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결혼도 30년 뒤엔 아무것도 아닐거야”
화제의 책
2019년 11월 서울 한 호텔 예식장에서는 신부가 두 명인 ‘가장 보통의 결혼식’이 열렸다.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는 이 결혼식의 주인공인 ‘대한민국 유부녀 레즈비언’ 김규진씨가 쓴 글을 엮은 에세이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김규진 지음|위즈덤하우스|216쪽|1만3800원
2019년 11월10일 서울 한 호텔 예식장에서 일명 ‘공장형’ 결혼식이라 일컫는, 남들 하는 건 다 한 평범한 결혼식이 열렸다.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는 기본에 축가와 반지 교환식, 혼인서약서 낭독이 이어졌고 170여명 하객의 박수 속에 부부가 키스를 하며 식은 끝났다. 약 6개월 뒤인 지난 5월7일. 이 부부의 혼인신고서는 구청에서 ‘불수리’ 처리됐다. 서류 접수 4시간 만에 받아든 최종 불수리 통지서에서는 이렇게 쓰였다. “현행법상 수리할 수 없는 동성간의 혼인임.”
남들 다 하는 결혼 한 번 했을 뿐인데, 공중파 <9시 뉴스>에 나오고 혼인신고는 거절 당했다. 말마따나 “레즈비언의 삶은 위기와 고뇌의 연속”이지만 사연의 주인공 김규진씨의 삶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다. 그가 쓴 이 책만 봐도 그렇다. 동성 결혼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소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성취들을 일궈온 승리의 역사가 가득하다. 그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자그마한 용기”를 냈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씩 변했다. 한국에선 동성혼이 안 된다고? 그럼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 하면 되지. 신혼여행은? 자격 조건인 청첩장을 인사팀에 제출하자. 항공권 마일리지 가족합산은 안 될까? 선례가 있으니 해보자.
청소년기, 대학 시절 동아리 이야기와 함께 커밍아웃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까지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살며 느끼고 체득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가입을 결심한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알고 지내던 다른 과 선배를 만나 놀라기도 하고, 동아리 정식 회원이 된 뒤엔 고려대 레즈비언과 연세대 레즈비언이 만나 팔씨름 대결을 펼치는 ‘성소수자 동아리 연합 여자 운동회’의 존재도 알게 됐다. 동아리에선 누구도 어떤 남자가 이상형인지,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정체성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으로 동질 집단에 속한 경험을 했다.
배우자와의 첫 만남부터 프로포즈, 상견례 이야기, 미국에서의 혼인신고 등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동성 결혼 뒷이야기도 털어놓는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한 에피소드는 조마조마하지만 끝내 유쾌하다. 거짓말을 귀찮아하는 성향 탓에 지인들에게 성 정체성을 애써 숨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으레 그렇듯 가장 가까우면서 어려운 것이 가족 아닌가. ‘고백하기 좋은 날’로 설날, 즉 제삿날을 선택한 저자는 “조상님들을 추모하는 대의를 앞두고 있는 데다 큰집에 다 같이 모여 있는 환경상 나를 내쫓기는 어려워 보였다”며 이유를 밝힌다.
누군가는 저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언니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건강보혐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도록, 그냥 다른 부부들처럼 살 수 있도록, 그런 삶의 편의를 위해서.” 위즈덤하우스 제공 |
커밍아웃 이후 의외로 힘이 된 건 아버지의 지지였다. 아버지는 훗날 결혼을 앞둔 딸에게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라는 깜짝 고백을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30년 뒤엔 동성결혼도 아무것도 아닐 거야.”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하는 20대 비율이 62%에 육박한다는 조사 결과(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356호)로 따져봐도 아버지의 말은 일리가 있다. 저자는 생각한다. “30년쯤 지나면 이 20대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룰 것이다.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다.”
누군가는 저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언니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건강보혐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도록, 그냥 다른 부부들처럼 살 수 있도록, 그런 삶의 편의를 위해서.” 지난 23일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란 슬로건과 함께 ‘랜선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이 전무후무한 퍼레이드에 참여한 인원만 1만2000여명이었다. 여전히 혼인신고는 거절 당하고, 수술 시 동의도 불가능한 세상이지만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열리지 않는 ‘병뚜껑’ 같은 이 세상도 ‘뽁’하고 열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