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민‧남주혁과 멜로 찍던 영화감독, 돌연 연극 연출한 이유
멜로 장인 김종관의 첫 연극 연출작 '빈 집'
영화 '조제' 촬영지 헌팅하다 영감 떠올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덩그러니 놓인 낡은 의자에 짧은 머리 10대 소녀(김승비)가 앉아 볕을 쬔다. 오래된 폐가 옆 공터, 주인 잃은 가재도구들 속에 아이도 덩달아 버려진 것만 같다. 바로 그때 나타난 또 다른 여자는 형사(한송희)다.
10일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신관)에서 막 올린 ‘빈 집’(연출 김종관)은 20여분 길이의 단막극. 공터에서 이웃 간의 일상 대화처럼 시작된 얘기가 실은 바로 옆 폐가에서 벌어진 일가족 자살 사건의 목격담이란 게 드러나며 반전을 거듭한다.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대화가 다인 데도 뜻밖의 긴장을 더하며 비극과 희망,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다.
━
사랑의 풍경화가 김종관 감독의 첫 연극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는 영화감독 김종관(45)의 첫 연극 연출작이다. 배우 정유미를 첫사랑의 주인공으로 발굴한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한예리 주연 장편 로맨스 ‘최악의 하루’(2016), 아이유의 넷플릭스영화 ‘페르소나’(2018) 중 단편 ‘밤을 걷다’ 등 사랑이 찾아왔다 떠나가는 순간을 서정적인 풍경화처럼 포착해온 그다.
최근엔 일본 멜로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한국판 리메이크 ‘조제’ 연출을 맡아 주연 한지민‧남주혁과 촬영을 마쳤다. 후반작업이 한창일 시기에 왜 돌연 연극 공연에 나섰을까.
2일 보안여관에서 만난 그는 “뭔가가 있다 사라진 자취, 죽음에 관심이 많은데 ‘조제’ 집을 헌팅하면서 보게 된 빈집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우울증의 시대잖아요. 조심스럽지만 꼭 한 번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았죠.”
━
연극은 영화적 트릭 없는 롱테이크 닮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연극에 도전한 계기는 자신의 영화 ‘더 테이블’(2017)이 낭독극으로 공연된 것을 보고서다. ‘더 테이블’은 한정된 카페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의 사연이 교차하는 옴니버스 영화다. 그는 “‘빈 집’도 단편영화로 찍고 싶던 이야기인데 연극도 재밌을 것 같았다”면서 보안여관에서 다른 전시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토크 프로그램을 제안하기에 짧은 2인극을 역제안했다고 했다.
“창작자로서 배우고 성장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무대는 화법 자체가 영화랑 다르고, 굉장히 긴 테이크를 영화적 트릭 없이 견뎌낼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해내야 한다”면서 “평소 글 쓰고 사진 찍는 다른 창작 작업들처럼 이번 공연도 영화감독으로서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
그날 벽 부숴낸 집안 소파에 쉬던 노부부
“어릴 적 창신동에 살아서 주택가가 친숙해요. 낡고 남루해도 ‘가족의 집’이란 인상이 있고, 그런 동네에 살며 자극을 많이 받아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빈 집’의 단초는 옥인동에서 얻었다. “작업실 올라가는 길에 지금도 비어있는 좋은 양옥집이 있어요. 어느 날 그 집 담이 허물어져있고 공사를 위해 벽면을 다 떼놨더라고요. 벽을 떼어낸 집안에 아직도 사람 사는 집처럼 짐들이 있고 노부부가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빈집에 몰래 드나들던 사람들끼리의 이야기를 떠올렸죠.”
전작처럼 그가 발굴한 배우도 주목된다. 10대 숙경 역의 김승비는 ‘조제’에 단역 출연한 인연. 김 감독은 “오디션 영상에서 발성과 느낌이 좋아서 영화에 짧게만 나오긴 아까웠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김승비는 이달 초 개봉한 스릴러 영화 ‘침입자’에서 가사도우미 역으로 기이한 인상을 남겼다. 형사 선아 역의 한송희는 극단 라스 출신으로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등 무대 경험이 풍부한 배우다. 김 감독은 “‘더 테이블’ 낭독극에서 영화 속 한예리 배우 역을 맡아서 기억에 있었는데 무대를 잘 아는 배우로 추천 받았다”고 했다.
━
삶과 죽음, 환상의 경계 이야기 하고파
“삶과 죽음, 꿈, 영화가 가진 환상성,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왔어요. 예전엔 조금 경쾌하고 밝게 했다면 지금은 다른 방식의 것들을 찾아가는 거고, 그런 여유가 조금씩 생기고 있죠. 무거운 얘기들은 제가 뭔가 확보가 돼야 관객들을 이끌고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거든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번 공연은 보안여관이 주최한 전시 프로그램 ‘김종관 시어터-오늘과 하루’ 일환이다. 10·12‧14일 각 1회 예약제로 공연한다. 같은 건물 게스트하우스 ‘보안스테이’ 41번방에서 김 감독이 새 단편 ‘오월’을 찍으며 머무는 동안 영감 받은 사진, 아이디어 노트, 앨범, 애장서, 오브제 등 전시도 11일까지 열린다. 시간당 최대 5명까지, 보안여관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받는다.
━
'조제' 일본 원작 '스피릿' 지키며 찍었죠
앞서 사진전·에세이집 등도 활발히 펼쳐온 김 감독은 “영화는 어떤 면에서 편지 쓰기 같다”며 이외 활동은 “창작자로서 긴 시간을 두고 자기 스토리를 쌓아가는 것”이라 했다. “세상의 플랫폼도 바뀌잖아요. 극장이든 온라인스트리밍이든 창작으로 살아남으려면 또 이렇게 다양하게 몸부림을 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영화 차기작도 빼곡하다. 아이유와 두 번째 뭉친 장편 ‘아무도 없는 곳’에 더해 ‘조제’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조제’는 원작이 인기가 높았던 터라 기대 반 걱정 반 속내도 드러냈다. “원작이 워낙 좋은 영화니까 부담도 되지만 제 취향의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있었어요. 시대가 다르고 한국 땅의 현실적인 채색, 기호들을 시도했죠. 원작의 ‘스피릿’을 지키면서 나름 자신감 있게 찍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