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재미없어 억지로 배워…성공해 고국 아이들 도우려 독하게 친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캄보디아에서 온 당구 여제, 스롱 피아비
스롱 피아비가 지난 13일 LPBA 하나카드 챔피언십 대회장인 서울 메이필드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피아비는 “당구는 나의 한국 인생과 같고, 나는 남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
1990년 캄보디아 캄퐁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때인 2010년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남편 김만식씨를 따라 동네 당구장에 가본 뒤 당구를 처음 배웠는데, 출중한 실력을 보이면서 2017년 선수로 데뷔했다. 주종목은 스리쿠션. 2018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2018년, 201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선 3위에 올랐다. 지난해 프로 전향 후 3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달 말 여자프로당구협회(LPBA) 2022~2023시즌 개막전인 경주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했다. 캄보디아에서 인기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고, 국내에선 ‘캄보디아 특급’ ‘캄보디아 김연아’로 불린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반드시 해야 하고 잘해야 했기에
하루 20시간씩 혹독하게 연습
난 천재가 아니고 노력이 더 많아
캄보디아 출신 프로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32·블루원리조트). 첫인상부터 씩씩했다. 청주 집에서 서울까지, 빗길에 3시간 넘게 운전하고 왔는데도 밝은 에너지가 넘쳤다. LPBA(여자프로당구) 시즌 2차 대회인 하나카드 챔피언십 개막 전날인 지난 13일 대회장인 서울 메이필드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대회장에 오가고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연습하는 일도 혼자 알아서 척척 한다”고 말했다.
그의 곁에는 지난 4월 말 한국을 방문한 부모가 있었다. 어머니 석 젠털(50)·아버지 스롱 찬(51). 한국에서 처음 딸과 함께 지내며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건강검진도 받았다. 딸이 출전한 대회에 응원하러 간 것은 물론이다. 24일 귀국을 앞둔 부모는 언제 또 볼지 모를 딸의 경기를 지켜보려 이날도 동행했다. 말이 전혀 안 통하고 주위가 낯설기만 한 부모를 살갑게 이끄는 피아비는 든든한 딸의 모습이었다.
PBA 제공 |
얼마 전 피아비는 한국에 온 지 10여년 만에 가장 큰 소원을 이뤘다. 지난달 26일 경주에서 열린 LPBA 시즌 개막전에서 우승한 것이다. 그냥 우승이 아니라, 어머니·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처음 따낸 우승이라 감개무량했다. 결승전에서 이긴 뒤 피아비는 부모 앞에 무릎 꿇고 합장하며 감사를 전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뻐했다. 한국으로 떠나보낸 딸이 어려움을 딛고 당차게 살아가고 있음을 부모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북받친 눈물이었다.
피아비는 경기장에서 집중할 땐 매섭고 강렬한 눈빛을 보이지만 일상에선 수더분하고 서글서글했다. 한국말도 술술 잘하고 문자 메시지도 불편 없이 나눈다. 갓 스무 살에 이국 땅에 홀로 와서 생소한 당구에 뛰어들어 각고의 노력 끝에 이름을 널리 알린 피아비의 당구, 한국살이와 그가 꿈꾸는 미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22 챔피언십 개막전에서 우승한 프로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32)가 13일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
나는 특히 손재주가 좋은 편
당구 이론만 보면 손에 감이 잡혀
부드러움과 파워 함께 겸비한
완벽한 달인의 당구가 목표
- 지난달 경주 대회 우승이 특별했다.
“진짜 내가 우승한 건가 실감이 안 났다. 지금도 꿈이 아직 안 깼나, 지금 막 깼나 싶은 느낌이다. 10년 동안, 엄마·아빠가 보는 앞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했던 꿈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 꼭 우승하겠다고 마음먹고 죽기살기로 경기를 했나.
“좋은 일 하고, 좋은 생각 하고, 좋은 것만 만들고 싶었다. 좋은 일이 생기도록 마음도 깨끗하게 가다듬었다.”
- 이번 우승의 원동력은.
“큰 행운이 내게 왔는데, 부모님이 도와준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엄청 크다고 느끼는데 거기에 행운까지 합쳐져 더 큰 힘을 얻었다.”
