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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상 이수지 "커다란 진실을 단순하게, 그림책 못 끊어요"

이수지 작가 인터뷰

'아동문학 노벨상'

한국작가 첫 수상

중앙일보

2022 안데르센상 수상자에 선정된 이수지 작가. 22일 서울 광진구 작업실에서 만났다. 강정현 기자

"2016년에도 후보가 됐단 소식 자체가 놀라웠고, 전 여전히 진행 중인 작가란 생각에 수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과 함께 명단에 오른 것 자체가 영광이죠. "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게 된 이수지(43) 작가의 말이다.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기려 1956년 시작된 이 상은 앤서니 브라운, 모리스 샌닥, 토베 얀손, 에리히 캐스트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역대 수상자의 면면에서도 그 세계적 권위와 명성이 짐작된다. 시상은 2년에 한 번뿐. 이수지 작가가 선정된 일러스트레이터(그림 작가) 부문과 글 작가 부문에서 각 1인에게, 책 한 권이 아니라 평생의 작업 전체에 대해 주는 상이다.


한국 작가가 최종후보가 된 것도,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이수지 작가가 처음. 22일 서울 광장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전날 밤 이탈리아 볼로냐 어린이 도서전에서 발표된 소식이 "실감 나지 않는다"며 수상 소감을 아낀 대신 작품에 대해서는 막힘없는 말솜씨로 답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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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그림책 '여름이 온다'에 수록된 그림. [사진 비룡소]

정작 '이수지 글·그림'의 책들은 "글자 없는 그림책"이자 "말 없는 그림책"이다. 글은 전혀 없거나 최소한이고, 그림만으로 극적인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 "아무 말이 없기 때문에 독자가 그림을 단서로 자기 마음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다음 페이지에서 그걸 확인하는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죠. 제가 그걸 미리 스포일러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요즘은 그림을 읽는 시대잖아요. 아이들은 원래 태생적으로 그게 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글자·문자의 권위에 자리를 내주고, '정답'을 알면 마음 편하게 느끼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 같아요. '정답'이 없으면 모든 게 답이죠. 혼란스럽지만 자유롭잖아요. "


내용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실험적 형식도 두드러진다. 『거울 속으로』『그림자 놀이』『파도야 놀자』등 이른바 '경계' 3부작은 책의 제본선을 기준으로 양쪽 페이지에 현실과 환상을 대칭적으로 펼치다가 그 경계를 허물고 변주하는 묘미를 보여준다. 이처럼 그는 페이지를 넘기는 방향과 판형을 비롯해 책의 물질적 특징을 적극 활용한다. 책 사이의 여백 등을 보고 해외 서점 주인이 "인쇄가 잘못된 파본 아니냐"고 문의한 적도, '난해하다'는 평을 들은 적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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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그림책 '파도야 놀자' 표지.

또 그의 그림책은 종종 독자가 극장에 들어서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지난달 볼로냐 라가치상(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을 수상한『여름이 온다』는 비발디의 '사계' 중에 '여름'이 모티브. 물놀이·비바람 등 아이들의 여름 모습을 담았는데, 콘서트홀에 들어선 듯한 형식에다 '여름'을 들을 수 있는 큐알코드도 곁들였다.


"저는 책이 항상 신기해요. 특히 그림책은 몇 페이지 되지 않아서 금방 보는 데도 책을 여는 순간,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책을 닫는 순간, 불이 꺼진 무대에서 관객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항상 생각하거든요. "


그는 영국 유학에 앞서 서울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그림책에 빠져든 것은 대학 4학년 무렵부터. 회화와 달리 "복제 가능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편안한, 우리 일상의 물건"이란 점에 끌렸단다.


"어떤 형태의 예술작업이 공산품이 돼 정가를 달고 매대에 누워있는 상상만 해도 좋았어요. 풋내기 회화과 졸업자로서 모든 것에 반기를 들고, 어떤 권위 같은 것에 반대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림책의 자유롭고 편안한 속성이 진심으로 멋있게 느껴졌죠. 당시 개념미술이 주장하던 것도 그랬어요. 예술의 아우라를 깨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기존의 물건을 예술작업에 쓰고…그런 아이디어가 무척 좋게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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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그림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비룡소) 뒤표지에 실린 손은 이 책을 닫는 독자의 손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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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비룡소) 앞표지에도 이 책을 여는 손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

마침 올해는 그의 첫 그림책『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온 지 20주년. 대학 졸업 후 영국에서 석사과정으로 북아트를 배우던 20대 후반의 유학생이 "저가항공을 타고 갈 수 있고, 거기 가면 책이 많고 재밌다는 친구들의 얘기만 듣고" 한번 가본 곳이 바로 볼로냐 어린이 도서전이었다. "작업 중인 작품을 명함처럼 들고 갔는데 이탈리아 출판사와 연결이 됐어요. 굉장히 실험적인 그림책인데, 이듬해 출간이 되는 걸 보며 놀라기도 했고, 이런 시장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


그에게 이번 수상이 갖는 의미를 묻자 "지금까지 해온 대로,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뜻일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림책은 정말 직관적이고 굉장히 단순해요. 어떤 커다란 진실을 너무너무 단순한 방식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라고 느껴요. 어른 독자들도 그걸 한 번 느끼면 끊을 수가 없어요. 창작자도 마찬가지고요." 시상식은 오는 9월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되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총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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