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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by 경향신문

부를 물려받지 못한 청년, ‘불평등’ 수렁에 빠지다

90년대생 불평등 보고서

‘불평등’만 대물림 받은 장지창씨 이야기

 

사업으로 잘나갔던 할아버지

아빠가 세탁기 일 그만두자

외환위기 후 집안 형편 기울어

나는 등록금 위해 알바 인생


한때 서울에 3대가 살았지만

부모님은 빚내서 ‘부천’ 가고

나는 대학교 위해 ‘강릉’으로

“집이란 건 넘볼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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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 자원을 갖춘 부모는 자녀 손에 다양한 선택지를 쥐여준다. 이들은 ‘스펙’을 쌓아 좋은 일자리와 집을 얻는다. 부모의 ‘계층’은 자녀의 ‘계층’으로 이어진다.


마땅한 부를 물려받지 못한 자녀는 어떨까. 노력만으로 원하는 선택지에 도달하긴 쉽지 않다. 누군가는 스펙을 만들려고 학원에 다닐 때, 누군가는 학원비를 벌어야 한다. 경제위기나 질병을 마주하면 일상까지 무너지기 쉽다. 계층을 오르거나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의 품이 부모에 따라 달라진다.


경향신문은 대물림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 가족을 만났다. 장지창씨(29)와 그의 어머니 김수진씨(59)에게서 3대의 가족사를 들었다. 이들 가족은 어떻게 보면 평범했다. 첫아들 장씨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돌잔치를 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가족은 차를 타고 캠핑을 떠났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네 식구가 모일 시간은 적어졌다. 화목할 때도, 다툴 때도 있었다. 가끔 복잡한 가정사에 부딪혔지만 가족 발목을 잡을 비극은 없었다.


대를 거듭할수록 형편이 나빠졌다. 장씨의 조부모인 1대는 서울에 집을 뒀다. 할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 외할아버지는 존경받는 교사였다. 2대는 서울 외곽으로 이사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얻지 못했다. 3대인 장씨는 강원도 강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낸다. 미래는 유예했다.


할아버지와 장씨의 삶은 달라졌다. 장씨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장씨는 여러 직장의 문을 두드리고, ‘내 집 마련’과 취업 같은 꿈을 이루려고 앞만 보고 달렸다. 지금도 돈을 벌며 여러 가능한 경로를 모색한다.


자산. 장씨 가족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땅히 물려준 게 없다. 부모 학력과 자산으로 뒷받침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녀세대는 자립하기 어려웠다. 2대 때인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피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을 때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 일자리 찾기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3대엔 꿈을 이룰 토대가 없다. 꿈이라도 꾸고, 준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3대를 내려오는 동안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지”라던 호언장담은 “노력해봤자 될 수 없다”는 한탄으로 바뀌었다.


장씨 3대 이야기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여러 가정의 모습과 닮았다. 어쩌다 보니 재산을 불려줄 집을 구하지 못하고, 어쩌다 보니 잘리지 않을 직장을 얻지 못해 한 계단씩 내려온 집들 말이다. 일부 상위 계층을 제외하면 여러 가정은 대를 거듭하면서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을 관통한다. 부모 자산이 대물림되는 것처럼, 계층 불평등도 대를 타고 내려온다. 장씨 3대의 이야기를 학업과 일자리, 부동산, 꿈으로 나눠 살폈다.

중단된 학업과 불안정한 일자리

대학교 3년 다닐 동안 알바·휴학 6년 ‘캐슬 밖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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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몰랐다, 가난이란 것’ 1991년 2월 서울 성수동 친할아버지댁에서 열린 장지창씨의 돌잔치 모습. 장씨는 이날 돌잡이에서 연필을 골랐다. 장지창씨 제공