- 결승전에서 세트스코어 3-1로 앞서다가 3-3으로 추격당한 뒤 마지막 세트를 맞았는데.
“내 공이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이 복잡해졌다. 긴장해서 많이 떨렸다. 그때 마음속으로 ‘내가 못하면 안 돼, 떨리면 안 돼,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다시 집중해서 마지막 세트를 이겼다.”
- 부모님은 어떤 말로 응원했나.
“관중석에서 나보다 더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도 차분하게 응원을 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평소처럼 ‘너는 잘하는 선수야’라며 칭찬하고 긴장을 풀어주시는 것 같았다. 우승 후에도 ‘잘해내리라 믿었다’는 말로 축하의 마음을 전하셨다.”
지난 13일 경기장을 함께 찾은 피아비의 부모. 이준헌 기자 |
- 피아비에게 부모님은.
“큰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부처님 같은 존재다.”
피아비는 캄보디아에서 몸이 아파 고생하는 부모에게 한국의 건강검진을 선물 삼아 해드렸다. 심장이 안 좋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부정맥 증세가 있었고, 어지럼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이석증 소견을 받았다. 다행히 부모 모두 급한 수술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 피아비가 한시름 놓은 것도 마음 편하게 경기에 나선 요인이었다.
인생역전. 사람들이 피아비를 가리키며 흔히 하는 말이다. 피아비는 “그런 말 많이 들었다”며 허허 웃었다. 3만원짜리 당구 큐대가 인생을 바꾸기는 했다. 한국 온 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피아비보다 스물여덟 살 많은 남편 김만식씨가 한국 생활에 적적해하는 아내의 놀잇거리를 찾아줄 겸 동네 당구장에 함께 갔고, 아내가 관심을 보이자 큐대를 사주며 ‘당구를 배워 보라’고 권했다. 피아비는 이내 실력을 늘려 동네 당구장의 고수가 됐고 크고 작은 동호인 대회에서 우승도 하며 정식 선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피아비가 타고난 당구 재능을 가지고 있다가 우연히 제 물을 만난 것으로 대개 아는데, 피아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반드시 해야 하고, 잘해야 했기에 당구에 몰두했다”면서 “당구가 재미있어 시작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피아비는 하루에 20시간씩 혹독하게 당구 연습을 했다고 한다.
- 짧은 시간에 국내, 세계 최고 선수 대열에 올라섰다. 당구 천재 아닌가.
“천재 아니다. 노력이 더 많다. 노력을 하다 보니 소질이 나오는 것 같다. 똑같이 공을 쳤는데 다른 사람은 모두 안 되고 나만 되면서 내가 되는 이유를 빨리 알아차리는 게 천재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몸과 머리가 기억할 때까지 연습하는 게 내 방식이다.”
- 당구 처음 배울 때 재미있지 않았나.
“재미없었다. 힘들었다. 억지로 배웠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다.”
- 억지로 배운 이유는.
“내가 돈을 잘 벌어 캄보디아 가족들, 남들 돕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당구를 시작했다. 당구 잘 쳐서 우승하고 유명해지고 후원도 받으면, 캄보디아라는 나라를 알리고 외국도 다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수가 되고, 당구가 직업이 되고 나서는 당구의 어려움을 이해하면서 당구를 좋아하게 됐고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 억지로 배웠는데도 실력을 쌓은 비결은.
“내가 스스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특히 손재주가 좋은 편이다. 칼질도, 요리도 잘한다. 당구도 이론만 보고 나면 손에 감이 잡히더라. 당구 큐대를 내 마음으로 쓰는 칼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2022 챔피언십 개막전에서 우승한 프로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32)가 13일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
- 요즘도 연습을 열심히 하나.
“새로운 기술과 경기 방식이 많이 나와서 연습을 끝없이 해야 한다. 연습을 소홀히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1점에 그치지 않고 3점, 4점, 5점을 한번에 내는 걸 익혀야 한다. 지금은 부드럽게 치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 어떤 당구를 ‘피아비의 당구’로 보여주고 싶나.
“어려운 걸 해내고, 놀랄 정도로 멋진 당구다. 부드러움과 파워를 함께 보여주고도 싶다. 완벽하게 잘 친다는 소리를 듣는 ‘달인’의 당구가 목표이다.”
