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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에서도 새싹은 돋는다, 산불 이긴 강원도 숲의 힘

중앙일보

2019년 4월 대형 산불이 났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는 피해 복구 과정에서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경기의 숲'을 만들었다. 여전히 거뭇거뭇 상처를 간직한 야산에 소나무 묘목이 자라는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엿본다.

경북 울진과 강원도에서 벌어진 대형 산불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시커멓게 변한 산을 보면 언제 예전 모습을 되찾을지 아득하다. 비록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숲은 언젠가 되살아날 테다. 강원도 양양·속초·고성에서 산불의 아픔을 이겨낸 숲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화마가 삼킨 숲을 회복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산불로 소실된 문화재를 그대로 전시해 참상을 기억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소나무 일색이었던 야산을 꽃동산으로 가꾼 사례도 있다. 얼마 전 시커멓게 불탄 산도 머지않아 새싹이 돋고 울울한 숲을 이룰 것이란 작은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서핑 성지 만든 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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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양양 낙산사는 2005년 4월 전소에 가까운 산불 피해를 입었다. 17년이 지난 지금은 산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숲이 울창해졌다.

양양은 서핑 성지다. 양양 바다는 해수욕 철인 여름보다 봄가을에 서핑하기 좋다. 양양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에서 부는 ‘양간지풍’이 좋은 파도를 일으켜서다. 문제는 고온건조한 이 바람이 대형 산불의 촉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2005년 양양읍과 강현면 일대 9.7㎢를 쑥대밭으로 만든 산불도 그랬다.


식목일을 하루 앞둔 2005년 4월 4일. 강현면 사교리 야산에서 발생한 불이 최대 초속 32m의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해변까지 번져 천년고찰 낙산사까지 집어삼켰다. 원통보전 등 목조건물과 보물 479호 동종이 전소했다. 산불은 신기하게도 석굴 위에 자리한 홍련암을 덮치진 않았다. 해풍이 맞받아친 덕이었다. 이후 홍련암은 기도 도량으로 더 명성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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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에서 해수 관음상으로 이어지는 '꿈이 이뤄지는 길'에는 산불 피해 이후 새로 조림한 소나무가 어느새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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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이 지났어도 낙산사는 당시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한다. 녹아버린 동종과 그을린 건물 잔해를 의상기념관에 전시했다. 강릉의 악기 장인이 원통보전 대들보로 만든 첼로와 바이올린이 희망과 회복의 메시지도 전한다. 재난을 보여주는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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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의상기념관에서는 참담했던 산불 피해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원통보전 대들보를 활용해 첼로와 바이올린을 만들어 전시한 모습.

낙산사는 숲을 되살리는 데도 공을 들였다. 산불 이후 다시 조성한 소나무숲은 십여년이 지난 지금 산불이 났나 싶을 만큼 무성해졌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꿈이 이루어지는 길’ 솔숲이 특히 좋았다. 16일 보타전 주변에는 매화와 복수초가 만개해 봄 분위기가 완연했다. 낙산사 수미 스님은 “최근엔 불에 약한 소나무 대신 느티나무 같은 활엽수를 방화림으로 심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숲으로 재탄생한 국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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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청대산 도시숲에서는 속초 앞바다가 잘 보인다.

속초에는 8경(景)이 있다. 청초호, 속초 등대전망대처럼 누구나 알 법한 명소 사이에 낯선 산 하나가 보인다. 도심에서 가까워 속초시민이 사랑하는 청대산(230m)이다. 이 산도 2004년 3월 전기 합선으로 극심한 산불 피해를 당했다. 청대산 산불 피해지 중에서 국유림 지역을 산림청이 공원으로 가꿨다. 그 덕에 지금은 한 해 1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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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청대산은 이름처럼 푸른 소나무가 많다. 2004년 산불 당시 그을린 상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도 많다.

16일 청대산을 찾았다. 줄기에 그을린 자국 선명한 소나무가 산 입구부터 도열해 있었다. 화상을 입었어도 자태만큼은 늠름했다. 산림청이 조성한 ‘청대산 도시숲’ 면적은 4만2000㎡로 아담한 편이다. 원래는 청대산도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 산림청이 2015~2016년 도시숲을 조성하면서 수종을 다양화하고 야생화, 화초류 군락지도 조성했다. 산책로와 전망대뿐 아니라 숲 체험장과 생태 연못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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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산 도시숲에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숲 교육장이 있다. 무료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도시숲 산책로를 쉬엄쉬엄 걸으면 1시간이면 충분하다. 짧다고 느껴지면 주 등산로로 빠지면 된다. 정상까지 다녀와도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굳이 정상을 안 가도 속초 시내와 설악산 울산바위가 훤히 보인다. 경치만큼은 국립공원이 부럽지 않다. 16일 방문했을 때는 생강나무와 매화가 꽃을 틔웠다. 2006~2007년 심은 잣나무와 소나무도 제법 굵게 자란 모습이었다. 강원산림교육협회 윤석이 해설사는 “4~5월에는 진달래, 철쭉 등이 활짝 피어 화사한 봄 풍경을 자랑한다”고 말했다. 4~11월에는 무료 숲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강원산림교육협회 홈페이지나 유선전화로 신청하면 된다.

꽃동산으로 거듭난 마을 야산

2019년에도 동해안 일대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2005년 양양 산불처럼 식목일을 하루 앞둔 4월 4일이었다. 산불 진원지는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화마는 고성과 속초 산야 17㎢를 삽시간에 삼켰다. 4000여 명이 대피했고 사상자도 13명이나 나왔다. 3년이 지난 지금도 토성면 일대는 민둥산처럼 황량하다. 고성군과 산림청이 죽은 나무를 베고 조림도 했지만, 숲다운 숲의 모습을 이루려면 10년은 더 필요하단다. 이 와중에 토성면 성천리 산불 피해지를 꽃동산으로 꾸며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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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0일 경기의 숲에 눈이 쌓인 모습. 멀리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인다.

성천리 주민이 '망우리 고개'라 부르던 마을 야산은 지난해 ‘경기의 숲’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경기도가 지역 협력 사업의 하나로 산불 피해지 3만㎡ 땅을 숲으로 가꿨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예산 7억7000만원을 들여 소나무·이팝나무·산철쭉·개나리 등 2만3000주에 달하는 나무를 심었고, 구절초·수국 등 화초류도 심었다. 산책로와 전망대도 설치했다. 평범했던 마을 뒷산이 그럴싸한 꽃동산으로 재탄생했다. 고성군 산림과 이성춘 계장은 “산이 마을 공동 소유였고 주민이 한목소리로 꽃동산을 만들기로 마음을 모았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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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뭇거뭇한 바위 틈에서 진달래꽃이 피어난 모습.

산불이 나기 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했던 터라 사방으로 시야가 막혔었다. 지금은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였다. 속초 바다와 설악산 산세가 모두 내다보인다. 지난해 12월 준공해 아직도 숲은 거뭇거뭇한 민둥산 같다. 그러나 17일 산책로를 걸어보니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고사리손 같은 소나무 묘목, 그을린 바위틈에 핀 진달래꽃과 몽우리 터뜨린 산수유꽃을 봤다. 4월 말이면 제법 화사한 풍경이 펼쳐질 테다.


양양·속초·고성=글·사진 최승표기자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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