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억 대신 귀촌, 고향에 차(茶) 공방 낸 전직 은행원
20년 째 은행원 생활을 하던 47세 어느 날, 정명성 대표는 과감하게 퇴직을 선언했다. 우연히 접한 차(茶)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을 차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정 대표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정읍으로 내려갔다.
“차 관련 책에만 2억은 썼죠.”
정 대표가 차에 빠진 건 퇴직하기 7년 전 2003년의 일이다. 하루 10잔의 커피를 달고 살던 그가 우연히 차를 접한 뒤 향긋한 차 맛은 물론 차를 통해 자연스런 만남을 갖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차 문화에 반해버렸다.
그렇게 취미로 차를 즐기다 보니 차에 관해 좀더 깊숙이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다. 급기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차문화콘텐츠학과에 입학해 전문적으로 차 공부에 매진했다. 그의 차에 대한 애정은 엄청났다. 시중에 있는 차 관련 서적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금까지 책 값에만 2억원은 썼다고.
“은행원 시절 연봉은 적지 않은 편이었고, 퇴직금도 있었으니 한 번은 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차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주변에선 당연히 말렸지만, 저는 100세 시대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40대에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2010년 20년 간 몸 담았던 은행을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와 함께 인사동에 찻집을 열었다. 2년 정도 꽤 안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정 대표의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고향 정읍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고향에서 인생 2막을 살겠다고 생각해왔던 그는 결국 인사동 찻집을 동업자에게 모두 넘기고 고향인 정읍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차 사업을 시작했다.
10년을 준비한 고향행
“어머님, 누님 등 가족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서 자리잡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단지 마음 속에 꿈처럼 남아있던 어릴 적 정읍의 기억과 수 십 년이 지난 정읍의 모습이 다르다 보니 스스로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어요.”
정읍은 예부터 사람들이 모임에서 밥, 술, 3차로 차를 마신다고 할 만큼 차를 즐기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혀 있다. 또 한국에서 차로 유명한 보성, 하동과 더불어 1,000년을 이어온 차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차에 대한 수요와 이해도가 높고, 품질 좋은 차를 가까이에서 공급받을 수 있으니 승산이 있는 귀향이었다.
“2003년 차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던 때부터 정읍의 여러 차밭을 수시로 오가며 그곳 사장님들과 관계를 쌓아왔어요. 차에 대해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 품질이 좋은 차밭 소개도 계속 받았고요. 이분들에게 내려오라는 권유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그렇게 퇴직 후 정읍에 가기까지 10여 년 간 천천히 차 사업 준비를 한 셈이죠.”
실패로 끝난 티백 사업
그는 정읍 사람들이 워낙 차를 많이 마시니 티백을 만들어 간편화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정읍의 특산품인 구절차와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홍차를 블렌딩해 만든 ‘구홍차’ 티백이다.
"처음에는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고 나니 티백 재고는 급격히 쌓여가고 돈은 물새듯 샜습니다. 한 마디로 망한거죠.”
차밭이 많으니 좋은 찻잎을 갖고 오는 데 자신 있었고, 공장을 빌려 직접 차를 덖고 먹기 편한 티백으로 만들어 대중화하려 했다. 홍차 베이스에 구절차 향이 나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차를 꾸준히 즐기는 진성 고객들은 티백의 편리함보다 고급 찻잎과 차를 내려 마시는 순간에 가치를 두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정 대표의 10여 년 간의 준비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 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더라
실패에 굳건하게 맞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였을까.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그의 차에 대한 애정은 쉬 식지 않았다. 이후 대학원에서 만난 차 교수들의 권유로 2015년부터 각 지자체의 차 문화 행사, 농림부 박람회, 세계 차 품평회 등의 기획, 진행을 맡았다. 각 행사마다 수 십 장이 넘는 기획안을 직접 만들고 발표하기를 반복, 그렇게 박람회 기획자로 여기저기 ‘아르바이트’해 돈을 모았다.
정읍 한 가운데 생긴 DIY 찻집
“시내에서 월세 내고 간단히 인테리어하고 판매용 차와 다구 등을 들여놓는 데 2,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차와 다구에 1,000만원 정도 썼고, 아무래도 시골이니 월세나 인테리어 등 다른 것엔 큰 돈이 들지 않았죠.”
