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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월, 그날을 걷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걸어서 돌아보는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29곳


신군부 만행 재현한 자유공원

법정·영창 복원…자료도 전시

조직적 항쟁한 ‘들불야학’ 터

입구 벽체만 남긴 채 모두 철거

녹두서점 등도 표지석만 남아


매각 진행 중인 적십자병원엔

‘사적지로 보존하라’ 현수막

여전한 연대의 장소 전남도청

전일빌딩, 아카이브로 재탄생

5·18 사적지만 가보기엔 아까운 광주

경향신문

그래픽 | 성덕환 기자 thekhan@kyunghyang.com

“화순 사시던 아버지가 새벽에 집을 나서 산으로 걸어오다가 계엄군을 만나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셨어요.” 광주광역시 동구 의재로 홍림교 사거리의 ‘배고픈다리’(사적 13호)에서 동구 소태동 175번지 ‘주남마을 인근 시민 학살지’(사적 14호)로 갈 때였다. 택시기사 김모씨가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화도 없을 때였죠. 광주에서 데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말리러 오셨어요. 그때 주남마을에서 미니버스에 탄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잘 기억해요.”


그해 5월23일 11공수여단 62대대 5중대가 시민군 본부에 등록된 미니버스를 사격했다. 버스에 탑승한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계엄군은 총격에 살아남은 남성 2명을 사살한 뒤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했다. 2명 중 1명은 학생이었다. 공수부대 장교가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는 기록(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 남아 있다. 계엄군은 다음날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을 사격했다. 그중 방광범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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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공원 내 ‘5·18 현황 조각’ 작품 중 하나로 항거정신을 표현했다.

지난 8일 오전 전남대병원에서 조선대로 가려고 탄 택시에서 김씨를 만났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더 많이 아는 이들, 지금도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면서 이름과 나이를 알리는 걸 꺼렸다.


전남대(사적 1호)에서 조선대(사적 12호)까지, 주남마을에서 505보안부대(사적 26호)까지 동행했다.


주남마을에서 다시 택시에 올랐을 때 김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조선대 부근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시내에서 데모를 하다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워메 군인들이 막 쫓아오는데…. 우리가 빠르죠. 그쪽은 군장하고 우리는 맨몸이니까. (어느 집) 마루 밑 구석으로 숨었어요. 곤봉으로 (마루 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요. (곤봉 끝이) 내 몸에 닿았는데…. 붙잡혔으면 나도 죽었을 거예요.” 생사의 갈림길로 기억했다. 계엄군의 만행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때려부려. 사람 골이 터져버린다니까. 독헌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눈이 빠지고 하는데….” 김씨는 총탄에 맞아 머리 한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시신을 본 기억을 꺼내다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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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상무대 옛터(재현지 5·18자유공원) 상무대 영창과 법정은 5·18자유공원에 재현됐다. 계엄군은 저항하던 시민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고문 등 온갖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둘렀다.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는 29곳이다. 사적지는 ‘오월인권길’ ‘오월민중길’의 핵심 코스다. 이 길의 핵심 열쇳말은 죽음과 희생이다. 신군부 세력의 능동적인 학살이자 죽임이었다. 이들의 야만과 만행을 재현한 곳이 5·18자유공원이다. 광주 시민들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군사재판을 받던 곳이다. 법정과 영창이 복원·재현됐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있던 헌병대 본부 사무실에서는 5·18 당시 사진과 영상 자료가 전시된다.


7일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곳부터 찾아 헌병대 본부 사무실로 들어갔다. “5·18 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24세)이다.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서 팔던 그는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전신을 구타당해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간 김경철은 다시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19일 새벽 3시에 사망판정을 받았다.” 이 공간에는 진압봉으로 구타당해 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기록이 가득했다. 계엄군의 폭력을 밀랍인형으로도 재현했다.


