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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를 위한 ‘1004섬’…신안 ‘섬티아고’서 위안을 찾았다


신안 ‘순례자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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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세상이 어지러워 올해 크리스마스는 여느 해보다 차분하다. 남도의 외딴 섬에 들어가 걷고 또 걸었다. 고요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다. 무작정 걸은 건 아니다. 전남 신안 ‘순례자의 섬’을 다녀왔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통하는 곳이다. 마침 그곳에는 소복하게 눈이 내려와 있었다. 섬에 드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섬 속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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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은 섬이 많아 ‘1004섬’으로 통한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섬만 1025개(유인도 76개)에 이른다. 서남해를 수놓은 수많은 섬 가운데 ‘기점‧소악도’가 있다. 증도 부속 섬인 병풍도 밑에 딸린 새끼 섬 4개(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를 신안에서는 대강 하나로 묶어 이렇게 불렸단다. 자잘하고 볼품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말하자면 ‘섬 속의 섬 속의 섬’이다.


2017년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에 선정되며 기점‧소악도는 큰 변화를 맞았다.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4개의 섬 곳곳에 짓고, 하나의 길로 엮었다. ‘순례자의 섬’이란 새 이름도 달았다. 그 유명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힌트를 얻었다. 마침 섬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국내외 미술 작가 10명이 참여했고, 40억 원이 들었다. 마을 역사상 가장 값비싼 사업이었다.


지난해 11월 길이 열리자, 전국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압해도 송공항, 지도 송도항에서 배를 타고 많게는 하루 1000명이 다녀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인만 걷지 않는다. 신안 순례자의 섬도 마찬가지다. 홀로 걷는 여행자, 두 바퀴로 섬을 누비는 자전거족, 스몰 웨딩을 치르는 연인 등 즐기는 방식이 다양하다. 이제는 ‘섬티아고’라는 애칭이 더 친숙하다.



불편을 감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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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혀두지만, 도시인에게 기점‧소악도의 일상은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동반한다. 섬 네 개 섬 모두 유인도지만, 인구는 다 합쳐봐야 50명 남짓이다. 편의점은커녕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다. 스마트폰도 종종 신호를 놓치고 만다.


섬 사이에는 다리도 없다. 대신 ‘노둣길’이 있다. 섬사람이 오랜 세월 지게를 지고 돌을 날라 이은 길이다. 지금이야 시멘트 포장이 돼 차량이 다니지만, 이마저도 밀물이 들어오면 무용지물이다. 하루 두 번 만조 때면 3시간가량 완전히 길이 사라져버린다. 이 노둣길을 따라 순례길이 이어진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를 불평하면 섬사람이 아니지라잉. 썰물에 바다 위로 길이 드러나는 게 도리어 감사하지라. 그덕에 갯벌에 들어가 낙지도 잡고, 김 농사도 해요잉.”


대기점도 김철수(61) 이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순례자의 섬을 걷는다는 건 섬사람의 애환,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섬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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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예배당을 따라가는 순례길은 편도 12㎞에 달한다. 각각의 예배당은 이름이 두 개다. 이를테면 여행의 시작점의 되는 대기점도 선착장 앞의 예배당은 ‘건강의 집’인 동시에 ‘베드로의 집’이다. 애초 예수의 12사도의 이름에서 따왔지만, 최근 ‘행복’ ‘그리움’ 따위의 새 이름을 덧붙였다. 특정 종교만을 위한 장소로 비칠 것을 염려해서다. 미술에 참여한 김강 작가 역시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마을 주민을 위한 기도처인 동시에 여행자의 쉼터이자 명상터”라고 강조했다.



섬을 닮은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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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섬을 걷는다. 첫 번째 예배당 ‘건강의 집(베드로)’은 방파제가 갯벌을 가로지르는 대기점도 선착장 끄트머리에 홀로 서 있었다. 순백의 건물과 파란 지붕이 어우러진 모습이 영락없이 그리스 산토리니 풍이었다. 순례자 대부분이 기념사진을 남기고 가는 장소다.


“바로 여그부터가 순례길의 시작이지라이, 쪼꼬마케 매달린 종을 ‘땡’ 하고 한 번 치고 순례길을 시작한다는 의미잉께 힘차게 줄을 땡겨불더라고야.”


