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막달에도 무대 섰지 두번이나" 58년 연기한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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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해서 그랬지.” 배우 박정자(78)는 1962년 대학생 시절 연극 무대에 선 후 58년동안 한 해도 공연을 거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미련하다. 그런데 미련한 것도 덕목이 될 수 있더라.” 임신 마지막 달에 배가 불룩할 때도 연기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도 무대에 섰다.
딸의 애인을 사랑한 여왕, 늙은 창녀,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총으로 쏜 아내, 19세 청년과 사랑하게 된 80세 노인까지. 박정자는 “한 170편 될까. 몇편이라는 건 확실치 않지만, 연극에서 충분히 살았다”고 했다. 스스로 “우등상은 몰라도 개근상은 확실히 탄다”며 오랫동안 부지런히도 무대에 올라온 그는 다음 달 6~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무대 위 인생을 이야기하는 1인 공연 ‘박정자의 배우론-노래처럼 말해줘’를 한다.
Q : 58년 동안 쉬지 않고 공연했다.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가능했나.
“참 고지식하게 연극만 해왔다. 그게 다 미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게 똑똑한 것만 세상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마라톤 경기에서 마지막 주자한테 박수를 보내는 것 있잖나. 완주했다는 것 때문에.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Q : 일 년에 한 편 이상 연극 공연을 하는 삶은 어떨지 궁금하다.
“연극은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할 수가 없다. 공연은 단 몇주에 끝나도 준비에만 석 달이 걸린다. 나는 무대 위에 나가지만 그 뒤에 제작을 맡은 사람들, 또 스태프들 다 적자를 예상하면서도 몇십년씩 막을 올린다. 이 일을 왜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Q : 그런데도 그 일을 한 이유는.
“내가 연극이 아니면 박정자라는 이름 석 자는 있지도 않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내 이름값 하느라고 했다. 그냥 박정자가 되기 위해서. 참 이상하다. 연극을 안 할 때는 거울 보기가 싫다. 내가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끔찍하다. 하지만 공연 전에 분장실에서 거울을 딱 들여다보면 거기 진짜 내가, 박정자가 있는 거다. 그때 이외에는 내가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공연이 없을 때는 지옥이다 지옥.”
Q : 이화여대 문리대를 중퇴하고 배우의 길로 갔다. 20대 때부터 그토록 무대를 간절히 원한 것인가.
“그때는 그런 철까지는 안 들었었고. 하지만 그때는 결혼보다도 더 힘든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방송국에 성우로 꼭 들어가고 싶었는데 대학생이라 안된다고 하니까. 어떤 게 내 인생에, 앞으로의 삶에 더 유용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밀고나가는 때였다.”
Q : 배우로서의 인생도 있지만, 58년 동안 무대에 오르는 삶은 쉽지 않았을 듯하다.
“희생이 없으면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아이가 딱 둘인데, 둘 다 임신 막달에 공연을 했다. 첫 아이 때는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 배가 이만큼 부풀어 출연했다. 온달의 어머니 역이었는데 평강공주가 나타나면 엎드려 절을 해야 했다. 그 장면이 한 10분이나 됐을 텐데 그때 아이가 꼭 목구멍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웃음) 둘째 때는 배가 부풀어서 정신병동의 환자 역할을 했고. 그냥 나는 연극을 하는 애미였다.”
Q : 인생이 무대에서 흘러간 셈이다.
“시어머님과 같은 집에 살았었는데 극단 ‘산울림’과 공연 중이었다. 하루 두 번 공연이 있어서 아침에 어머님이 마루에 앉아계신 걸 보고 나왔는데 첫 공연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공연은 미룰 수 없는 것 아닌가. 정신없이 공연했다. 그렇게 공연했을 정도니까 나는 공연 안 하면 우울하다. 다들 쉬라고 하는데 관속에나 들어가 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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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수많은 연극을 했지만 TV 출연은 통 없다.
“TV는 천재들이 하는 건데 나는 천재가 아니어서 그렇다. TV에 나가면 경제적으로 도움도 되겠지만 나는 못하겠다. 드라마도 해봤지만 몇 번 끝에 내려놨다. 내 인생에서 TV는 없다.”
Q : TV 드라마 연기가 더 힘든가.
“TV는 우선 상업적인 걸 목표로 하니까. 시청률도 그때그때 딱딱 나오고. 연극은 망해도 좋아서 하는 거라 완전히 다르다. TV는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완전히 다른 별이다. 그렇게 연극이라는 세계에 딱 들어가서 안 나온 거다.”
Q : 무대에 선 건 60년대부터지만,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연극에서 전율을 느꼈다고.
“1950년에 지금 서울시청 근처에 있었던 부민관에서 ‘원술랑’을 봤다. 거기에 꿈속 지옥 장면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까만 옷을 입고 갈비뼈를 그리고 조명이 막 실감 나서 정말 해골들 같았다. 그 장면이 선명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런 걸 굉장히 좋아한다. 충격적인 거.”
Q : 데뷔는 대학생들의 연극 무대였다. 하지만 조연이었다고.
“학교에 붙은 그리스 비극 ‘페드라’의 오디션 공고를 보고 찾아갔다. 내 생각에는 내가 완전히 주인공을 할 것 같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거고, 이미 프로라고 생각해서 오디션 때도 죽어라 주인공 대사만 했다. 그런데 오디션 결과를 보니 가정과 언니가 페드라를 하고 나는 졸졸 쫓아다니는 시녀 역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이따위 시녀는 안 해’라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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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젊은 시절부터 나이 든 역할, 캐릭터가 강한 배역을 많이 맡았다.
“20대 30대 때 머리에 흰 칠하고 얼굴에 주름살 그리면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래도 난 생각한다. 그러면 그때 빛나던 주인공들은 다 어딜 갔느냐고. 그런 시간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Q : 내년에 팔순이다. 다음 달 공연에서 “여든의 연극배우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라는 대사를 읊는다고.
“정말 많다. 내년 해야 할 작품이 두 작품이다. ‘19 그리고 80’이라는 작품은 2003년부터 6번을 했는데 여든이 되는 내년에 또 한다. 사랑을 통해 19세 청년 해롤드를 우뚝 서게 하는 80세 모드를 보여주며 많은 사람이 모드처럼 되길 원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 할머니 역할도 한다.”
Q :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나는 예술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 중요한 건 감동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주는 것. 그걸 위해서 계속 일해야지. 내 80은 굉장히 화려할 거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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