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힐링 감성 ‘충전’ 벨기에 여행
벨기에 브뤼셀·브뤼헤·겐트
브뤼셀과 브뤼헤의 중간 즈음에 있는 겐트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다. 세월의 흔적이 밴 석조 건물들과 위세당당한 플랑드르 백작의 성은 파리 다음으로 부유했던 도시의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
겐트
“여기, 후회 않을 거예요” 가이드가 강하게 권했다
강에 비친 중세도시에선 과거의 영화가 느껴졌다
브뤼셀
벨기에서 정말 작은 건 '오줌싸개 소년’ 동상뿐
‘큰 광장’ 그랑플라스엔 감자튀김에 맥주 마시는 사람들 모습이 흔했다
브뤼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작은 집들 사이 운하와 배
북해의 향이 담긴 홍합탕 꽃향기 담긴 벨기에 맥주 온몸에 온기가 전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만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기 위해 저녁 6시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개가 나오기 때문에 빠짐없이 챙겨본 유일한 만화였다. 가난한 소년 네로가 평소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걸려 있는 성당에서 충성스러운 개 파트라슈와 부둥켜안고 얼어 죽는 결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밥도 못 먹고 통곡을 했고, 한동안 트라우마 비슷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파트라슈가 우유 수레를 끌던 푸른 잔디, 네로가 산딸기를 따러 가던 작은 동산 플랜더스. 플랜더스(Flanders)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벨기에의 북쪽 지역, 플랑드르(Flandre)의 영어식 표현이라는 걸 여행 중에 알았다. 네로가 살던 마을은 앤트워프시 외곽이고 네로가 죽은 곳은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스머프가 태어난 나라
벨기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같은 강대국에 낀 무척 작은 나라라는 점, 그리고 맥주와 와플, 초콜릿 정도? 네덜란드 여행을 하는 김에 들러나 보자, 하고 시작한 벨기에 여행은 예정보다 며칠 길어졌고, 낯설고 작은 도시들은 아늑하게 마음에 파고들었다.
작은 나라엔 의외로 많은 것이 있었다. 만인의 사랑스러운 연인 오드리 헵번과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벨기에 출신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수도 브뤼셀에 있다. EU본부 앞에서는 크고 작은 단체들이 항상 시위를 했다. 어느 날은 인종 문제, 또 다른 날은 난민 문제였다. EU본부를 지날 때마다 유럽이 마주한, 우리에겐 조금 낯선 문제를 들여다보게 됐다.
벨기에는 한국전쟁 때 3000여명의 군인을 파병해 우리나라와는 각별한 나라다. 또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머프'가 탄생한 곳이자 19세기 말부터 서양권을 휩쓴 예술사조 아르누보의 발원지다. 아르누보는 건축물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발현되었지만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건물이라 문이나 창문, 테라스 장식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찾아보는 것도 벨기에 여행의 즐거움이다. 식물의 줄기와 꽃잎, 여신 심지어 뱀까지.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건축물에 무늬를 새겨 넣은 자연주의적 스타일은 도시를 화사하고 우아하게 만들었다.
의외로 큼직큼직한 이야기가 있는 작은 나라에 반대로 정말 작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오줌싸개 소년’ 동상일 것이다.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제대로 보기도 힘들거니와 키가 60㎝ 남짓한 동상을 마주하면 너무 작은 크기에 실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동상이 거대한 사이즈라면? 너무 선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감자튀김의 고향
브뤼셀 여행의 중심지인 그랑플라스에 자리 잡은 거리의 화가. |
네덜란드에서 벨기에로 향하는 기찻길. 운하는 넓다가도 좁아지고 갈라졌다가도 합쳐졌다. 브뤼셀에 도착하니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이어졌다. ‘작은 파리’라는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브뤼셀 왕궁을 보며 베르사유 궁전이, ‘큰 광장’이라는 뜻의 그랑플라스를 지나며 파리의 고풍스러운 광장이, 생 미셸 성당을 보며 노트르담 대성당이 자꾸 떠올랐다. “와, 파리 같다!” 브뤼셀을 칭송하자고 하는 말이었지만 벨기에의 생생한 모습이 가려지고 파리의 격만 높여주는 것 같아 자제하기로 했다. 아무리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더라도 우리나라를 ‘작은 중국’이라고 매번 표현한다면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파리의 대표 프랜차이즈 빵집 폴에서 크루아상과 커피를 사먹고 카르푸에서 프랑스 와인을 사고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병기된 공공기관의 표지판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가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벨기에를 대표하는 음식인 감자튀김의 이름도 프렌치프라이다. 프렌치프라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를 찾았던 미국 군인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말이다. 당시 벨기에 군대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를 쓰며 감자튀김을 먹는 벨기에 군인을 본 미국 군인들이 프랑스식 감자튀김이라며 프렌치프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를 ‘프렌치프라이’라 부르면 서운하지 사람 키보다 큰 감자튀김 조형물. 프렌치프라이는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 군인들이 감자튀김을 먹는 걸 보고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름은 프랑스에 빼앗겼어도 감자튀김은 분명 벨기에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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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마트에서 냉동 감자튀김 봉투를 보면 ‘블람스 프리테스(Vlaamse frites·플랑드르 지방의 튀김)’라고 쓰여 있다. 골목 식당에서도 프렌치프라이 대신 블람스 프리테스를 쓴다. 감자튀김은 당연히 벨기에 사람들의 것이란 뜻이다. 땅이 해수면보다 낮아 척박한 지형을 일구며 살아온 벨기에 사람들에게 감자라는 식재료는 중요했을 것이다.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프랜차이즈에서 햄버거와 함께 당당히 대표 메뉴로 오를 정도로 위상이 높아진 감자튀김의 고향이 벨기에라는 사실도 놓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가 되어 세계에 알려진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닌 것처럼.
