집할 때 잘라내면 그만이에요. 좋은 내용이라도 출연자가 태도 논란의 당사자가 될 여지가 있으면 덜어내요. 편집자가 내 일이 아니라고 대충 내보내면 욕먹는 건 아이돌이잖아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숨듣명’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기존 방송사들이 <문명특급>의 소재를 차용한 콘텐츠를 내놓기 시작했어요. MBC 영화 소개 프로그램 <출발! 비디오 여행>에는 ‘숨보명(숨어 보는 명화)’ 코너가 생겼고, 엠넷 예능 <TMI뉴스>는 아예 ‘숨듣명’을 주제로 한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일부 누리꾼들은 방송사가 뉴미디어 콘텐츠를 베꼈다며 비판했어요.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홍 =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처럼 될까 조심스러워요. <문명특급>을 계기로 다른 방송에서 ‘숨듣명’이 회자되는 건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콘텐츠를 끌어올리자’는 기획 취지에 맞는 일이에요. 방송 출연한 분들이 잘되면 저희도 좋아요. 최선을 다해 콘텐츠를 만들었고, 저희 역할은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해요.
이 =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하잖아요. 저희도 인터넷 ‘밈’을 끌어와서 소재로 썼으니까요. 상부상조하는 거죠.
“삶을 갈아 넣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제작 환경 만들고 싶어요”
박봉인 노동구조 만연, 10·20 어린 친구들에게 업계 장점만 보일까봐 처우 문제 꾸준히 지적
후배와 관계 맺는 법? 필요한 게 보인다 싶으면 말하기 전에 사다주세요 ‘관심있구나’ 느낄 수 있게
2015년 SBS 뉴미디어 콘텐츠 ‘스브스뉴스’ 2기 인턴으로 입사한 홍민지 PD(왼쪽)와 이은재 PD는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뉴미디어 업계의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내온 이들은 “(뉴미디어는)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적폐와 차별적 노동구조를 뒤엎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티슈인턴’ 뉴미디어 산업의 송곳이 되다
두 PD는 2015년 ‘스브스뉴스’ 2기 인턴으로 SBS 보도국 뉴미디어부에 입사했다. 특정 직업을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취업 문턱에서 수없이 좌절했고, 당장의 일자리가 급했다. 당시 채용공고에 따르면 근무 기간은 6개월, 주 5일 하루 7시간 근무, 일당은 4만5000원이었다. 한 번 쓰임을 당하고 버려진다는 의미의 ‘티슈 인턴’이었다. 이 PD는 카드뉴스를 만드는 스토리텔러, 홍 PD는 영상 편집 인턴으로 출발했다.
6개월의 인턴 생활이 끝나자 직함이 상근직 프리랜서인 ‘에디터’로 바뀌었다. 월급이 200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올랐다. 스브스뉴스가 2018년 1월 뉴미디어 부문 서비스를 통합·담당하는 자회사 SBS디지털뉴스랩으로 독립하면서 두 사람도 자회사 소속 정직원이 됐다. 뉴미디어 산업도, <문명특급>도 급성장했지만 이들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다. 이 PD의 별명 ‘연반인’에는 연예인에 맞먹는 스케줄을 소화하고도 직장인의 월급을 받는 현실도 담겼다.
이 PD는 ‘취준(취업준비)’ 첫 학기에 자기소개서만 50장 넘게 썼다고 했어요. 두 사람 모두 SBS에 입사한 뒤에도 한동안 취준 활동을 병행해야 했고요. 프리랜서 신분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 = 취준생 모두가 그럴 거예요. 힘든 시기였어요. 특히 면접에서 떨어진다는 게 기준이 명확하지 않잖아요. 떨어지고 나면 내가 뭘 잘못했을까 여기저기 찾게 돼요. 제 잘못이라기보다는 외부적 환경 탓이 클 텐데 자꾸만 제게서 원인을 찾으려 했어요. 참 지난하고 끝이 없을 것 같던 터널이었는데, ‘존버’하니까 일자리가 나긴 났어요. ‘존중하며 버티기’라고 써주세요.(웃음)
홍 = 일의 공백은 없었는데 정착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내가 왜 정착해야 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취업준비를 그만뒀어요. 일단 <문명특급>을 만난 게 컸어요. 회사가 아니라 이 프로그램에 둥지를 틀었다고 할까요. 현재 회사의 비전과 제가 하고 싶은 것의 방향성이 맞는 상태라 이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제 가능성을 회사 안에만 두고 싶진 않아요.