예배당 앞 표지판 큐알코드를 찍어보니, 진한 사투리가 섞여 있는 안내 영상이 흘러나왔다.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녹음한 음성을 각각의 예배당 앞에 숨겨놓았단다.


선착장, 노둣길, 마을 어귀와 언덕, 해안과 저수지 등 섬마을 곳곳에 저마다 다른 개성의 예배당이 뿌리내려 있었다. 12개 예배당 모두 권위적이고 엄숙한 교회 건물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작고 낮은 기점‧소악도처럼 예배당도 작고 낮았다. 모두 10㎡(약 3평) 남짓한 단층으로 아담했다. 울타리는 없었고, 문이 열려 있었다. 길가에 바로 붙어 있으니, 언제든 눈과 비를 피해 갈 수 있는 쉼터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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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소원의 집(작은 야고보)’은 섬 주민이 쓰다 버린 녹슨 닻이 외벽을 장식한다. 바다와 바로 붙어있는 이 예배당에서는 개펄에 대나무를 세워서 김을 키우는 지주식 김 양식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두 번째 ‘생각하는 집(안드레아)’ 지붕에는 십자가 대신 고양이상이 올라가 있었다.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이어서란다. 여덟 번째 ‘기쁨의 집(마태오)’의 황금빛 지붕은 얼핏 이슬람의 모스크나 러시아 정교회의 건물 같지만, 실은 마을 특산물 양파를 형상화한 것이다. 예배당 곳곳에도 섬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셈이다.



마지막 ‘지혜의 집(가롯 유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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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소악도는 예부터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삶을 살았단다. 갯벌에선 김‧낙지‧굴, 밭에서는 양파‧마늘 등을 일궜다. 섬이 작으니 놀리는 땅 없이 밭을 일궈야 했다. 김 이장은 “밭으로 쓰지 못하는 묘지가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예배당도 고단한 삶의 터전 한쪽 구석에 비집고 들어서 있다. 이를테면 동화 속 그림 같은 예배당 ‘생각하는 집’이 서 있는 언덕은 옛날 묏자리가 있던 자리다.


소기점도 끝자락에 올해 2월 문을 연 마을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잠을 못 자지만, 식당과 카페는 이용할 수 있었다. 낙지탕탕이(3만원)를 비롯해 섬에서 나는 먹거리로 만든 메뉴가 그저 화려했다. 갯장어로 끓인 장어탕(1만원), 굴과 김을 넣어 부친 굴김전(1만3000원)으로 허기를 달랬다. 도시에선 쉬이 먹을 수 없는 특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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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열두 번째 ‘지혜의 집(가롯 유다)’은 진섬 옆에 딸리 무인도 딴섬에 있었다. 해변 옆 대숲은 발도장 찍히지 않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섬에 들어와 외지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유상보(63) 기점·소악도 협동조합 사무장은 “코로나 사태 악화로 여행자가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대숲 끄트머리에 그림처럼 예배당이 서 있었다. 갯벌에 고인 바닷물 위로 섬과 예배당의 거울처럼 비쳤다. 프랑스의 몽셀 미쉘 교회가 부럽지 않았다.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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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소악도(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로 가는 배가 압해도 천사대교 아래 송공항에서 매일 뜬다. 오전 6시 50분부터 오후 4시 40분까지 네댓 차례 운항하는데, 1시간이면 대기점도 선착장에 닿는다. 만조 때는 노둣길 이동이 어렵다. 물때를 잘 살펴 입도해야 한다. 순례길은 편도 12㎞에 달한다. 길이 대체로 평탄해 3시간이면 열두 번째 예배당에 도착할 수 있다. 길이 복잡하지 않고, 안내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걱정은 없다. 돌아올 때는 진섬의 열 번째 예배당 인근 선착장에서 뭍으로 나가는 배를 타는 것이 걷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마을 숙박시설 이용이 어렵다. 하여 서둘러 이동하는 것이 안전하다.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온종일 타도 1만원이다. 차를 페리를 싣고 섬에 드는 방법도 있다.


신안=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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