5·18자유관에서 5·18기념문화관으로 이동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상설 전시 빼고는 모두 중단됐다. 두 곳은 ‘오월길 지도’와 ‘오월 그날의 현장’ 같은 지도와 책자를 무료로 배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www.518archives.go.kr)과 오월길(518road.518.org) 홈페이지에서 지도와 책자를 내려받을 수 있다. 광주의 여러 전시공간은 40주년을 맞아 11·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광주의 여러 기념관, 전시공간은 시민의 기억, 추모, 극복의 과정을 담았다. 이들 공간에서 먼저 자료와 전시물을 읽고 본 뒤 답사에 나서면 사적 의미를 더 되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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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들불야학 옛터 들불야학의 강학(교사)과 학강(학생)은 ‘항쟁파’로 끝까지 싸웠다. 야학 옆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발간했다.

5·18기념공원을 둘러본 뒤 답사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서구 죽봉대로의 들불야학 옛터(사적 27호)다.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윤상원 등은 가장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에 나섰다. 이들은 5·18 때 ‘들불야학팀’으로 불렸다. 이들은 5월19일자 호소문에 “우리가 살길은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의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쳐부수는 길”이라고 썼다. 이들에겐 정의가 처참히 무너진 곳에서 싸우는 일 말곤 없는 듯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은 광주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에 항거하다 사망했다.


들불야학 터는 2004년 노후화로 ‘대건안드레아 교육관’ 입구 벽체만 남기고 철거됐다. 이곳 일대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을 두고 주민들 간 다툼이 벌어졌다. 재개발되면 성당도 위치를 옮긴다. 성당 관계자는 “들불야학 입구 벽체와 시민아파트 한 동은 보존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왜곡과 거짓 보도로 시민들의 분노의 대상이 된 광주MBC(사적 7호), 들불야학팀이 투사회보 등을 제작한 항쟁 거점 중 하나인 광주YWCA(사적 6호), 실상을 광주 안팎에 알린 구심인 녹두서점(사적 8호), 폭력과 고문을 자행한 상무대(사적 17호) 등은 ‘옛터’로만 남았다. ‘오월 그날의 현장’ 등을 읽으며 이 옛터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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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구 광주적십자 병원 연대는 병원에서 빛을 발했다. 적십자병원에서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라 헐릴지도 모른다.

항쟁 초반 계엄군 총칼에 희생된 이들이 실려간 ‘구 광주적십자병원’(사적 11호)도 사라질지 모른다. 8일 택시기사 김씨와 들른 병원은 폐쇄됐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다. 병원 1층 창가로 ‘5·18 사적지로 보존하라’ ‘시민의 품으로’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지난 4월 이곳에서 “광주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라며 매각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첫 사망자 김경철이 이곳으로 실려왔다.


5월 광주의 핵심 키워드엔 ‘공동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시민들은 부상자들을 간호했고, 의사·간호사의 먹거리를 챙겼다. 시신 처리도 도왔다. 줄을 서가며 헌혈했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에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계엄군이 자주 드나들던 곳인데도 개의치 않고 병원을 찾았다.


광주기독병원(사적 10호)에도 많은 부상자들이 이송됐다. 이곳에서도 시민들이 의료진, 부상자와 함께했다. 많은 시민이 헌혈에 동참했다. 춘태여고 3학년 박금희도 그중 한 명이다. 헌혈을 하고 귀가하다 총탄에 맞아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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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남도청 ‘항쟁파’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지키다 사망한 전남도청의 민주광장에선 전두환의 모습을 풍자한 ‘518개 국제 표정전’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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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과 재난, 그 죽음의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이 광주에 꼭 들어맞는 개념은 아니다. 헌혈과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연대와 공동체 정신, 죽음을 불사한 항쟁, 계엄군에 대한 승리의 기억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사적지가 밀집된 옛 전남도청 일대는 죽임과 죽음뿐만 아니라 연대, 항쟁, 승리의 기억과 흔적이 이어지는 곳이다. 옛 전남도청(사적 5호)과 금남로 일대는 ‘5월 광주’와 등식이 성립하는 공간이다.