브뤼셀 여행의 중심인 그랑플라스 부근엔 자갈이 근사하게 깔려 있어 중세의 분위기에 젖는다. 그러다가도 난데없이 사람 키보다 큰 감자튀김 모형과 맞닥뜨린다. 멋을 한껏 낸 커플이 감자튀김과 맥주를 먹고 있는 모습도 흔했다. 나 같은 여행자가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하지만, 감자튀김만은 당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 갓 튀겨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뜨거운 감자튀김이 담긴 고깔 모양의 종이 용기를 들고 걷노라면 마냥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테이블에서 먹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감자튀김은 들고 다니며 손가락을 빨며 먹어야 제맛이다.
고흐의 초기 작품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 감자가 어떤 계급의 먹거리인지 잘 알 수 있다. 홍합도 마찬가지. 귀족은 굴을 먹고 빈민은 홍합을 먹었다. 수백년 전 식량난에 허덕이던 벨기에 사람들은 북해에 널린 홍합을 운하를 통해 싣고 와 화이트와인과 마늘에 볶아 먹었고, 감자는 가늘게 썰어 기름에 튀겨 먹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가장 천대받던 식재료가 벨기에를 상징하는 음식이 된 것이다.
레이스로 지도 만드는 ‘킬러들의 도시’
브뤼헤의 운하엔 관광객을 태운 보트와 백조들이 함께 노닌다. |
브뤼셀에서 한 시간이면 닿는 북해의 작은 도시 브뤼헤(Bruges)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마을이 있나 싶었다. 브뤼헤가 레이스 가공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걸 마을 입구에서 알았다. 레이스로 만든 마을 지도라니! 브뤼헤는 영화 '킬러들의 도시'의 배경이다. 살인의 잔혹함과 대립되는 배경 장치로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를 선택한 듯하다. 주인공은 죽을 때까지 브뤼헤를 혐오했지만, 도리어 그것이 브뤼헤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과 크고 작은 집들 사이로 흐르는 운하에 관광객을 위한 작은 배와 커다란 백조가 물 위를 떠다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건물 나이가 적힌 나무판자와 숨은 듯 자리 잡은 수공예 상점들, 달콤한 냄새가 퍼져 나와 살펴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초콜릿 가게. 골목의 풍경이 애틋해서 아마도 이 도시를 다시 찾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지금도 브뤼헤가 그립다.
칼바람에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추운 봄날이었다. 그날 가이드로 동행했던 로라는 브뤼헤에서 홍합을 꼭 맛보기를 권했다. “북해와 가장 가까운 도시니까요. 아무래도 가장 신선하지 않겠어요?” 홍합은 북해의 내음을 담고 있었다. 비릿한 맛은 마늘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의 포장마차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의 홍합탕 맛과 매우 흡사해서 이질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라가 알려준 홍합 먹는 법은 이렇다. 홍합 한 알을 포크로 빼먹은 다음 홍합 껍데기를 집게 삼아 다른 홍합 살을 빼먹는다. 다 먹으면 두툼한 빵을 냄비에 남은 국물에 찍어 먹는다. 산처럼 쌓인 홍합 껍데기를 보면서 뿌듯해하면 끝. 온몸에 온기가 전해지니 맥주를 마실 차례다.
북해의 바람, 새콤달콤한 맥주
브뤼헤 맥주 공장인 ‘더 할브 만’(De Halve Maan) 양조장을 찾았다. 1856년부터 맥주를 생산해 온 양조장은 놀랍게도 땅에 맥주 전용 수송관을 매립해서 맥주를 직접 공장으로 흘려보낸다. 들국화 같은 홉 다발이 양조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어서 ‘과연 이 홉은 어떤 풍미를 만들어낼까?’ 호기심이 상승했다. 맥주를 입에 대자마자 새콤달콤한 꽃향기가 터졌다. 맥주 순수령으로 다른 것을 섞지 않는 독일 맥주가 단순하고 직선적인 풍미를 지녔다면, 벨기에 맥주는 화려하고 곡선적인 맛이 특징이다. 벨기에 맥주에서도 어쩐지 아르누보가 느껴졌다.
로라는 70세가 넘었지만 믿을 수 없는 체력과 열정을 가진 가이드였다. 벨기에에 살면 웬만한 추위에는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생긴다 했다. 벨기에의 추위는 한국의 것과 다르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린내와 뾰족하고 날선 무언가가 있었다.
폭풍우가 심한 날이라 투어를 마치고 싶었는데도 그녀는 겐트(Ghent)에는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겐트는 브뤼셀과 브뤼헤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다. 강한 비바람을 맞으며 휘적휘적 걸었다. 브뤼헤가 어딘가 여성적인 데가 있다면 겐트는 남성적이다. 13세기만 해도 파리의 뒤를 이을 정도로 부유했던 도시였다. 때 묻은 석조 건물들과 플랑드르 백작의 거대한 성, 호령하듯 서 있는 뾰족한 대성당은 겐트의 과거 위세를 짐작하게 했다. 중세부터 수많은 사람이 걸어 다녔을 골목 사이로 빨간 트램과 자전거가 재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여기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시간만 있다면 겐트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먹어야 하는데… 리스강에 비친 중세도시를 보면서 크루즈를 타야 하는데… 플랑드르 화가의 작품이 있는 대성당에 가야 하는데….” 로라에게도 내게도 시간은 부족했다. 벨기에를 네덜란드나 프랑스로 갈 때 지나치는 작은 나라 정도로 생각했다면, 다시 이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벨기에에서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오줌싸개 소년 동상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김진 |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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