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석 팔뚝’이 자랑스러운, 진짜 싸우는 여자들 ‘격투기 선수’
[싸우는 여자들] 프로 종합격투기 선수 김영지, 허주경
김영지(31, 사진 오른쪽), 허주경(19) 선수가 격투기 연습을 하고 있다. 유선희 기자 |
“싸우고 싶었다”는 여자들이 있다. 주먹을 휘두르고 킥을 날리며 힘과 기술을 겨루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이다. 싸우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김영지(31), 허주경(19) 선수를 지난달 3일 강원 원주시 단구동 제이킥짐(이하 체육관)에서 만났다.
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은 지하에 있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옆 벽면을 따라 선수들의 경기사진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김 선수의 프로데뷔(2017년) 사진이었다. 일본의 요시코 선수와 벌인 경기로, 김 선수가 상대 왼쪽 턱에 정확히 꽂은 주먹은 다시 봐도 명장면이었다.
김 선수는 올해로 어느덧 프로데뷔 6년차가 됐다. 현역 선수생활과 함께 이 체육관에서 사범으로서 지도자 역할도 맡는다. 그가 사범으로 있었을 때 만난 허 선수는 다음달 초 일본에서 프로데뷔를 앞둔 새내기다.
“싸우고 싶은” 마음 끝에 격투기를 만나다
“격투기를 배우고 2주만에 아마추어 시합에 나가게 됐거든요. 그냥 막 싸웠을 거잖아요. 끝나고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계속 싸우고 싶었어요.”
김 선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긴장감이 맴도는 경기를 이야기 하면서도 지나치게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고 묵묵히 경기에 임해 온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체육관 입구 벽면에 걸려 있는 김영지 선수의 프로데뷔(2017년) 사진으로, 일본의 요시코 선수와 경기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유선희 기자 |
김 선수가 처음부터 격투기를 배운 건 아니다. 시작은 유도였다. “중학교 때 덩치가 큰 유도부 언니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 따라 배웠다. 시합에도 나섰지만 유도는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선수들이 많아 직업으로 고려하지는 않았다. 경호쪽 일을 하려고 했는데, 대학 근처에 있던 격투기 체육관을 찾았다가 푹 빠졌고 아예 선수로 뛰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상대방과 우열을 겨루는 ‘싸움 본능’이 격투기 장으로 이끈 운명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운동 시작 2주만에 아마추어 시합에 나갈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프로데뷔전에선 일본의 요시코를 꺾었다. 요시코는 교묘한 반칙으로 악명이 높아 김 선수의 승리는 더욱 주목 받았다.
김 선수의 무기는 ‘로우킥’이다. 다리를 이용해 상대방의 하체를 공격하는 기술이다. 그는 “(상대방 다리) 안쪽 로우킥에 대한 타격이 좋다. 안다리 로우킥으로 승점도 많이 냈다”고 했다. 요시코 선수와의 경기에서도 로우킥 기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도기술을 가져오는 것도 무기다. 그는 “목감아메치기와 엎어치기도 내세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했다.
허주경 선수가 자신의 싸움 무기인 ‘미들킥’을 선보이고 있다. 유선희 기자 |
김 선수의 프로데뷔전은 선수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손에 꼽는 경기 중 하나다. 허 선수는 “이건 미쳤어요”라고 거들었다. 허 선수는 원래 군인을 꿈꿨다. 중학교 때 체력을 기르려고 어린시절 배웠던 격투기 체육관을 찾았는데, “격투기를 안 하면 안될 것 같아” 선수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프로데뷔를 앞둔 허 선수는 왼발 ‘미들킥’이 싸움의 주무기다. 상대방의 옆구리를 정강이로 가격하는 기술로, 정확도와 순발력이 뛰어나다. 이번엔 옆에 있던 김 선수가 “허 선수의 미들킥은 남자 선수들도 맞으면 쓰러질 거예요”라고 치켜세웠다.
500g의 무게가 보여주는 여성 선수들의 ‘고충’
격투기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달리 현실은 여성 선수들에게 녹록지 않다. 당장 체급이 맞는 상대를 찾는 게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다. 여성 체급은 보통 아톰급(48kg), 스트로급(52kg), 플라이급(57kg), 밴텀급(61.5kg), 페더급(65.5kg), 무제한급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여성 선수들은 경기에 뛰고 싶어도 선수층이 엷어 체급이 맞는 상대 선수를 찾기 어렵다. 시합 출전 기회의 차이는 선수들의 기량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경기에 뛰고 싶은 선수들로선 상대 체급에 맞추려 체중을 감량하는 일이 많다. 김 선수는 “경기에 출전할 때 거의 대부분 10~11kg을 뺐다”고 말했다.
고된 연습과 훈련으로 닳아버린 김 선수의 격투기 글러브. 김 선수 제공 |
500g.
김 선수가 그간 총 8번의 프로경기에 출전하면서 체중감량으로 가장 고통 받은 숫자다. 러시아에서 열린 경기(2019년)에서 출전을 앞두고 500g이 줄지 않아 애를 먹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땀으로 다 빼지 못한 수분을 쥐어 짜내려 욕조에 소금물을 받아 들어가면서까지 300g을 줄였지만 모자랐다. 몸무게를 잴 때 팬티 허리밴딩 고무줄을 다 잘랐다. 다행히 출전기회를 얻었는데, 제 컨디션일리 없었다. 경기는 졌다.