두 사람은 꾸준히 팀 처우 문제를 지적하고 있어요. 정직원이 된 이후에도요. 직장인 신분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계속 언급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 = 심각하니까요. 정규직이 됐지만, 이도 저도 아니던 ‘방랑자’ 취준생 기간이 길었어요.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비정규직일 때와 지금의 마음이 좀 달라요. 스스로도 놀라요. 정규직이 되기 전엔 ‘배 째라’라는 심정으로 임했거든요. 지금은 더 조심스럽죠. 하지만 뉴미디어 업계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박봉인 노동구조가 만연해요. 제가 말한다고 당장 바뀌는 건 없지만 한마디라도 해보는 거예요. 아, 이유가 또 있어요. 저를 보고 이 업계에 들어오고 싶다는 후배들을 본 다음부터요.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분야든 일장일단이 있죠. 하지만 어린 친구들이 너무 뉴미디어 산업의 장점만 보는 건 아닐까. 모두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불안정한 노동구조가 떠받드는 현실이에요. 제 단면만 보고 업계에 쉽사리 마음을 두는 건 재고해봤으면 좋겠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홍 = 모든 언론, 미디어 산업이 젊은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저흰 뉴미디어잖아요. ‘뉴’가 중요하다고 봐요.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적폐와 차별적 노동구조를 뒤엎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요. 이 업계에선 가장 선배가 저나 재재예요. 선례가 없거든요. 사람을 갈아 넣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있어선 배울 선배가 없고, 조직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뉴미디어 제작 시스템은 기존 방송과 분명히 다르거든요. 당장은 어렵지만, 꼭 해내고 싶어요.
절실함이 느껴지네요.
이 = 정말 어쩌다,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밍키 같은 편집 인력은 후작업에서 쏟아붓는 공이 엄청나요. 정말 못 쉬어요. 이 자리에선 멋진 재킷을 입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사람답지 않게 살고 있어요. 허리디스크도 달고 살죠. 90년대생 특징 중 하나가 불평불만하면서 주어진 일들을 너무 성실히 해내서 문제라고 하잖아요. 저희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일하는 후배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아쉬움에 더 말하게 된 것 같아요.
맞아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동경하지만, 현실은 <위플래쉬>처럼 스스로 채찍질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 회사 욕을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키보드에 올라가 있죠.(웃음)
인턴 후배들을 대하는 다섯 가지 원칙을 언급하기도 했어요. 첫째, 근무시간 외 연락 금지. 둘째, 모니터 쳐다보기 금지. 셋째, 저녁 사주기 금지. 넷째, 옷 평가 금지. 마지막이 철벽 치기 금지예요. 철벽 치지 않는 법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요. 후배와의 관계 맺기, 철벽을 무너뜨리는 법은 무엇일까요.
홍 = 돈 쓰는 거요. 커피가 필요해 보인다 싶으면 말없이 커피를 사다주는 거예요. 이어폰이 좀 낡아 보인다면 ‘이어폰 좀 바꿔’라고 말하기 전에 이어폰을 사주세요. 표현은 안 하지만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 느낄 수밖에 없잖아요.
이 = 맞아요. 입을 닫고 지갑을 여세요.
<문명특급>은 10월2·3일 SBS TV 추석 특집에 편성됐다. 첫 지상파 방송이다. ‘숨듣명’으로 소환됐던 가수들과 함께 <숨어 듣는 명곡 콘서트>를 연다. 동시간대 경쟁작이 MBC 간판 예능 <나 혼자 산다>다.
TV 편성 소식을 듣고 어땠나요.
이 = 지난 6월 추석 특집 편성 소식을 들었어요. TV 편성은 그동안 끊임없이 요구해온 것이라 놀랍거나 엄청 기쁜 대신 ‘이제서야’란 감정이 컸죠.
홍 = 맞아요. 그래도 기쁜 일은 기쁜 일이에요. <인기가요> 장비와 세트를 빌려 쓰면서 우리가 대기업 계열사이긴 하네 싶더라고요.(웃음)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일 텐데, <문명특급> 팀의 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홍 = 저희 둘 공통점이 먼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문명특급>도 매번 6개월 있다가 폐지하자고 그랬거든요. 딱 3개월씩 살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3개월만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깔끔하게 포기해요.
이 = 맞아요. 3개월이 끝인 것처럼. 그래서 끝이라는 각오로 항상 임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
<문명특급>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홍 = 그렇죠. 안 봐주시면 끝내야죠.
이 = 뉴미디어 업계가 금방금방 변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정말 3개월을 버티는 것도 대단한 거예요.
두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이 = 전 롤모델이 없었어요. 뉴미디어 시장이 부상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제 롤도 기존엔 없던 롤이니까요. 10대 친구들이 절 장래희망으로 꼽는단 걸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가볍게 보고 넘어가 주셨으면 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빨간 쇼트커트나 비혼식이 선택으로 존중받고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 날이 오는 거예요.
홍 = 제 인생 철학이 ‘조언하지 말자’거든요. 지금까지 제게 조언해준 분들 대부분이 이 일을 관두라고 하셨어요. 너무 힘들어보이니까 저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죠. 너무나 감사한 조언이지만 그 말을 듣고 그때 그만뒀더라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고민을 들었을 때 공감해주는 것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조언은 돈으로, 맛있는 걸로 대신하는 게 어떨까. ‘1인식’으로요. 다만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더라도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은 전하고 싶어요.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