전남도청 분수대 옆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모형이 들어섰다. 5월2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세운 모형이다. 1980년 부처님오신날은 5월21일이었다. 이날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공수부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엔 자비 같은 부처의 가르침은 찾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도청 광장(5·18민주화광장)과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오후 도청 광장에서 시민대회를 열었다. 23일 집회엔 시민 5만명이 도청 앞에 결집했다. ‘항쟁파’들은 27일 오후 5시10분 계엄군 특공대에 진압되기 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도청 사망자는 160명에서 4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옛 전남도청엔 지금도 연대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5월 3단체는 옛 도청 회의실 건물 옆에 ‘힘내라 대구경북 코로나19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걸어뒀다.


5·18구묘지(사적 24호)는 망월동 묘지라고 불렸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란 뜻의 망월동(望月洞)은 그 이름과 달리 학살, 비극, 원한을 뜻했다. 지금은 1980년 이후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된 이 묘지에서 한국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민족민주열사 묘역 부근엔 ‘특별하지 않은 사람 고 박종태 동지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열사정신 계승하여 비정규직 철폐하자!’라고 쓴 ‘전국학교 비정규직노조 광주지부’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화물연대 대의원이었던 박종태는 2009년 ‘대한통운은 노조 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운명했다. 묘역 옆 <택시 운전사>의 실존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묘엔 누군가 올려둔 소주 한 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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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남대 정문 5월18일 계엄군의 위협과 협박에도 200여명이 모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2일 교정에서 매장된 시신들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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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전일빌딩 ‘전일빌딩245’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1층 아카이브엔 5·18 당시 빌딩과 헬기 사격 총탄 자국이 난 기둥들을 재현했다.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 사적지의 표지석이나 기념관의 전시물, 조형물들이 광주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할 순 없어 보였다. 7일 오후 5·18구묘지에서 광주교도소(사적 22호)를 거쳐 전남대 정문(사적 1호)으로 가는 택시의 라디오에선 극우 성향 유튜버들이 전날 5·18기념재단 앞에서 5·18 유공자에 가짜가 섞여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려다 시민들과 충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당시를 촬영한 영상에서 5월 단체 회원 한 명이 “우리는 40년 전 총칼에 가족을 잃었어. 5·18 심장에서 이런 건 안 돼. 제발 가”라고 외쳤다. 몇몇 극우단체들은 16·17일 금남로 집회를 신고했다.


7~8일 광주에서 만난 시민들은 친절했다. 기자 신분을 밝히고 5·18 40주년 의미를 물어볼 때면 대부분 답변을 피했다. 7일 밤 ‘전일빌딩 245’에서 직원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이 의문에 짧게 답했다. “(광주 시민들이) 할 말은 많지만 속에 있는 말을 다 하진 않죠.” 40주년을 묻는 질문엔 “죄 지은 걸 참회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전두환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계엄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신부, 1937~2016)에겐 “가면 쓴 사탄”이라고 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전일빌딩은 아카이브와 시민 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연다. 1층 아카이브 공간엔 총탄을 맞은 건물 기둥도 재현해 놓았다.


5·18자유공원 직원 이미애씨도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어떤 목적으로 집단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 측은) 헬기도 안 띄웠다고 한다. 역사는 진실을 기록해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40년이 지나도, 수많은 물적 증거와 증언이 넘쳐도 광주에는 여전히 ‘진실’ 문제가 고통스럽게 들러붙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특별전 타이틀은 ‘5·18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라’이다.