장지창씨(29)는 강원도의 국립대 자동차공학과에 다닌다. 3년째 휴학 중이다. 08학번이지만 졸업할 때까지 한 학년 남았다. 군 복무 시간을 제외하면 휴학 기간은 총 6년이다. 휴학 기간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늘 나쁜 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함흥공대를 다녔다. 외할머니도 함경도에서 교대를 나왔다. 이들은 1·4 후퇴 때 피란했다. 외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일했다. 장씨 어머니 김수진씨(59)는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친가는 세탁기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세탁기 통이 드럼세탁기처럼 회전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서울 중부시장에서 사업을 했다. 장씨 아버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 남편 기술을 업계에서 따라갈 수가 없었대.” 김씨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버지가 세탁기 사업을 그만두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2000년대 초반이다. 부를 물려받지 못한 자녀세대는 휘청였다. 2001년 한국은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했지만 여파는 지속됐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해고당한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일 나가는 척했어요.” 장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가족 4명이 치킨 한 마리를 먹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치킨 한 마리 시켜주려면 벼르고 별렀어. ‘아빠가 돈 가져오면 그때 사줄게. 좀만 기다려봐’ 이러면서 안 사줬지.”


아버지는 주유소, 신발공장, 차량정비소, 공사현장을 전전했다. 그는 현재 보도블록 공사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김씨는 남편이 해고된 뒤부터 일했다. 주로 판촉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 한 일은 대형마트 뻥튀기 시식 아르바이트다. 장씨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일을 곧잘 했다. 완판을 이어가자 2층 서점에서 책을 팔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명절 단기 아르바이트로 판촉 일을 할 땐 판매율 전국 1등을 하기도 했다. 3일 만에 모든 상품을 팔았다. 일급 6만5000원이던 시절 김씨는 9만원을 받았다. 인센티브로 10만원을 더 받기도 했다.


“목청이 좋아서 종일 노래를 해도 목이 잘 안 쉬어. 근데 그땐 목도 쉬고 감기도 걸리고 장염도 앓았어. 기어다닐 정도로 아팠는데도 일했지.” 김씨는 3년 전 서울 구로구의 한 대형마트에 판촉사원으로 취업했다. 폐점하면서 지난달 31일 일자리를 잃었다. 현재 이들의 고정수입은 김씨의 실업급여뿐이다.


장씨는 집안의 경제적 여건을 잘 알았다. 부모가 대학 등록금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9월 수시에 합격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부모님이) ‘넌 몰라도 된다’면서 집안 사정을 다 이야기해주진 않으셨어요. 고등학생 때 일하는 걸 막지 않으신 걸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왔죠.” 세차장에서 자동차 바퀴 닦는 일을 한 달 정도 했다. 일이 고되 엄지발가락에 마비가 왔다. 이후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콜센터, 택배회사, 백화점 푸드코트 등 여러 일을 했다. 종종 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9년 장씨는 콜센터에서 휴대전화를 팔았다. 판매실적이 600여만원에 달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무실을 찾아가니 텅 비어 있었다. 2011년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호주 최저시급은 1만9800원이었다. 주급으로 140만~160만원을 벌 수 있었다. ‘6개월 동안 열심히 일해 등록금 걱정하지 말자’가 목표였다. 한국인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남은 돈은 10만원이었다.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로 돌아왔다.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2~3시까지 택배상자를 나른다. 세후 126만원을 받는다. 학자금 대출 250만원을 조금씩 갚고 있다. 대출 탓에 신용등급이 떨어졌다. “대출이 40만원 남았을 때 만기일이 돼버린 거예요. 만기가 있는 줄 몰랐는데 하루 만에 신용등급이 2에서 7로 떨어졌어요. 막막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니까 달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가장 힘들었죠.” 장씨는 빚은 지지 말자는 생각으로 3년째 복학을 미뤘다.

넘볼 수 없는 부동산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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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겨울 장씨 돌잔치가 열렸다. 이때만 해도 3대는 모두 서울에 살았다. 장씨 가족은 한복을 차려입고 성수동 붉은 벽돌담이 있는 연립주택에 모였다. 장씨 친가였다. 친조부모는 장씨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외조부모는 서울로 피란와 사대문 안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장씨 돌잔치 후 약 30년이 지났다. 일가는 점점 서울 바깥으로 흩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어디 사세요”란 질문의 답엔 사회경제적 지위가 묻어난다. 어떤 형태, 어느 지역, 자가인지 전·월세인지에 따라 삶의 질이 가늠된다.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에 사는 사람의 생활이 다르듯 교육수준과 인적 네트워크도 덩달아 달라진다. 상위 계층에 안착한 사람들은 ‘캐슬’을 쌓아올린다. 집을 토대로 자녀에게 좋은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준다. 한번 ‘캐슬’ 밖에 자리 잡은 사람은 끼어들기 어렵다. 재산가치가 높은 집에 살수록 자산은 불어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주택 보유량 상위 1%가 보유한 주택수는 최근 10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났다. 부동산은 계층 척도로 작동한다.


