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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경향신문

개인 소장품을 ‘양지’로 꺼내는 일, ‘음지’의 문화를 모두가 누리는 길

[도재기의 현대미술 스케치 (10)]

미술품 물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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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의 미술품 물납제로 세워진 프랑스 피카소미술관에 소장된 피카소 작품 ‘도라 마르의 초상’(1937). 출처 피카소미술관 홈페이지

‘간송 컬렉션’에 이어 ‘이건희 컬렉션’으로 다시 주목받는 ‘상속세의 미술품 물납제’가 이제는 도입되려나.


상속세의 미술품 물납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국회에선 관련 법 개정안이 발의됐고, 기획재정부·문화체육관광부도 검토에 들어갔다. 미술품 물납제는 상속세를 현금 외에 부동산·유가증권처럼 미술품(문화재·현대미술)으로도 납부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현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현금 외 물납 대상으로 부동산·유가증권만을 규정하는데, 엄정한 평가와 선별을 거친 미술품도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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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손창근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실 미술품 물납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도입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해외 각국의 사례도 소개돼 있다. 문체부도 2018년 ‘미술진흥 중장기계획’에서 도입 추진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여느 문화예술 관련 정책들처럼 정부나 국회에선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동안 제대로 도입 활동이 이뤄지지 않던 미술품 물납제가 ‘이건희 컬렉션’으로 다시 화제에 올랐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물납제 주목

상속세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제도

이미 문화예술계서 10여년 전 논의


정부 예산으론 엄두 못 낼 작품들

미술관 등 공적공간서 전시·활용

국민의 문화향유권 확대 효과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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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으로 알려진 미술품인 마크 로스코의 유화 ‘붉은색 위에 흰색’(1956). 출처 리움 홈페이지

문제는 미술품 물납제가 ‘이건희 컬렉션’과 결부되면서 원래 도입 취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아니라 특혜라는 등의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납제 도입을 지금부터 본격 추진한다 해도 신고·납부 기한이 4월 말까지인 ‘이건희 컬렉션’에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시행까지는 관련 법 제·개정, 꼼꼼한 여러 보완책 마련 등으로 절대적인 시일이 필요해서다. 분납을 하더라도 법적 검토를 받아야 한다.


지금은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품 물납제를 연계시켜 ‘논란’을 낳을 게 아니다. ‘이건희 컬렉션’과는 별개로 물납제의 원래 취지와 효과, 부작용 예방책 등을 검토하며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 할 때다. 미술품 물납제는 ‘이건희 컬렉션’과 상관없이 원래 취지인 국민 문화향유권 확대, 문화예술 진흥 정책 등의 차원에서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선진국, 미술품 물납제 필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12개 단체와 전직 문체부 장관 8명은 최근 미술품 물납제의 조속한 제도화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전직 장관들까지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앞서 문체부·한국박물관협회는 지난해 말 ‘도입 필요성 및 개선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도 열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이광재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박물관·미술관 기증·기부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세제 혜택 제공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관련 법 개정안과 함께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지난해 10월 초 입법·정책보고서를 펴내 장단점 비교, 도입 시 고려해야 할 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미술품 물납제 도입 주장 근거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 역사적·예술적으로 가치가 큰 미술품을 국민들이 보다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문화향유권의 확대다.


이른바 보편적 문화복지 개념의 현실적 구현이다. 납세자가 세금 마련을 위해 소장품을 개인에게 팔 경우 그 미술품은 국공립 미술관·박물관 등 공적 공간에선 보기 힘들어지지만, 물납이 되면 공적 공간에서의 전시·활용이 가능하다. 개인이 즐길 ‘음지’의 미술품을 모두가 즐기는 ‘양지’로 꺼내는 일이다. 물론 ‘양지’로 꺼내 놓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고, 엄정한 기준·절차를 통해 엄선돼야 한다.


정부 예산으로 구입하기 힘든 미술품을 쉽게 확보하는 장점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소장품 구입 예산은 48억원, 국립중앙박물관은 39억7900만원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 미술의 최고가 작품은 김환기의 유화 ‘Universe 5-IV-71 #200’(일명 ‘우주’)인데, 2019년 경매에서 131억8000만원에 거래됐다. 한국 문화예술을 대표·상징하는 두 기관의 구입 예산을 합쳐도 이 같은 작품은 1점도 소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달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작품이 작가 최고가 기록으로 10억원을 넘어섰다. 문화재급 고미술품 가격도 마찬가지다.


현 구입 예산으로는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미술품의 수준이 뻔한데, 물납제는 이 상황의 타개책이 될 수 있다. 해외 사례들도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납세자의 편의 확대, 미술시장 활성화, 수준 높은 미술품 소장에 따른 문화국가로서의 이미지 제고 등의 이점들도 있다.


물론 여느 제도처럼 부작용도 있다. 납세자의 악용 가능성, 조세재정의 건전성 악화 우려 등이 대표적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미술품 등 상속세 물납제도 도입 신중해야 한다’는 성명에서 국고 손실을 우려했지만, 물납제 취지는 물납 미술품을 국가가 현금화를 위해 처분하는 게 아니라 공적 자산화해 공적 공간에서 전시·활용하는 것이다.


