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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획이 있구나, 한비야의 은퇴 계획

결혼 후에도 계획대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비야를 만났다. 은퇴 후 삶의 방향부터 유언장까지, 일기처럼 빼곡하게 적힌 인생 계획을 들어봤다.

   

‘굿모닝 플래닝닷컴!’ 네덜란드에 있는 남편 안톤이 한국에 있는 아내 한비야에게 보낸 아침 인사 문자메시지다. 그는 매일 새로운 별명으로 아내를 부르는데, 한비야는 이 ‘플래닝닷컴’이란 말에 마음이 동했다.


하루, 1년, 5년, 10년 단위로 삶을 계획하는 계획쟁이 한비야에게 이만큼 적절한 별명도 없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대학 강단에 서며 열정적인 삶을 사는 그녀는 최근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1년 중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3개월은 한국에서 같이 지내고 6개월은 따로 지내는 ‘336’ 타임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그녀와 65세에 자발적 은퇴를 실행에 옮긴 남편 안톤의 삶이 생생히 담겨 있다. 흥미로운 건 은퇴 후 삶의 방향부터 유언장까지 상황에 맞게 업데이트하는 그녀의 플랜이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며 사는 건 좋지만, 자칫 계획에 묶여 삶에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데, 60대 이후의 삶에도 계획이 중요할까요? 

오히려 60세 이후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훨씬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지잖아요.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삶인데 뭣 하러 그렇게 계획을 세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계획을 세우면, 계획한 쪽으로 갑니다.


가령 1년에 100권 읽기 계획을 세웠는데 10권밖에 못 읽었어. 그것도 남는 장사예요. 적어도 10권은 읽었잖아요. 덕분에 아직도 읽을 90권의 책 목록이 있잖아요. 그래서 플래닝닷컴으로 사는 건 여러모로 남는 것 같아요.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남는 장사가 플래닝닷컴이라고 할 수 있죠. 

열정 전도사로 살아왔는데, 어느 정도가 돼야 스스로 만족하나요?  

저의 만족도, 성공의 기준은 굉장히 낮아요. 아침에 그날 할 일, TO DO LIST를 작성해요. 2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오늘 하루 나는 잘 살았다’라고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이 ‘하루 한 사람 기쁘게 하기’입니다. 그거 하나면 만족해요.


오늘이 다 갔는데 아무도 기쁘게 한 것 같지 않았다면 독자에게 온 이메일에 답장을 하죠. 작지만 그 만족이 하루하루 쌓이면 엄청난 힘이 돼요. 하루 한번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게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나를 움직이는 거잖아요. 내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요. 

336 타임으로 따로 또 같이 결혼 생활중인데, 향후 10년의 계획으로 2030년 한국 정착 프로젝트를 세웠더군요.  

안톤이 10년 뒤 한국에 정착하는 겁니다.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 말년에는 한국에서 사는 것이 제 바람이었고, 남편도 이에 동의했어요. 대신 제가 원래 계획했던 은퇴 연령을 70세에서 65세로 낮췄어요. 안톤을 만나고 나서 바뀐 게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지요.


제가 70세에 은퇴하면 안톤은 77세가 돼요. 같이 여행도 다니고 삶을 즐겨야 하는데 나이 변수가 생겨 조율했어요. 또 안톤이 65세에 자발적으로 은퇴한 걸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고요. 솔로에서 듀엣이 되니, 서로의 사정을 감안해 결정한 것이지요.  그래서 2024년 6월 26일, 이날이 저의 은퇴일 입니다.  

은퇴 이후 어떻게 보낼지, 무엇을 할지 계획했나요? 

바쁘지 않은 내가 너무 생소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기대가 돼요. 현재로선 일단 강의, 논문 등 개인적 역할과 특강 등 사회적 역할을 은퇴 전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이 계획이고요. 2030년 한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유럽에서 많이 살 것 같아요.


여행가, 긴급구호전문가로 주로 오지만 다녔기에 유럽은 잘 몰라요. 남편이 사는 곳이고 서양 문명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5~6년 정도 보낸 뒤 한국에 정착할 생각입니다. 

은퇴 이후 나를 둘러싼 외부 명함들이 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은 없나요?   

