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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방관의 안타까운 죽음…사물함 열자 모두 울었다

지난 5일 울산 농소119안전센터 정희국 소방장 극단적 선택

정희국 소방교, "후배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괴롭다. 같이 살고 같이 죽어야 했다" 글 남겨

그의 사물함에 3년간 후배 근무복 나란히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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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울산시 온산119안전센터 소속 정희국(당시 38) 소방교와 강기봉(당시 29) 소방사는 태풍 ‘차바’로 인한 집중호우로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러 출동했다.


이들이 탄 구급차가 울주군 청량면 양동마을 앞을 지날 때 마을 주민이 황급히 뛰어와 “회야강변 고립된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정 소방교 등은 구급차에서 내려 고립된 차로 뛰었다. 쏟아진 빗물은 어느새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에 가보니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불어난 물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하천변에서 쉽게 탈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 소방교는 전봇대의 쇠로 된 손잡이를 잡았고, 강 소방사는 바로 옆 가로등 같은 것에 몸을 의지해 버텼다. 강 소방사는 몸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강 소방사는 “선배님 저 더는 힘들어서 못 잡고 있겠어요”라고 외쳤다. 정 소방교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물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기봉아 우리 같이 물에 뛰어들까” “네...” “하나둘 셋 하면 뛴다. 하나둘 셋~.”


정 소방교는 물에 뛰어들어 몇 바퀴를 구른 뒤 수면 위로 떠올랐다. 1m쯤 앞에 강 소방사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 “함께 살자”는 약속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게 정 소방교가 기억하는 강 소방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 소방교는 휩쓸려 들어갔다 떠오르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약 2.4㎞ 하류에서 튕겨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강 소방사는 1㎞ 정도 더 떨어진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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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년이 지난 8월 5일. 농소119안전센터에서 소방장으로 근무하던 정 소방교는 울산의 한 저수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하루 뒤 그의 사물함을 연 동료들은 오열했다. 사물함 안에 자신의 근무복과 함께 3년 전 죽은 강 소방사의 근무복이 영정처럼 함께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 소방장의 차 안에서는 A4용지 1장 분량의 쪽지도 발견됐다. 강 소방사가 죽은 지 8~9개월쯤 뒤 쓴 글이었다. 거기에는 “(전략)나는 너무 괴롭다. 정신과 치료도 약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같이 살고 같이 죽었어야만 했다(후략)”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의 휴대폰에도 A4용지 24장 분량의 글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부친상을 당한 뒤 49재가 끝나는 지난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쓴 글이었다. 그 글에는 3년 전 강 소방사와 함께 출동해 당한 사고 내용과 이후 힘들었던 순간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정 소방장은 사고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책감을 이겨내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서 구급대 업무에 임했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티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동료 소방관들은 전했다.


조동현(55) 농소 119안전센터장은“희국이는 어떻게 보면 차바 때 기봉이와 함께 죽은 아이다. 자신만 살고 후배가 죽자 가슴 아파해왔고 삶에 의욕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와 어린 두 딸 등 가족을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는데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 센터장은 사고 당시 정 소방장과 함께 온산119안전센터에서 구조대장으로 일했다. 울산소방본부는 진료기록 등을 토대로 정 소방장의 순직 승인을 신청할 계획이다.


울산=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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