제도 악용 등에 대한 보완책은 이미 나온 분석들과 더불어 향후 각계 전문가들의 논의로 마련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여건에 맞게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또 물납 대상 미술품의 선정 기준,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가액 평가, 물납된 미술품의 보존·활용, 조세회피 예방책 등에 대한 세밀한 연구로 제도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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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현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백남준의 ‘잡동사니 벽’(199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제도 개선으로 기증·기부 활성화

수년간 수면 아래에 있던 미술품 물납제의 재부상은 지난해 5월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간송미술관) ‘간송 컬렉션’ 중 보물로 지정된 불상 2점이 경매에 나오면서다. 간송 전형필이 일제강점기에 갖은 노력으로 수집한 ‘간송 컬렉션’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물납제도를 통한 공적 자산화가 주목을 받았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의 구입으로 공적 자산화돼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미술품 물납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이건희 컬렉션’이 시가 감정 등을 위해 감정단체들에 맡겨지면서 다시 주목됐다. ‘이건희 컬렉션’은 국보·보물 등 고미술품과 국내외 유명 작가의 근현대미술품 1만3000여점, 시가가 1조~10조원대에 이른다는 등 온갖 추측들이 분분하다.


‘이건희 컬렉션’이 시장에 나올지 등 그 향방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유족들이 세금 납부를 위해 상속받는 미술품을 시장에 처분할 수도, 공익법인인 삼성문화재단(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에 기증할 수도 있다.


현재 국보·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미술품은 상속세가 없고, 국내에선 가능하지만 해외로 유출되는 판매는 불가능하다. 비지정 미술품의 경우엔 공익법인이나 국가기관에 기증하면 세금을 면제받는다. 따라서 ‘통 큰’ 기증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유족들이 자신의 여건에 맞춰 결정할 일이다. 미술품 물납제는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어떠한 고려나 상관없이 본래 취지에 따라 그 도입 여부가 논의돼야 하는 것이다.


문화복지와 국민 문화향유권 확대 등의 차원에서 미술품 물납제 중요성을 거론할 때 함께 제기되는 것이 있다. 바로 기증·기부 활성화를 위한 세제 혜택 등 조세제도 개선이다. 기증·기부는 물납제와 더불어 사적 자산을 공적 자산화하는 효율적 방식이다. 문화향유권 확대나 국민적 자긍심 제고, 사회 통합이나 해외 관광객 유치, 문화국가로서의 국제적 이미지 제고 등을 위해선 가치와 수준이 높은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박물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장품 구입비의 한계가 뻔하니 개인 소장가·기업 등 민간 컬렉터들의 기증·기부를 유도하는 다양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도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문화강국들, 기증·기부 활성화

뉴욕 현대·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의 80% 이상’이 기증품


명작 쿠르베 ‘생의 기원’도 물납

프랑스는 기증 땐 99% 세액공제

한국, 시장가 10%…혜택 개선 필요


문화선진국, 문화강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갖가지 세제 혜택을 통해 기증·기부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미술관인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전체 수입의 71%가 기부·기증으로 이뤄진다. 휘트니미술관·보스턴미술관은 각각 88%, 78%를 차지한다. MoMA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소장품 80% 이상이 기증품이다. 소장품 구입 예산이 적더라도 기증·기부로 국민 문화향유권에 중요한 수준 높은 문화재, 미술품을 소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은 물납제 외에도 미술관·박물관에 대한 기증·기부 활성화를 위해 획기적인 문화기증제도(CGS) 등 다양한 제도를 시행 중이다. 프랑스 피카소미술관은 미술품 물납제의 대표적 사례다. 1985년 물납제도를 통해 설립한 피카소미술관은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다. 또 오르세미술관 소장품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쿠르베의 ‘세상(생)의 기원’이나 르누아르의 ‘도시에서 춤을’,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다섯사람)’과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인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천문학자’ 등도 물납제로 받은 것이다. 프랑스는 물납제 외에 기업이 문화재·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거나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의 소장품 구입비용을 기부하면 해당 금액의 99%를 세액공제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기증·기부 활동을 지원한다. 독일·네덜란드·싱가포르·일본 등도 적극적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재정당국이 재정건전성 문제를 거론하지만 국민들의 보편적 문화복지를 위해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추세다.


한국에도 물론 기증·기부 관련 제도가 있다. 그런데 절차적 까다로움, 낮은 혜택, 홍보 부족, 세수 부족 우려에 따른 소극적 운용 등으로 현장에선 그 효과가 미미하다고 분석한다. 대표적으로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에 문화재·미술품을 기증할 경우 가격 산정 불투명을 이유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기증되더라도 실질적 혜택은 시장가의 10%에도 못 미친다는 게 미술계 지적이다.


따라서 기증·기부 활성화를 유도하는 적극적인 제도 개선과 조세정책이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외교적으로 환수가 어려운 해외 소재 문화재·미술품을 기증할 경우 대폭적인 세제 혜택을 준다면 문화재 환수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독일 등은 문화예술 진흥, 문화복지 구현을 위해 정책의 개념 자체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미래와 모두를 위해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진정 “문화가 중요한 시대”라면, 미술품 물납제 도입이나 기증·기부 활성화가 무엇보다 시급한 시대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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