‘외부 밧줄이 모두 사라졌을 때 무엇으로 나를 지탱할 것인가?’ 하는 글을 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년 퇴임한 또래 중 높은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한동안 ‘내놓을 명함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커다란 상실감에 힘들어했죠.


최근에 건강을 잃고 외모도, 사업도, 인간관계도 예전 같지 않아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이 모든 것이 외부 밧줄이 끊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요. 결국 나를 지탱해온 외부 밧줄이 사라진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왔다는 걸 인정하고 가을이 주는 무엇인가를 얻고 활용하려는 편이 낫지, 지나온 날에 대해 그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건 도움이 안 돼요. 분명한 건 그때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온전히 나의 뿌리로 서는, 혼자 사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 이후 연금 보험, 근력 보험, 관계 보험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저는 가장 기본으로 자신감 보험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남과 비교해서 잘 되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를 믿는 힘, 내가 하기로 한 건 정성을 다하는 그 힘을 말합니다. 

 그 힘을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한비야를 이루는 세 가지 키워드는 산, 세계지도, 일기장이에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중 일기장이 가장 중요했지요. 100권 이상 썼는데, 일기를 쓰려면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도 하고 글로 쓸 수 있거든요. 즉 혼자 있는 힘을 키우는 좋은 도구가 바로 일기라는 의미지요.


청소년뿐 아니라 중년들에게 적극 추천해요. 가령 일기를 쓰며 ‘어떤 일을 할까, 말까?’ 할 때 ‘내가 왜 하고 싶은가?’ ‘마음이 끌리나’ 등 아주 솔직하게 적어보는 것이지요. 그때의 마음을 기록사진으로 넣어두는 것이지요. 그게 일기장이라고 봐요.  

 60세 이후 어떻게 나이 들겠다는 계획도 있나요? 

품위 있고, 귀엽게 나이 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죠. 이를 위해 남편과 두 가지 합의를 했어요. ‘품’은 입구(口) 자가 세 개 모인 글자이고, ‘위’는 사람인(人)과 설립(立) 자를 쓰니, 모든 말을 때와 장소에 맞게 하는 거라고 해석할 수 있잖아요. 두 가지 모두 말에 관한 내용이에요.


하나는 아는 척하거나 말 길게 하지 않기. 내가 조심해야 할 항목으로 세계 곳곳에서 했던 다양한 경험 덕분에 풍성한 이야기 마당을 펼칠 수 있지만, 자칫 아는 척하거나 우쭐대기 좋은 상황도 자주 발생할 수 있어요.


안톤 역시 40여년 간 주요 국제구호 현장의 책임자로 설명하고 지시하는 게 직업이었던 사람이라 말을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고요. 행동강령으로 물어보기 전에는 말하지 않기, 우리의 경험과 의견을 물어봤더라도 질문의 핵심 및 요점만 간단명료하게 말하기를 잡았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끼어들지 않기입니다. 저희끼리 서로 조심하고 지적하면서 맹훈련 중이에요.  

책에 보니 10년 전 작성한 유언장을 상황에 맞게 업데이트하고 공증까지 받아놨던데요.

저는 죽음도 플래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누구나 삶의 왕복권을 갖고 태어났어요. 가는 날짜를 모를 뿐이잖아요. 그런데도 가는 티켓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되죠. 유언장은 죽음을 인정하고, 나는 갈 때까지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당연히 내가 멀쩡할 때 써놓는 게 좋지요. 나중에 아무리 이상한 행동을 해도, 멀쩡할 때 이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거잖아요. 그리고 유언장도 시기에 맞게 수정, 보완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69세를 생각하고 그때까지 살면 좋고 안 살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작성했다면, 지금은 안톤과 재미있게 살아야 할 목표도 생겼으니 이에 맞게 조율하고 공증까지 받아뒀죠. 

10년 뒤의 한비야가 궁금하다고 했는데, 일흔의 한비야가 꼭 간직했으면 하는 것은 뭘까요? 

따뜻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는 만족한 삶에서 나오고, 그 바탕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지요. 누군가 나에게 왔을 때 온기를 느끼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바람이에요.  


기획 이인철 사진 박충열,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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