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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여성시대ㆍ남성시대보다 그냥 '사람시대'가 왔으면”

MBC 라디오 장수프로 ‘여성시대’

7일로 진행 20주년 맞은 양희은

"청취자 사연의 무게로 어느덧 20년

내가 충고하려 들면 마이크 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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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런 우울한 사연 배달을 굳이 해야 해?”

“네. 해야 돼요. 이런 편지가 안 올 때까지 해야죠.”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진행 20주년을 맞은 가수 양희은(67)은 예전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1999년 6월 7일 ‘여성시대’ 마이크를 처음 잡은 그는 전유성과 함께 진행하던 2002~2003년에 특히 가정폭력, 성매매 관련 사연이 많이 왔다고 회고했다. 도움을 청하는 사연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졌지만,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가정폭력 관련 법률이 개정되면서 확연히 줄었다는 것. 프로그램 제목대로 ‘여성’과 ‘시대’의 변화가 고스란히 사연 속에 녹아있다.



청취자들이 ‘여성시대’를 ‘삶을 배우는 대학’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일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양희은은 “처음 시작할 땐 1~2년쯤 하겠거니 생각했다가 사연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그 시간이 쌓여 20년이 됐다”며 “여성시대에서 학사 학위를 따고 또 따고 또 따며 공부하는 기분”이라고 20주년 소감을 밝혔다. 그는 “갱년기와 겹쳐 너무 힘들었다”면서도 매일 두 시간씩, 1만4600시간 동안 5만8000여통의 사연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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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6년 먼저 ‘입학’해 26년째 ‘여성시대’를 이끄는 박금선 작가는 “저같이 둔한 사람 눈에도 변화의 흐름이 보인다”고 했다. “한동안 외국인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편지가 많이 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부모님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취직해서 효도할게요’ 하는 취업준비생들 사연이 많이 와요.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생활 속에서 알게 되는 셈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하죠. 이분들에게 우리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냥 전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1988년 시작한 ‘여성시대’가 지금까지 오게 된 원동력을 양희은은 이렇게 짚었다.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나는 용기가 없어서 편지를 써 보내진 못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저기 있구나 하며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매 맞는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쉼터로 나올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저 어려움이 뭔지 나도 알고 있다 하는 사람들이 모여 보이지 않는 연대가 만들어지고, 어깨동무가 만들어지고, 공감의 파도가 일어나는 거죠.”

글발로 소문난 ‘여성시대’ 지킴이답게 두 사람은 기자들의 즉석 질문에도 유려한 말솜씨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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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으로 양희은이 꼽은 것은 2001년 당시 유방암 말기 환자 추희숙씨가 보내온 편지. “아들 희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흘에 걸쳐 쓴 편지가 방송된 이후 음성사서함에 응원이 쇄도했다”며 “휴가 동안 희제엄마 병상을 지키며 간병을 하신 분도 있고, 과일즙이라도 먹으며 입술을 축이라고 소정의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가수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을 준비하던 그는 ‘희제 생일축하 편지’라는 곡을 만들어 이 땅의 소녀 가장들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노래를 시작하고, 난소암 투병 생활을 했던 터다.

박금선 작가 역시 워킹맘으로서 힘든 순간을 ‘여성시대’ 청취자가 되어 넘어선 적이 있다고 했다. “둘째가 말도 늦고 내성적인 편이예요. 새로 어린이집을 옮긴 날이었는데 울고불고 몸부림을 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안 울 수가 없었어요.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일을 해야 하나. 평소 같았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텐데 둘 다 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죠. 택시 기사님께 잠깐만 기다려달라 말씀드리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시 그 택시를 타고 방송국에 오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랬더니 기사님이 ‘아줌마보다 더 힘든 사람 진짜 많아요. 이것 좀 들어보세요’ 라며 ‘여성시대’ 볼륨을 키우더라고요. 갑자기 막 웃음이 나면서 행복해졌어요. 청취자들도 이런 마음이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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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도 정확한 전달이다. “‘여성시대’는 사심이나 욕심을 갖고 글을 써서 보내는 곳이 아니라, 아무 데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털어놓고 가슴으로 쓰는 편지가 많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다”며 “정확히 전달하고자, 사투리가 쓰여 있으면 사투리도 섞어서 읽는 식”이라고 했다. 박금선 작가는 “양희은 선생님 개인에게 오는 편지도 많다”며 “선생님이 안아주면서 비밀을 지켜줄 것 같고, 약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야단쳐줄 것 같은 느낌 때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양희은은 20년 이상의 라디오 진행자에게 주는 MBC ‘골든마우스’를 받게 됐다. ‘여성시대’의 전신인 ‘MBC 여성살롱 임국희예요’(1975~1988)를 진행한 임국희를 비롯해 이종환ㆍ김기덕ㆍ강석ㆍ김혜영ㆍ이문세ㆍ배철수ㆍ최유라 등에 이어 9번째 수상자다. ‘여성시대’의 남성 진행자가 김승현ㆍ전유성ㆍ송승환ㆍ강석우ㆍ서경석 등으로 바뀌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그는 “제가 혹시라도 이 자리를 자기 힘인 줄 알고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이 오면 언제든 마이크를 내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취자들한테 가르치려 들고 충고하려 들면 내려놔야죠.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지적질 해달라고 친구들한테도 얘기해 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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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라디오 애청자다. 어린 시절 ‘현해탄은 알고 있다’ 같은 드라마부터 ‘유쾌한 응접실’ ‘밤의 플랫트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겨들었고, 지금도 출퇴근 때 다른 방송사의 ‘김영철의 파워FM’‘두시탈출 컬투쇼’ 등을 들으며 '적군'을 살핀다고 했다. 20주년의 또 다른 바람도 밝혔다. “우리 프로그램이 '여성'이라는 이름을 내건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잖아요. 그만큼 치우쳐 있기 때문에 메울 곳이 많다는 거죠. 어떤 분들은 왜 ‘여성시대’는 일주일에 엿새를 하고, ‘남성시대’(목요일 코너)는 하루만 하냐고 하지만 저는 여성시대도, 남성시대도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냥 ‘사람시대’라고 해도 될 만한 세상이.”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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