고려 석탑, 양림 펭귄마을…몰랐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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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고려 초 추정)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 건립됐다.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편성지였던 광주공원(사적 20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성됐다. 원래는 광주신사였다. 사적을 알리는 표지석 옆 계단 한 칸엔 ‘일제 식민통치 잔재인 광주신사 계단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광주공원은 성거산에 자리 잡았다. 이곳 역사는 더 거슬러올라간다.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문화재가 광주공원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타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광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5·18이나 비엔날레, 예향이나 음식 같은 단어들이다. 자연과 삶터, 유적은 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무등산은 국립공원이다. 2013년 3월4일 한국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월 사적지 답사 때 인상적인 건 공원들이다. 광주공원은 수목이 울창했다. 5·18기념공원은 보길도 부용동 세연지 같은 남도 전통의 정자나 연못을 재현했다. 양림동 사직공원엔 전망타워가 놓여 광주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광주공원과 사직공원은 걸어서 20~30분 거리다.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엔 근대 건축물과 전통 가옥이 한데 어우러져 들어섰다. 양림동은 광주에서 처음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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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 명소 중 하나인 ‘펭귄마을’. 주민들이 빈집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시공간을 꾸몄다.

오래된 장소에 매력을 느낀다면, 5·18 최초 발포지(사적 21호)인 광주고 부근 계림동 헌책방 거리도 가볼 만하다. 광주4·19혁명 발상지로 꼽히는 광주고 정문 옆으론 오래된 헌책방들이 늘어섰다. 고즈넉한 커피가게는 헌책방 사이에서 커피향을 은근히 내는 듯했다. 교육 도시의 진면목을 이 공간에서 느꼈다. 이 시대 ‘학교 옆 서점’은 낯설면서 반가운 풍경이었다.


광주MBC 옛터 건너편 전남 여중·고 자리엔 ‘광주학생독립운동발상지’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1929년 당시 광주여고보(전남여고 전신) 학생들이 독서회 같은 활동을 통해 시위와 백지동맹 등에 적극 참여했다고 적혀있다.


‘무등경기장 정문’(사적 18호)은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의 집결지였다. 지금은 당시 경기장 정문 등 일부 시설만 보존됐다. 경기장 건너편 소공원 사적비 자리엔 택시들이 대기했다. 기사들은 5·18 때도, 지금도 대기 장소라고 했다. 이 소공원 화단엔 기아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들이 야구하는 조형물이 들어섰다. 7일 오후 무등경기장 자리에 들어선 광주·KIA챔피언스 필드에서 진짜 선수들이 연습했다. 키움과 ‘무관중’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야외석 뒤 철제 울타리 바깥에서 사진·영상으로만 보던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전 여행 가이드'…다 알지만 그래도 조심! - 저층 이동 때는 계단 이용하세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생활 속 거리 두기’에 따른 여행 경로별 안전 여행 가이드를 지난 11일 발표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안전을 일상처럼’이라는 슬로건도 내놓았다.


안전 여행 가이드는 여행 자제 때 가이드와 거의 비슷하다. 여행 기본 준비물은 마스크(여분 포함), 손 소독제, 개인 물통 등이다.


여행지의 밀폐 공간이나 밀집 지역에 가급적 가지 말아야 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실내 전시를 관람할 때는 다른 관람자와 두 팔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저층 이동 때는 계단을 이용하는 게 예방에 좋다.


공예나 요리 같은 체험 때도 두 팔 간격을 유지한다. 다른 체험객과 체험 기구를 함께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실외 관광지에서 다수가 사용하는 공용 물품이나 대여 물품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식당 이용 때는 사전 예약하고, 혼잡 시간대를 피한다. 소독, 환기 등 위생 수칙을 잘 지키는 식당인지를 확인한다.


대형 쇼핑몰이나 전통시장에선 오랜 시간 머무르지 않는다.


숙박시설 내 헬스장이나 수영장의 탈의실 등 밀폐 공간을 이용할 때도 주의한다. 수건, 가운 등 다회 이용 용품 사용을 자제하고 개인 용품을 쓴다. 캠핑장 같은 곳에서 가족·친구라도 개인 컵과 수저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이 가이드는 귀가 후엔 목욕하고, 외출복도 바로 세탁하라고 권했다. 코로나19 증상이 나타나면 여행을 중단하고 즉시 귀가해야 한다. 3~4일 정도 자가격리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경과를 지켜본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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