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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 줄테니 기록 지워달라" n번방 45명이 전화왔다

[인터뷰] 국내1호 디지털 장의사

'산타크루즈컴퍼니' 김호진 대표


텔레그램 n번방 집단 성착취 사건 이후 개인의 디지털 흔적을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가해자의 텔레그램 기록을 삭제해준다며 돈을 요구하는 신종 사기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디지털 장의사' 김호진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2008년부터 온라인에 남은 개인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시작했다.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던 그는 초등학생 모델이 악성 댓글(악플)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디지털 평판 관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국내 디지털 장의사 1호로 알려지면서 각종 사건사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이 회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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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n번방 사건' 이후 기록을 지워달란 의뢰도 받았나.


A : n번방 참여자 45명이 연락해왔다. 지난달 21일부터 열흘 동안 온 연락이다. "돈은 얼마라도 좋으니 n번방 기록 좀 지워달라", "직장과 가정이 있어 (공개되면)힘들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러나 텔레그램 기록은 기술적으로 삭제가 불가능하다. 네티즌에게 털린 신상을 지워달란 거였는데, 딸을 둔 아빠로서 n번방 의뢰는 다 거절했다. 불경기라 직원들 급여가 밀리고 있어 솔직히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12년간 버텨 온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Q : 피해자 문의는 없었나.


A : 3월 초에 '살려주세요'란 이름으로 딱 한 번 카카오톡이 왔다. "트위터 기록 때문에 죽고 싶다"는 문의였다. 이후 연락이 끊겨 실제 의뢰로 이어지진 않았다.


Q : 보통 어떤 의뢰가 많나.


A : 지난 1년간 의뢰 문의 건수는 일반인 2111건, 청소년 1600건, 연예인 892건, 기업 690건이다. 이중 약 5%가 실제 의뢰로 이어진다. 일반인·청소년의 경우 과거 작성했던 글이나 팬덤 활동, 전 남자친구가 유포한 성관계 동영상을 지워달라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나 기업은 대부분 평판 관리 목적으로 부정적인 글을 지워달라는 요청이다. 전체 의뢰로 보면 부정적인 게시글 삭제(52.5%)와 유출된 사진·동영상 삭제(25.3%)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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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삭제'는 어떻게 이뤄지나.


A : 흔히 '디지털 장의사가 해킹을 통해 게시물을 삭제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불법이다. 먼저 빅데이터 프로그램으로 여러 사이트에 퍼져있는 삭제 대상을 수집한다. 사이트마다 이용약관과 개인정보 취급방침이 다르다. 이를 잘 분석해서 운영자에게 삭제 요청을 보낸다. 삭제 요청을 적는 노하우가 중요하다. 어떤 법·약관 조항에 위배되는지 논리적으로 적어야 한다. 국내 서버는 하루, 해외 서버는 이틀 안에 90% 정도 삭제된다.


Q : 해외 플랫폼은 삭제가 어렵다는데.


A : 특히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까다롭다. 트위터는 '게시자에게 삭제 요청하라', 페이스북은 '게시자를 차단하라'는 답변이 온다. 애초부터 운영자와 연락할 수단이 없는 다크웹도 삭제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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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컴퍼니는 일반인 기준 월 30만~200만원의 의뢰비를 받는다. 삭제 대상이 많거나 성범죄물인 경우 월 200만원이다. 청소년은 무료다. 기업 의뢰는 삭제 범위가 넓어 월 1000만~6000만원이다. 의뢰비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1건당 주간조 1명과 야간조 2명이 투입된다. 밤에 유포되는 게시물들이 많아서다.


Q : 삭제했던 게시물이 다시 퍼지면 어떡하나.


A : 모니터링 기간을 둔다. 보통 계약 기간이 3~6개월에서 1년이다. 누군가 캡처본이나 원본을 소장하고 있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다시 올라오면 계속 지워나간다. 계약 시작일로부터 6개월~1년 기간에는 월 의뢰비의 20%만 받는다.


Q : 왜 청소년은 무료 삭제해주나.


A : 부모나 학교에 말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꺽꺽 울며 전화가 온다. 용돈 3만~5만원 받는 애들한테 할부로 내라고 하겠나. 대신 사회봉사 20시간을 채워오라고 한다. 교육부·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에 "피해 청소년들을 지원해줄 순 없냐"고 요청도 해봤지만, "이런 데 돈을 지급해본 적이 없어 못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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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12년 사이 업계에 변화가 있었나.


A : 지금 연 매출이 5억원인데, 초창기엔 더 많이 벌었다. 그 사이 비슷한 업체가 늘어났단 얘기다. 과거엔 '디지털 기록을 삭제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젠 '과거를 방치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다. 디지털 쓰레기는 계속 늘어날 테니 대우가 좋아지지 않을까.


Q : 그간 온라인 범죄는 어떻게 진화했나.


A : 디지털 성범죄는 예나 지금이나 ▶불법촬영·비동의 유포(리벤지 포르노) ▶톡 스폰(몸캠 유출) ▶지인능욕이 많다. 과거엔 '톡 스폰'으로 받은 몸캠을 여기저기 팔았다. n번방, 박사방 같은 최근 수법은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성착취물을 찾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 거다. 신상 관련 범죄는 2014년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분기점이 됐다. 피해자가 국민 절반에 가까운 2000만명이었다. 당시 정부가 '해당 정보를 유통하면 강력처벌하겠다'하면서 음성거래가 활성화됐다. 그렇게 탄생한 게 보이스피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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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사람들이 디지털 흔적을 많이 남기나.


A : '에이 설마 내 정보가?' '나까짓 게 뭐라고 내 정보가 가치 있나?'라고들 생각하겠지만,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은 종일 개인정보를 남기고 다닌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당신의 신용등급, 학자금 대출 잔액, 집 평수까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피해 의뢰인 중 검사도, 경찰도 있었다.


Q : '사기꾼 많은 업계'란 비판이 큰데.


A : 디지털 장의사란 직업이 양날의 검이다. 마음을 곱게 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망가진다. 실제로 봤다. 성인 사이트에 기록 삭제해준다고 광고하거나, 굵직한 범죄마다 깊숙이 개입해있기도 하더라. 기록 삭제를 적극 홍보하는 건 노름판 옆에서 돈 빌려주는 것과 똑같다. 장기적으로 보고 시장을 만들려면 그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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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 이후 8만원에 텔레그램 기록을 삭제해준다며 산타크루즈컴퍼니를 사칭하는 카톡 계정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 계정을 명예훼손으로 신고했다. [사진 김호진 대표]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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