김 선수는 “여성 선수들은 아마추어조차도 선수가 없어 구하다 구하다 시합을 못 뛸 때가 많다. 뛸 수 있는 경기는 무리하더라도 출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시합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건 체급 때문만은 아니다. 경력도 어느정도 비슷해야 매치가 성사된다. 아마추어여도 경력(출전횟수, 경기실적 등)에서 너무 차이가 나면 일방적인 경기가 될 수 있고, 자칫 부상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허 선수는 지난 3년 동안 아마추어 경기에 4번 출전했다. 아마추어 경기는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열린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1년에 최대 6번까지 시합을 뛸 수 있기 때문에 3년 동안 이론상 18번 출전할 수 있는데 겨우 4번에 그쳤다. 그는 “체중을 감량해서라도 경기에 나서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선수가 없다고 해 불발된 적이 있다”고 했다. 허 선수가 다음달 일본에서 프로데뷔를 하는 이유도 국내에서 겨룰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근육질, 이것도 여성의 몸이다”
허 선수가 운동을 하는 모습. 허 선수 제공 |
경기에 한 번 나서는 일도 진이 빠지는데, 더 힘든 건 주변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다.
“격투기를 한다고 하면 두 가지 반응이 따라 오더라고요. ‘(여자가) 뭐 제대로 하냐? 해봤자 제대로 안 할 거다’ ‘여자애가 왜 그런거를 하냐’ 이런 말들. 다들 충고부터 하려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격투기는 남자들이 많이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성’과도 대비된다는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허 선수는 또래보다 일찍 진로를 정했는데도 선생님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그럼 저는 반박하듯 ‘도움주실 거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하냐, 잘 되고 찾아뵙겠다’고 답했다”며 “속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이를 갈았다”고 말했다. 가족들도 반대했던 터라 속앓이를 하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런 편견은 김 선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자’를 운운하면서 적당히 취미로만 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남자였어도 같은 말을 했을까, 싶었다”고 했다. 6살 터울인 오빠의 반대가 심해 프로데뷔 전까지 운동하는 걸 숨겼다. 격투기를 본격 시작하고 1년 동안 “스트레스로 머리에 500원 동전 크기 만한 ‘땜방’이 생길 정도”로 힘들었다. 데뷔 초기 김 선수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짧은 머리스타일에 근육질의 몸매를 보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가장 황당한건 ‘사람 때려봤냐’는 말이었다”고 했다.
김 선수가 자신의 인스타에 올린 사진으로, 근육질 팔뚝을 뽐내고 있다. 김 선수 제공 |
여성 격투기 선수 중에도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많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아직 낮다. 김 선수는 “외모적인 부분만 부각돼 ‘스타 플레이어’로 소비되는 부분은 안타까운 지점”이라며 “격투기 실력, 그 자체로 대중에 많이 노출되고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나마 최근 여성들의 강인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피지컬100’ ‘사이렌’과 같은 예능프로그램이 위안이 된다. 적어도 “여자애가 무슨...”과 같은 편견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김 선수는 “근육질도 여성의 몸이다”고 했다.
여전히 마르고 굴곡 있는 몸매가 ‘여성성의 몸’으로 강조된다. 10대 사이에서 ‘뼈말라(날씬함을 넘어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한 몸) 다이어트’가 유행한다. 김 선수는 “무조건 마른 것만이 몸을 가꾸는게 아니다. 근육질도 똑같다”며 “‘커지는 몸, 근육질의 몸’, 이것도 제 몸이다”라며 웃었다.
실제 그는 자신의 팔뚝 근육을 강조한 사진을 인스타 계정 게시글로 올리기도 했다. ‘마동석 팔뚝’을 만들겠다고 훈련한 사진도 있다. 선수들은 “근육질, 건강한 체격은 성별을 떠나 ‘능력의 일부’”라고 했다.
싸우는 게 “즐거운” 선수들은 꿈을 꾼다
운동을 하는 격투기 여성 선수들 . 유선희 기자 |
동료들은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다. 김 선수는 “여성 격투기 선수들에게도 충분히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허 선수는 “선배들 덕분에 점점 편견도 깨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새내기 허 선수는 “아시아 단체 ‘원챔피언십(ONE Championship)’ 경기에 나서는 것이 꿈이다” 라면서 “여자 경기도 정말 재미있는데 한 두 경기만 보고 지루하다고 단정짓고 안 보는 분들이 많다. 영향력 있는 선수가 돼 여성 격투기를 많이 알리고 싶다”고 했다.
김 선수는 최근 전적이 썩 좋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기는 싸움 보다 “뛰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싸울 때가 “즐거워”서다.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아요. 남자고 여자고의 문제가 아니예요. 말릴 수 있는게 아니예요.” 인터뷰를 마칠 때쯤 체육관 관장이 선수들을 보며 말했다.
그랬다. 하고 싶은 일은, 그것도 즐거운 일은 결국은 계속 하게 되는 거였다. 시합 하나 잡기 어려워도,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편견을 마주해도, 경기 실적이 좋지 못해도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이고, 그들이야말로 꿈을 꿀 자격이 있다. ‘꿈’꾸는 선수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유선희 기자 yu@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