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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 길, 잔정 많은 사람들…보물처럼 숨어 있네

(94)전북 순창 오일장

끄트머리의 가을은 겨울나기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사람들은 김장을 준비하고 나무는 겨울을 지내기 위해 형형색색 물든 단풍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분주해지는 시기에 고추장의 고장, 전라북도 순창에 갔다.

경향신문

담양과 순창을 연결하는 24번 지방국도. 가을색을 입은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정취를 더한다.

순창은 필자에게 소중한 곳이다. 갔던 곳마다 추억은 쌓이기 마련이지만, 여기만큼 특별한 곳은 없다. 첫 번째 이유는 고추장 할머니와의 만남, 시간으로는 2000년이다. 상품 구매를 위해 물어물어 순창의 문정희 할머니를 만나러 갔었다. 전주에서 임실을 지나 순창으로 가는 길을 지도만 보고 찾아갔다. 점심 전 도착한 필자에게 할머니는 아랫목에서 쌍화탕을 꺼내주셨다. “어여 마셔.” 그 한마디에 말 하나를 보탰다. “딸과 이야기해.” 이야기는 잘 풀렸고 첫 출장에서의 인연은 벌써 20년이 넘었다.


담양과 순창 잇는 24번 지방도로

조금 돌아도 도열한 나무 반기고

느리게 도착해 산 찐빵·구운 산자

‘조금 더 살 걸’ 귀경길 내내 후회


밤콩 5000원어치는 덤이 한 주먹

오늘은 ‘뻥 없다’ 알려주는 주민

터미널 옆 짜장면 “맛있네” 연발

비지 비빔밥은 깻잎에 싸야 제맛


기억하시라,

순창엔 고추장만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는 길이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담양이 유명하다. 전국 곳곳에 가로수 길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길은 담양과 순창 사이의 길이다. 담양과 순창을 연결하는 24번 지방국도, 담양군의 금성면과 순창군 금과면 경계지점은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이어져 있다. 직선의 메타세쿼이아 공원보다는 돌아가는 곡선의 길이 아련함이 있어 좋다. 여기가 그렇다. 순창 가는 길에 일부러 정읍에서 빠져나와 담양을 거쳐 이 길로 갔다. 4차선 도로로 5분 빨리 가는 것보다는 예쁜 풍경과 같이 가는 느린 길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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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일이 든 날 열리는 순창 오일장의 주인공은 갓 수확한 무, 배추, 생강 등 김장 재료였다.

전라북도 순창 오일장은 1, 6일장이다. 다른 지역 대부분은 매일 시장이 열리는 상설시장에 오일장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순창 상설시장은 건물만 있고 평소엔 열리지 않았다. 장이 서는 날이 돼야 비로소 일부 점포가 문을 열었다. 장이 서면 군것질거리가 있다. 족발, 호떡, 도넛, 찐빵 등이 유혹을 해도 그냥 지나쳤다. 어디나 있고 비슷한 맛이다. 


순창에서 봤으며 산 너머 임실 오일장에서도 볼 수 있기에 더욱 그랬다. 사진 찍고 다니다가 찐빵 가게에서 멈췄다. 사진을 가만히 찍다가 손님 없는 틈을 타 두 개를 샀다. 그러고는 다시 시장을 다녔다. 시장 한편에는 한과 공방이 있었다. 부부 둘이서 운영하는 곳이다. 산자 만들기는 찹쌀을 삭히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루 낸 찹쌀을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 삭히는 작업을 한다. 여기는 보통의 산자 만드는 법과는 달랐다. 찹쌀을 8시간 정도만 물에 담갔다가 가루 내서 반죽한다. 삭히는 작업을 생략한다. 보통은 기름에 튀겨내는데 여기는 굽는다. 튀긴 산자는 많이 먹었지만 구운 산자는 처음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찐빵과 산자를 먹었다. 가는 내내 더 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순창에 갔다면 구운 산자와 찐빵은 꼭 먹어야 한다. 쫀득쫀득한 찐빵의 피도 좋지만, 팥 알갱이가 살아 있는 팥소 또한 맛있었다. ‘겉바속촉’의 구운 산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달곰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크루아상 “꺼져” 할 정도로 커피와 궁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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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무채, 고추장을 얹은 비지 비빔밥. 고소한 비지에 칼칼한 맛이 어우러져 더욱 맛있다.

장터는 김장 재료가 주인공. 배추, 무를 비롯해 갓 수확한 생강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새우젓 또한 사람 몰리는 품목. “다른 건 다 올라도 이것만 내렸어요.” “작년보다 비싼데….” 할머니의 대꾸에 장사꾼은 하소연을 무한반복 중. 물가가 아무리 올랐어도 한 드럼에 1000만원이 우습던 새우젓이 몇백만원이니 자연스레 가격이 내려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우젓 사러 온 할머니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오는 밤콩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가을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강낭콩이다.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는 습성이 강낭콩의 특징, 그 덕분에 울타리콩이라고도 불린다. 강낭콩의 특징은 전분이 많아 단맛이 좋다는 것. 밤콩 또한 밤처럼 달곰하기에 이름이 그렇다. 작은 대야 하나 5000원. 몇 번 이야기했지만, 할머니들하고 흥정은 안 하는 게 좋다. 돈을 내고 가만히 있으면 한 주먹 더 담아준다. 다른 콩처럼 오래 불리지 말고 두어 시간만 불려서 밥에 넣어 먹거나 콩자반 하면 맛있다고 한다.


