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주말극 황태자로 보이니? ‘악의 꽃’으로 깨어난 김지훈
[민경원의 심스틸러]
15년 만에 혼수상태서 깨어난 백희성 역
순수함과 악랄함 오가는 악역으로 압도
“주말과 미니 사이 벽 있어” 아쉬움 토로
장르물 소원성취, 물 만난 연기 변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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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어떻게 끝날 것 같아? 한 가지 확실한 건 끝까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거라는 거야.”
지난 14일 배우 김지훈(39)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그가 예고한 대로 16~17일 방영된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 14~15회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15년 전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백희성(김지훈)은 자신을 둘러싼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갔다. 납치와 협박은 물론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15년 전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의 공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현재진행형 시한폭탄이 된 셈이다.
그가 깨어나면서 시청률도 올랐다. 지난 15년간 백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도현수(이준기)와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줄곧 3%대에 머물렀던 시청률은 5.1%까지 뛰었다. 장르물 특성상 중간 유입이 쉽지 않지만 ‘악의 꽃’은 절절한 멜로와 결합해 차별화를 꾀하는 데 성공했다. 연쇄 살인마의 아들이자 누나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쓴 수배자 신세로 살아온 도현수 곁에 누구보다 그의 무죄를 입증하고픈 아내 차지원 형사(문채원)가 있다면, 백희성 곁에는 아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내할 준비가 된 부모님 백만우 병원장(손종학)과 약사인 공미자(남기애)가 있었다. 이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끓는 마음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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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모습. 한 작품이지만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스타일을 선보였다. [사진 tvN] |
특히 김지훈의 활약이 빛난다. 전체 16부작 중 절반가량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등장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산소호흡기 등 의료기구에 의존해 누워 있을 때도 헝클어진 장발에 또렷한 이목구비로 눈길을 사로잡더니, 깨어난 뒤에는 해당 설정을 십분 활용한 연기로 깜짝 놀라게 했다. 15년간 시간이 멈춰있었던 그는 걷는 것도 성치 않고 아이 같은 말투를 유지했지만, 목표물을 발견하면 날카롭게 돌변했다.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묶고 형형한 눈빛으로 쏘아 볼 때면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히스 레저나 ‘조커’(2019)의 호아킨 피닉스를 연상케 하는 광기 어린 모습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극 중 어려서부터 수학 천재로 촉망받던 인재인 만큼 남다른 학구열도 돋보인다. 청각장애인 가정부를 살해한 뒤 이를 도현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그의 지문이 묻은 테이프로 결박하고, 가정부로 위장한 어머니를 택시까지 태워 집에서 내보내는 등 증거를 조작한다. 결국 범행이 들통나자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을 정도. 아무리 복기해 봐도 완벽한 은폐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찾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어차피 무기징역인데 감옥에서 출판이나 해볼까”라며 “우리가 살인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되뇐다. 그간 등장한 숱한 악역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지능과 파렴치함이다.
‘왔다! 장보리’(2014)의 김지훈. 시청률 37.4%를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사진 MBC] |
사실 장르물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도전이기도 하다. 2002년 KBS2 드라마 ‘러빙유’로 데뷔 이후 19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주로 주말드라마나 일일연속극에서 활동해온 탓이다. 첫 주연을 맡은 KBS2 ‘며느리 전성시대’(2007)로 신인상을 받고 SBS ‘결혼의 여신’(2013), MBC ‘왔다! 장보리’(2014)로 각각 우수연기상과 최우수연기상을 받으면서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다. 37%를 웃도는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정작 젊은 층에서는 잘 모르는 배우가 되어버린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출신으로 데뷔 초부터 강타의 ‘프로포즈’(2002), 신화의 ‘너의 결혼식’(2002),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습관’(2003) 등 다양한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조각미남으로 주목받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MBC ‘도둑놈, 도둑님’(2017) 종영 인터뷰에서는 “주말극과 미니시리즈,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다”며 대놓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족드라마에 적합한 이미지로 보시는 분들이 많지만 스스로 트렌디 물이나 장르물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며 “많은 사람에게 확인받지는 못했지만 좁은 틀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을 벗어버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이후 TV조선 ‘바벨’(2019) 같은 비중은 줄어들더라도 임팩트가 있는 역할을 택했다. 주연 자리에서 내려오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야누스가 된 남자’ 태민호처럼 연기 변신을 꾀할 수 있는 조연을 자처한 것. ‘내 마음이 들리니’(2011) 이후 쏟아진 엇비슷한 서브 남주 역할을 거절하고 캐릭터로 승부해 ‘믿고 보는 배우’ 반열에 오른 남궁민처럼 변화가 절실하던 차에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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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김지훈에게는 아직 보여주지 못한 얼굴이 더 많다. 지난 18년간 출연한 드라마가 26편에 달하지만 영화는 ‘나탈리’(2010)와 ‘역모-반란의 시대’(2017) 등 2편에 불과하다. “열심히 활동했지만 배우로서 해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그는 ‘신세계’(2013) 같은 느와르나 홍콩 배우 주성치 류의 코미디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JTBC ‘크라임씬 3’(2017)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그의 코미디 본능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시즌 1, 2를 복습하며 맡게 되는 역할마다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며 준비해온 치밀함 위에서 그가 어떻게 뛰노는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김지훈의 차기작 역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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