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여전히 마르지 않는 예술적 호기심
늦은 시간까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푹 빠져 밤을 잊기 일쑤였던 1970년대의 청춘들. 그들을 근사한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아나운서 황인용은 예순을 몇 해 앞두고 ‘카메라타’라는 이름의 음악 감상실을 열었다. 그리고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그 공간에서 음악이 주는 삶의 멋진 순간들을 만끽하고 있다.
이곳이 문을 연지 벌써 25년이 되었다고요.
1997년도에 열었으니 벌써 그렇게 됐네요. 카메라타는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인, 건축가, 미술가, 음악가 등이 모여 토론하고 얘기를 나누던 작은 방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제가 모은 빈티지 스피커와 1만5000여 장의 LP판으로 채운 공간이죠.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고맙고 소중한 공간으로 손에 꼽히더라고요.
일단 저부터 누구 못지않은 음악 애호가이니 제가 제일 감사하고요.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을 듣는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다양한 음악과 좋은 연주자들의 멋진 공연을 들려줄 수 있어 참 뿌듯합니다.
이곳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다고요.
단조롭지만 지겹지 않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여전히 음악을 선곡하고 감상하고 책을 읽는 데 씁니다. 라디오 디제이로 사랑받았던 저의 30~40대 시절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년에 한두 번 여행을 다녔어요. 문화 예술에 허영기가 있어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어느 해에는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다녀왔고, 그 전엔 바흐를 찾아가는 여행을 다녀왔지요. 주로 전문 여행 팀과 함께 가는데, 제게는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에요.
여전히 음악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의 전도사처럼 보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을 때 전도사라는 말이 어울리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저 제 멋에 겨워 사는 겁니다. 선곡을 할 때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먼저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이곳이 저 혼자만의 아지트가 아니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공간이 된 이상, 사람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갖고 있습니다.
음악 감상실에 가면 사람들이 신청곡을 적어 내는데 의외로 중복되는 노래가 많습니다. 들었던 음악이 너무 겹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찾아오는 분들에게 평소 경험하기 어려웠던 좋은 음악을 한 곡이라도 더 들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꽤 열심히 선곡합니다.
매일 음악을 선곡하는 일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는 없나요?
음악을 좋아하고 디제이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저도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라서 음악이 여전히 어렵고 손에 닿지 않는 신성한 영역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루 서너 시간씩 음악을 들어도 금세 제 플레이리스트가 바닥나거든요.
그래서 계속 공부하는 거예요. <음악의 세계사> 같은 책은 제게 성서와 같아요. 늘 가까이에 두고 어떤 음악을 듣다가 생소하거나 궁금한 점이 생기면 책을 찾아보죠. 예를 들어 바흐의 ‘평균율’이라는 곡이 있어요. 이 곡이 탄생한 1780년의 오스트리아 빈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합니다. 그 무렵 모차르트가 빈에서 ‘예약 음악회’를 열어요. 음악 역사상 최초로 공연 예약제가 도입된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머리에 기록합니다. 저에게 “어떻게 하면 음악과 친해지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제 대답은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대한 책을 읽어 지식을 쌓고, 그 배경 역사를 연상해 보라”입니다.
문화 예술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상상을 반복하며 음악을 듣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간에도 음악을 듣나요?
하루 종일 음악을 들었는데도 유독 진지하게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은 손님들이 모두 떠난 밤 10시 즈음 불을 다 끄고 혼자서 조성진의 연주를 들어요. 그럴 때 커다란 행복이 밀려와요.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그런 완전한 행복이요.
이 공간에서 인생 2막을 연 셈인데, 그동안 무엇을 느꼈나요?
‘황인용은 항상 미완성이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방송 활동도 그리 오래 하지 못했고, 문화 예술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족한 것, 모르는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항상 채우며 살아왔어요.
그것이 젊게 사는 비결일까요?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을 보면 부러워요. 외모가 아니라 이 아름다운 음악이 저들의 귀에는 얼마나 명징하게 들릴까?’ 싶어 그것이 부럽습니다. 단, 젊은이들과 소통할 일이 있으면 되도록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인생 경험이 많더라도 사실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인생 철학이 명확하게 서 있는 분들이라면 어떤 조언을 해도 상관없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저보다 어린 사람들과 대화할 때 머릿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놔요. 그들의 말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로 그 공간을 채우는 겁니다.
노후에는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채울 것이 여전히 많은 삶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인생에 빈틈이 많아서일 거예요. 음악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음악을 통해 얻은 저마다의 감정과 경험을 채워주시면서 더욱 풍요로워졌어요.
언젠가 제가 떠나도 이 공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삶을 채워주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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