감과 크기가 작은 돌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감 파는 이가 “어디서 오셨어요?” 하면서 깎은 감 하나를 넌지시 건넨다. 곶감은 가끔 먹지만 감은 찾아 먹지 않기에 사양했다. 한사코 건네기에 받아서 맛을 봤다. 달았다. 필자는 감을 싫어하지만, 집사람은 감을 좋아한다. 그중에서 홍시를 좋아하기에 홍시를 샀다. 달곰한 감을 건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시장의 한쪽 초입, 뻥튀기 가게가 있다. 가만히 ‘뻥’ 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도 귀를 막고 가게로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아저씨 뻥 찍으려고 그러죠? 이번은 아니에요. 옥수수 볶은 거라 뻥 소리 안 나요.” 멋쩍었다. 순창 오일장은 작은 시장이지만 다른 곳과 다른 잔정이 있었다. 밤콩 파는 상인, 찐빵 파는 할머니, 나중에 현금을 찾아 방문했더니 팔 것이 떨어졌다면서 선뜻 맛보라고 한과를 건넸던 사장님과 ‘뻥 소리’ 없다고 알려주는 손님까지 모두가 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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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처럼 단맛을 내는 강낭콩의 또 다른 이름은 밤콩. 재료의 균형을 제대로 살린 간짜장.

순창은 일 년에 서너 차례 갔었다. 밥을 먹은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거의 없었다. 20년 다녔지만, 짜장면과 한정식만 두 번 먹었다. 한정식을 먹던 날은 협력업체가 다른 것 먹자고 했었다. 찬은 많아도 젓가락 갈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고 먹어보니 그 말이 바로 이해가 갔다. 


짜장면은 식당이 읍내였던 것과 짜장면 옆에 놓여 있던 입가심용 요구르트 병의 기억이 또렷하다. 시외버스 터미널 앞, 작은 식당. 여기는 기억 속 장소는 아니었을 듯싶었지만 들어가 간짜장을 주문했다. 잘게 자른 양파가 가득 담긴 짜장과 면이 나왔다. 간짜장에 고춧가루와 식초는 ‘국룰’. 식초는 단맛, 짠맛, 기름진 맛을 한데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짜장에 직접 넣기 싫다면 단무지에 듬뿍 뿌리는 것도 좋다. 사실, 짜장면이라는 게 맛있기도 힘들고 맛 없기도 힘든 음식이다. 어디를 가나 예상하는 그런 맛이다. 간짜장이라 해놓고는 만들어 놓은 짜장을 그릇에 따로 담아 주는 곳도 많다. 일반 짜장과 간짜장의 맛 구분이 불가능하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문 열기 전이라 고른 곳. 그 선택은 탁월했다. 짜장면이 맛있었다. 춘장과 설탕, 조미료에 양파와 돼지고기 조금을 내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다. 재료는 적어도 몇 가지 재료의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 짜장면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 있었다. 먹으면서 혼잣말로 “맛있네”를 연발했다. 나오면서도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하고 나왔다. 순창식당 (063)653-2593


두부 나오는 시간은 낮 12시. 11시에 갔다가 못 먹었다. 덕분에 맛있는 짜장면을 먹었다. 다른 곳에 갔다가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갔다. 입구에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메뉴는 4개. 순두부, 황태 순두부, 콩비지 비빔밥, 모두부. 순두부와 비지 비빔밥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안 먹어본 비지 비빔밥과 모두부를 먹기로 결정했다. 


두부를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이 비지. 두부는 콩에 있는 수용성 단백질만을 이용해 만든다. 콩에 있는 지방이나 지용성 단백질은 비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콩의 영양 성분을 모두 이용한 것이 전두부나 전두유다. 두부와 두유를 만들기 위해 걸러내고 남은 것이 비지다. 이 식당은 비지를 8시간 정도 발효한다고 한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에 나온 비지를 보고 처음에는 순두부인 듯했다. 주문할 때 순두부를 주문하려다가 비지로 바꿨기에 그냥 순두부가 나온 줄 알았다. 비지 비빔밥 먹는 방법은 이렇다. 같이 나온 콩나물과 무채와 고추장을 넣고 비빈다. 밥을 넣어서 비벼도 되고 아니면 먹을 때마다 넣어도 된다. 비빈 비지는 그냥 먹는 것보다는 깻잎에 싸서 먹어야 제맛이다. 


처음에 비빌 때 나온 고추장을 반만 넣었다. 왔다 갔다 하던 주인장이 다 넣어야 제맛이라 하기에 그렇게 했다. 고소한 맛만 있던 비지에 칼칼함이 더해져 맛이 한층 좋아졌다. 갓 만든 두부는 수분을 한껏 품고 있어 부드럽다. 일본 어느 지방에서 먹은 비단 두부만큼 부드럽지는 않아도 먹어본 두부 중에서는 가장 부드러웠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맛있기 때문이다. 창림동두부마을 (063)652-8773


가을이 사그라든다. 잠시 올라간 강천산 단풍의 고운 붉은빛이 그리했다. 가을은 가더라도 맛은 깊어진다. 맛있는 겨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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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매주 식재료를 찾아 길을 떠난다. 먹거리에 진심인 만렙의 27년차 그린랩스 팜모닝 소속 식품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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