장씨 부모는 1989년 성수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시집살이 4년 만에 대림동으로 분가했다. 장씨가 다섯 살 때쯤 서울을 떠나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서울·분당 등의 청약 신청엔 떨어지고 부천 아파트에 당첨됐다. 새집은 방 4개짜리 40평대였다. 1994년쯤 입주한 그 집에서 장씨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25년째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김씨에겐 ‘언젠가는 팔아야 할 집’이다.


“당시에 그 아파트 살 주제가 안됐어.” 김씨는 처음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 자신이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갚아나가야 할 원금 등 빚이 걱정됐다. 세를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남편은 “새집을 세주면 다 망가진다. 내가 열심히 벌 테니 들어가 잘 살자”고 김씨를 설득했다. 사실상 장씨네 ‘첫 집’인 만큼 의미가 컸다. 사는 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열심히 벌어도 담보대출만 늘어갔다. 현재 김씨가 매달 은행에 내야 할 이자는 100만원이다. 집에 ‘살기 위해’ 돈을 벌수록 가처분소득은 줄어들었다.


2000년대 후반 장씨네와 사정이 비슷한 가구들이 늘어났다. 집은 있지만 빚을 갚느라 여유는 없는 ‘하우스푸어’가 대거 등장했다. ‘2018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 금융부채를 보유한 가구 중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럽다”고 응답한 가구가 3곳 중 2곳(67.3%)이었다. 이후에도 주택담보대출에 따른 가계대출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장씨 집은 수도권을 벗어났다. 2008년부터 강원도에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릉에서 4.5평 원룸에 지낸다. 보증금 1000만원, 월세 40만원짜리다. 매달 가스비 1만원, 전기료 6000원씩을 따로 낸다. 후배와 같이 산다. 월급 3분의 1에 달하는 월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원룸 위치나 환경은 만족스럽다. “최대한 머리를 써서 좋은 곳으로 골랐어요. 밤에 시끄럽지 않고 주변에 상가도 잘 갖춰진 편이라서요.”


학업을 이어가긴 힘들다. 식비와 교통비가 고정으로 나간다. 월세도 벅차다. 버는 족족 4.5평짜리 집으로 돈이 빨려들어갔다. 졸업도, 미래도 유예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얻고 집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됐다. 한국 사회 청년들은 대부분 장씨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대한부동산학회에서 2018년 내놓은 ‘청년세대의 주택자산형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39세 청년 10명 중 9명은 대출이나 부모 손을 빌리지 않고는 내 집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강릉에 정착할 생각이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게 단점이지만,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장씨가 바라는 집은 훗날 강릉에서 가족이 같이 지낼 만한 크기의 아파트다. 20~30평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이사할 때 ‘아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한번 정착하면 쭉 살겠구나’처럼 만족스럽고 안정적인 집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죠. 부모님이 어쨌든 집을 갖고 계시니 그렇지 않은 친구들보단 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저부터 (집이라는 게) 넘볼 수 없는 부분 같아요.”

‘하면 된다’와 ‘해봤자 안된다’

‘하면 된다’는 부모님…나는 “로또 말고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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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은 아니었구나’ 김수진·장지창씨 모자가 23일 어린 시절 살던 서울 성수동 골목길을 거닐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장씨 가족은 세대별로 꿈의 크기가 다르다. 조부모는 늘 “언제든 기회는 찾아온다”고 했다. 장씨는 꿈이 없다. 세대를 거치면서 꿈이 작아지는 현상은 계층의 대물림이 꿈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씨 할아버지는 세탁기 사업 성공이라는 꿈을 이뤘다. 리어카에 온갖 이삿짐을 싣고 돌아다니던 할아버지는 서울 성수동에 연립주택을 구했다. 부모는 꿈을 절반 정도 이뤘다. 둘 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공부를 시작했지만 끝을 보진 못했다. 장씨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아버지와 세탁기 사업을 창업해 공부에 미련이 남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1년도 채 다니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일이 바쁘다’며 그만두라고 했다.