2018년 정 대표는 정읍 시내에 차 공방 <정읍차샘>을 열었다. 기존처럼 직접 찻잎을 받아와 덖음하고 생산하는 역할은 하지 않는다. 대신 찻집, 클래스, 차와 다구 판매 3가지로 수익을 낸다. 주수익은 차와 다구 판매고 찻집 운영이나 클래스로는 크게 남는 게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에서는 1잔에 6,000~7,000원받는 고급 보이차도 이곳에서는 3,000원에 원하는 만큼 즐기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찻집이라고 말하지만 동네 사랑방처럼 주민들이 오가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된 셈이다.
정읍차샘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원하는 차와 다구를 골라 차를 내리고 계산도 한다. 주인장인 정 대표가 가게를 비웠을 때는 문도 직접 열고 들어가 차를 마실 수 있는 그야말로 DIY(Do It Yourself) 찻집이다. 차 클래스도 단골 손님들의 성화에 매주 2번 아침, 저녁 1시간 30분씩 4~5명 정도의 소규모로 운영한다. 차 값을 포함해 아침반 5,000원, 저녁반 10,000원을 받고 있으니 이윤을 남기는 장사는 아니다.
“순 수익은 300만원 정도예요. 거의 차와 다구 판매로 유지합니다.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찻집 좌석이 많지도 않으니 이 지역에서 이 정도 수익이면 더 바라기가 어렵죠. 성공의 가치를 금전적인 것에만 두지 않는다면 성공했다고 봐요. 정읍에서도 ‘차’ 하면 정명성을 떠올리고, 제가 고른 차는 믿고 마시니까요. 무엇보다 작은 공간이지만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가치 있는 인생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괜찮은거죠. 다만 정읍 같은 지역 특성이 있는 다른 곳에서 차 사업을 하고 싶다면 고급화하길 추천합니다.”
시골에서 차 공방을 하고 싶다면?
① 장사에 대해 이해하기
2라운드에는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취미를 직업화하고 싶다는 단순한 로망이 있는 분들이 많은데 아주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결국 장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력이나 투자 대비 수익이 나지 않으면 취미로 다가가기에도 힘들어집니다.
② 스스로 고급화하기
차는 대중적인 먹거리로 접근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차도 일종의 사치 문화이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망합니다. 고급화를 통해 마니아층을 확보하는 것이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비싼 차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장 자체가 고급 상품이 되어야 해요. ‘아 저 사람이 고른 차의 맛과 품질은 믿을 수 있어’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는 거죠. 본인의 가치가 높아지면 가게의 가치도 높아집니다. 그 다음 여력이 생기면 가격대가 있는 고급 차도 들여오고 예쁜 찻자리도 마련해보세요. 차에는 찻자리가 따라 와야 하기에 그런 부분이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③ 충분히 내공 쌓기
차는 깊게 파고 들수록 역사, 인문학 등 알아야 할 폭이 넓어 스스로 충분히 공부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지식을 쌓으려 하기보단 천천히 다가가보세요. 차와 관련된 책은 1년에 40~50권 정도밖에 출간되지 않으니 다 볼수록 좋겠죠. 제가 처음 차 공부를 할 때 도움을 받은 책은 박희준 저자의 ‘차한잔’ 입니다.
④ 전문가의 도움 받기
동국대뿐 아니라 원광대, 성균관대 등 차와 관련된 전문 대학원을 운영하는 곳이 꽤 있습니다. 깊이 있는 수업을 원하면 대학원 교육을 받아도 좋고, 다양한 차 협회나 문화 행사 등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 듣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차 농사나 덖음까지 직접 할 것이라면 차 박람회를 여러 곳 다니며 정보를 얻어야 실패율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업을 유지하면서도 계속 신경 써서 챙겨야 할 부분이에요.
정읍차샘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초산로 96-1
문의 010-9674-0012
영업 시간 월~일요일(오전 11시~오후 9시)
진향다원
소나무가 만든 반그늘에서 자라는 독특한 녹차밭
주소 전라북도 교암동 산 11번지
문의 010-4624-2369
기획 임소연 사진 지다영(텐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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