피아비는 캄보디아의 어린 시절을 감자로 떠올린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차로 6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 감자 농가의 맏딸 피아비는 7학년(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해야 했다. 온종일 길쭉한 감자를 캐고 나르고 잘라서 아버지가 돌리는 분쇄기계에 넣었다. 어느 날에는 일당 1만원도 안 되는 돈을 벌러 이웃 농장에 갔다. 어려운 환자를 돕는 의사가 되고 싶던 소녀는 그저 집안 형편상 학교에 못 가고 집에서 일해야 하나 싶었다고 한다. 조금 커서는 손재주를 살려 예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동네 친구들이 프놈펜에 다녀와서 새옷 입고 다니는 걸 잠깐 부러워하는 걸로 만족했다. 자신은 집에서 일을 하는 대신 동생들은 학교에 오래 다니기를 바랐고, 그 뜻은 이뤘다. 그래서인지 피아비는 캄보디아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데 열성이다. 때때로 마스크, 구충제, 학용품을 사서 보냈고 재작년에는 캄보디아에 직접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봉사활동을 펼쳤다. 특히 교육에 관심이 많아 스포츠 전문학교 건립을 목표로 고향에 1만㎡(3000평) 규모의 학교 부지를 사두기도 했다.
피아비 제공 |
남을 돕는 것이 나의 최대 행복
고국에 스포츠 전문학교 건립 추진
달인보다 ‘천사 피아비’로 남을 터
내 꿈 이제 시작…더 커지고 늘어
- 아이들을 많이 돕고 있다.
“나처럼 어린 시절 배울 기회를 잃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배우면서 ‘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적은 돈이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아이들에게 많은 걸 챙겨줄 수 있다.”
- 학교 건립은 얼마나 진행됐나.
“아직 멀었다. 준비하고 살펴볼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남편이 4월부터 캄보디아에 체류하며 이런저런 준비작업을 자청해서 하고 있다. 참 고맙다. 언젠가는 캄보디아 아이들이 마음 놓고 스포츠를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 돈을 많이 벌었나.
“캄보디아에서 흔한 말로 ‘내가 사장이고 돈은 직원인데 요즘에는 돈이 사장이고 내가 직원이다”라는 게 있다. 돈만 좇아가는 세상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한다. 상금은 많지 않은데 아끼고 모아서 좋은 일을 하려고 한다. 캄보디아 친척 중에는 내가 돈 많이 버는 줄 알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귀담아 듣지 않는다. 가족들은 나를 위해 돈을 쓰라고 하지만, 캄보디아 아이들 몇 끼니라는 생각이 들어 옷 하나도 잘 안 산다.”
- 언제부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나.
“어려서부터 불쌍해 보이는 동네 아이들에게 옷도 주고 밥도 줬다. 남을 돕는 것이 내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스롱 피아비는 ‘스트롱’ 피아비다. 결혼 이주여성의 어려움을 제 힘으로 떨치고 앞길을 개척했다. 어찌 불편과 고난이 없었을까. 피아비는 외국인, 남편과의 나이 차 등을 곱잖게 보는 시선과 성공하면 금세 도망갈 것이라는 쑥덕거림을 “악플 같은 것”이라며 ‘스트롱’하게 정리했다. “관심 있어서 얘기하는 거라 생각해요. 그런 얘기 들으면 더 힘낼 수 있어요. 저는 약한 마음 없어요.” 피아비는 한국에 오고나서 착하고 말 없이 순했던 캄보디아 시절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밝고, 명랑하고, 씩씩하게. 예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기서 버티기 어렵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쑥스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자”고 말한다.
피아비는 팬들이 붙여준 별명 중에서 ‘천사 피아비’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당구 ‘달인’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한 당구 선수로 기억에 남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피아비는 “내 꿈은 이제 시작”이라며 “꿈이 더 커지고 많아졌다”고 말했다. “좋은 일을 하다보면 여기 무슨 일 생겼는데 저기 또 할 일이 보이고 하는 것, 그런 게 꿈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더 커지는 피아비의 꿈이 모두 이뤄지면 좋겠다.
차준철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