김씨는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장씨 외할머니가 가곡을 많이 가르쳐줬다. 재능도 많았다. 담임 선생님이 음악을 가르치러 집에 찾아올 정도였다. “아버지가 셋째 딸한테 돈을 왜 들이냐며 반대했지. 선생님이 계속 찾아오시니까 피아노를 네 달 배우게 해주시더라고. 그때 배웠던 악보가 아직도 머릿속에 다 있어.” 김씨는 결혼 전 회사에서 일하며 한 대학 성악과와 다른 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이어 다녔다. 대학을 마치지는 못했다.


장씨가 초등학생일 때 김씨는 서울에 있는 한 전문대 피아노학과를 다니며 다시 음악 공부를 했다. “이전에 들었던 교양수업 학점이 인정되면서 학사 졸업을 무사히 했어. 그게 정말 행복했지. 후배들은 ‘언니는 그때가 제일 예뻤다. 눈이 반짝반짝했다’고 말해.” 김씨는 이 경력을 바탕으로 피아노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남편 대신 돈을 벌면서 꿈을 이루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남편이 받쳐주면 나는 좀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대학에서 피아노 공부할 때도 남편은 실직 상태였는데 그때 대학 다니는 게 ‘사치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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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꿈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없어졌다.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부터다.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이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 때 알게 됐어요. 로또 말고는 미래가 없구나. 잘못 태어났구나.”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다. “자동차는 사람이 마음먹는 대로 움직여주거든요.” 자동차공학과를 선택했다. 장씨는 스토카(일반차를 경주용으로 개조한 스포츠카) 같은 전문용어를 설명하는 내내 눈을 반짝였다. 카레이서가 되고 싶었다. 자동차와 자신을 한 몸처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레이싱 스쿨이 2주 동안 열린다는 정보를 들었다. 강습비가 300만원이었다. 당시 부모님이 벌어오시던 돈이 60만~80만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포기했다. “그때는 ‘돈과 상관없이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해주면 안되나. 이게 나쁜 짓도 아닌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자동차회사도 포기했다. 학과 1등인 친구도 지방대 출신이란 이유로 대기업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현실을 봤다. 선후배 중 대기업 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없다. 대다수는 3·4차 하청업체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연봉 2000만~2100만원을 받고 산다. “동기 중에 집안이 좋아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머리도 비상해 아이디어를 잘 내고 말도 잘했어요. 공부도 잘해 교수님들이 다 예뻐하셨죠. 모두들 ‘학과 유망주’라고 했어요. 그 친구가 당시 현대·기아차그룹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주위 친구들이 그랬죠.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구나.’”


장씨는 졸업을 포기할지 고민한다. “졸업해도 원하는 곳으로 취직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아버려 ‘졸업을 언제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이 말을 듣던 어머니는 “대학 졸업장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선 대학을 꼭 졸업해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는다”고 아들을 설득했다.


모자에게 ‘열심히 노오력하면 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 같은 현실의 벽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붙잡고 노력하면 목표한 데까지는 못 가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겠지. 좌절감이 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면서 사는 게 사람이잖아.” 장씨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고 본다. “서울대에 강남권 학생들이 많이 간다잖아요. 태어난 지역이 어딘지, 부모 경제력이 어떤지에 따라 비정규직과 정규직, 연봉 같은 인생의 중요한 요소가 정해지는 것 같아요.”


장씨는 ‘노력하지 않아 그렇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고 화가 난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방대라는 이유로 대기업에 들어갈 수 없는 선후배, 동기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저 대기업은 들어갈 수 없구나’ ‘나는 인정받을 수 없구나’ ‘연봉 3500은 못 넘는구나’라는 게 현실로 와닿는 거죠.”


그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되 그 종류와 상관없이 사람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다.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성공한다는 걸 가르치는 사회구조가 잘못됐다고 본다. 장씨는 인터뷰 말미 어머니 김씨에게 자책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제가 졸업도 안 하고 살고 있는 게 절대 어머니,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에요. 어떤 가정에서 생긴 잘못이 아니죠.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가도록 만든 거예요. 어디 가서 ‘내 아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김희진·탁지영·허진무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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