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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전성기

도시의 농부

삭막한 도시에서 초록을 심어 황금빛을 수확하는 사람들을 도시 농부라고 부른다. 도시 농부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사람들을 만났다.  

땅이 준 선물

김한수


높다란 아파트 뒤로 곧 수확을 앞둔 작물이 펼쳐져 있다. 일산동구에 있는 자유농장이다. 이 농장의‘밭장’인 김한수 씨는 원래 가난한 소설가였다. 생계를 위해 펜을 놓고 사회로 뛰어들었지만 도시인의 경쟁은 그의 삶을 틀에 가둬버렸다. 당연히 글이 써지지 않았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무렵,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텃밭 가꾸기가 자존감의 씨앗이 되었다.


“10평 정도 되는 작은 텃밭이지만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제가 뿌린 씨앗에서 자란 작물들이 말을 거는 것 같더라고요. 주위 사람들이 말하길 땅의 은혜를 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책을 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초보 농부로서 공부를 시작했다. 땅과 작물이 말을 건네오니 자연스럽게 화학비료나 농약을 멀리하고 자연농법을 추구했다. 그렇게 10평이 20평이 되고 60평까지 규모가 커지면서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농사를 지어보면 근원적 질문들이 머릿속에 돌아다녀요. 부추, 상추, 오이, 양파의 향이 다르게 맡아지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도 해보게 되죠. 게다가 노동에 대한 개념도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노동의 주인이 되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농사짓는 일에서는 자기 노동의 주인이 되죠.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니까 글을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요.”

농부가 되어 낸 책<한 알의 씨앗이 들려주는 작은 철학><너 지금 어디가?> 등은 글 쓰는 농부로 살아가는 신호탄이었다. 또한 자존감 회복은 그의 관심을 도시농업으로 확장시켰다.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구성해 만든 시민 단체‘고양도시농업 네트워크’가 그 결과다. 고양도시농업 네트워크에서는 고양 시민들을 위한 도시농부학교와 도시농업 전문가 양성과정을 만들었다. 나아가 고양어린이농부학교, 청소년농부학교로까지 가지를 뻗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유독 마음이 간다.


“중학교 교사로 있던 지인이 작은 화단을 밭으로 꾸며서 텃밭 동아리를 만들자고 하더군요. 화단을 밭으로 바꾸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서 봉사 점수를 걸고 학생들을 모집했어요. 봉사 점수가 필요한 아이들은 소위 밖에서 말하는‘문제아’예요. 그런 꾸러기들을 모아놓고 4일에 걸쳐 밭으로 완성했는데 그중 한 명이‘야 우리 굉장하지 않냐?’ 하니까 다른 아이가‘진짜 대단해. 그동안 내가 이 화단에 쓰레기를 제일 많이 버렸는데 이제 절대 안 버려.’ 이러는데 감동이더라고요. 학교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한 성취감을 느낀 거죠. 농사가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유농장 한쪽을 청소년을 위한 텃밭 공간으로 바꾸고 아이들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문제아도, 아픈 아이도 없다. 자연이 주는 순수함을 몸으로 경험하며 성장하는 아이들만 있다. 그걸 보며 이제는 공동체가 함께하는‘도시 마을 만들기’를 꿈꾸는 중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노동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죠. 요즘 사회가‘나만 잘 살면 돼’라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게 안타까워요. 저는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면 다양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도시인들이 시골 마을 사람들처럼 어울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품앗이도 하면 좀 더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요?”

나눔의 기쁨

이구호


27년 차 농부인 이구호 씨는 도시 농부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도시 농부였다. 농사짓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농사에 관심이 많던 그는 자라서 은행원이 되었지만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에 대한 로망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꿈을 심을 수 있었던 건 우연한 기회였다.


“아차산에 산행을 갔다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 할아버지 한 분이 농사를 짓고 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옆으로 가서 작은 텃밭 하나 일궜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할아버지가 공간을 조금 나누어주겠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네요.”


그때부터 새벽에 나가 두세 시간 밭일을 하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도시 농부의 삶이 시작됐다. 피곤함보다는 농사짓는 재미가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 내성적이고 예민했던 성격이 둥글둥글해졌고 덩달아 건강도 좋아졌다. 말 그대로 자연 치유를 경험했다. 그렇게 점점 농사에 매료됐고 2001년 퇴직하면서 텃밭 규모를 30평으로 넓혀 아내와 함께 본격적으로 농부의 길로 들어섰다. 매번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갖은 실패와 시행착오도 뒤따랐다. 시기를 놓쳐서 심는 것은 일쑤, 농부들이 가장 힘들어한다는 병충해 피해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일지를 썼다. 언제, 얼마큼 심었고, 당시 기온은 어땠는지 날짜별로 꼼꼼하게 적은 농부 일지는 실패를 줄여주고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동창들과 비빔밥 행사도 열기 시작했다.


“매년 5월에 제가 기른 채소로 비빔밥 행사를 여는데, 벌써 13년 됐습니다. 밭 옆에 자리를 깔아놓고 30여 명이 비빔밥을 해 먹는 이벤트예요. 친구 부인들이 이날만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장난으로라도 힘들어서 이제 그만하겠다고 말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할 정도죠. 농사를 지으면서 수확도 수확이지만 나누는 기쁨도 알게 된 셈입니다.”

그는 나눔의 즐거움을 확장했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서 도시농업 전문가로 교육을 받은 후 2015년부터 은평구에 위치한 향림원에서 텃밭 가꾸는 사람들의 멘토로도 활동 중이다.


“제가 맨 처음 농사를 지었을 때 했던 실수들을 떠올리면서 초보 농부들에게 다양한 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분들이 텃밭 가꾸는 데 관심이 많은데 제 이야기를 듣고 잘 해결했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더라고요. 사회 공헌 활동 차원에서 하는 일이라 수익은 없지만 이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정말 행복해요.”


그의 이런 행복에는 조력자인 아내의 역할도 빠질 수 없다. 밭에서 땅을 파고 고랑을 만드는 건 그의 몫이지만, 수확한 작물을 다듬고 요리로 완성하는 건 아내이기 때문이다.


“농사는 남편이 혼자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자식을 기르는 것과 똑같아서 부부가 합심하지 않으면 잘될 수가 없어요. 다행히 아내도 좋아해서 참 고맙지요. 다른 친구들은 퇴직 후 삼식이라고 혼난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오식이인데도 사이가 좋거든요. 산책 나가듯이 밭에 가고 자식 이야기하듯 대화하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어요.”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30여 종의 작물이 자라는 그의 밭에는 부부가 함께 내는 사랑의 발자국 소리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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