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서 年7억개 팔리지만···오리온 초코파이 말못할 고민
초코·마시멜로 조합, 러시아인에 신선한 충격
대통령 등 리더들도 티타임에 먹는 간식 홍보
트랜스 지방 없다는 연구로 여성들 안심시켜
'情' '仁' 같은 브랜드콘셉트 찾아내는 게 과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코리아 버거'
한국에서 만든 햄버거가 아니다. 한국의 국민과자인 오리온 초코파이를 러시아에선 이런 애칭으로 부른다.
러시아의 국민간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전세계 60여개국에서 연간 20억개 이상 팔리지만, 특히 러시아에서 인기가 높다. 마트·대형할인점은 기본이고 기차역과 전철역 매점은 물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도 초코파이를 판매한다. 기차 안에서 초코파이를 간식 또는 식사 대용으로 먹는 러시아인들을 보는 건 흔한 일이다.
러시아 시장은 오리온 초코파이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초반 부산을 중심으로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 사이에 초코파이 구매 붐이 일면서 초코파이가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오리온은 93년 러시아에 초코파이를 직접 수출하기 시작했고, 2006년 뜨베리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현지공략 시대를 열었다. 현재 뜨베리와 노보, 두 곳에서 공장을 가동중인데, 러시아를 기점으로 유라시아 시장 공략을 위해 뜨베리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러시아에서 한 해에 팔리는 초코파이 개수는 2017년 7억개를 넘어섰다. 올해 매출은 8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동종 카테고리에서 60% 이상의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왜 이토록 초코파이를 사랑하는 걸까. 러시아인들이 초코파이의 맛을 보기 시작한 게 90년대 초반이면, 입맛 변화 등 여러 요인으로 인기가 꺾일 법도 한데, 여전히 초인기 상품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특성에 맞는 제품이라는 점 외에 오리온의 현지화 마케팅이 시대에 맞게 진화하며, 러시아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초코파이는 소련 공산체제가 붕괴되면서 커지기 시작한 소비재 산업, 특히 식음료 시장을 타이밍 좋게 공략했다. 군수산업·중공업을 우선시했던 소련 공산체제에선 소비재 산업의 기반이 약했는데,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각국의 식음료와 간식들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초코파이만의 매력적인 맛이 러시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오리온 러시아법인의 강정훈 부장은 "초코파이는 마시멜로를 러시아에 처음 소개한 제품"이라며 "미국인들이 즐겨먹는 마시멜로가 들어있어 초기엔 초코파이를 미국 과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초콜릿과 마시멜로의 조합이 러시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는 설명이다.
러시아에서 일반적인 벌크 포장이 아닌, 낱개 포장으로 돼 있는 점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큰 몫을 했다. 모스크바 시민 알리예바 알투나이 씨는 "초코파이 맛의 핵심은 마시멜로다. 낱개 포장으로 돼있어 편리하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알렉산더 루자예프 씨는 "초코파이는 갖고 다니기에 편하고 하나만 먹어도 배부르다"고 했다.
러시아인의 독특한 티타임 문화에 잘 어울리는 과자라는 점도 주효했다.
혹한의 날씨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차를 계속 데워 따뜻하게 마시는 문화가 있는데, 너무 자주 데우다보면 차가 졸아 쓴 맛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차를 마실 때 단 것을 많이 곁들여 먹는다.
특히 초콜릿을 매우 좋아하는데, 러시아 식료품 가게에는 초콜릿과 술이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초코파이는 이같은 러시아인의 문화적 특성을 파고 들어,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했다. 초콜릿 코팅이 돼있는 달콤한 초코파이와 함께 차를 마시면 차의 쓴 맛이 중화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적극 홍보했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카라폐탼 카리나 씨는 "초코파이는 초콜릿과 마시멜로의 조화가 환상적"이라며 "차를 마실 때 늘 찾게 된다"고 말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차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나코녜치나야 카리나)는 반응도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1년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현 총리)이 초코파이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이 외신 사진을 통해 전세계에 소개돼 큰 관심을 끌었다. 초코파이로선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린 셈이다.
이에 오리온은 초코파이가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티타임에 먹는 간식임을 강조했고, 가격도 그에 걸맞게 유사제품보다 20~30% 높게 책정했다.
오리온은 또 러시아 여성들의 가장 큰 고민이 비만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리고 2011년 러시아 학술원 의학연구소와 함께 초코파이가 포함된 균형잡힌 아침식단을 개발했다.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국립대에 연구를 의뢰해 "초코파이에는 비만의 근원인 트랜스 지방이 없다"는 연구결과도 발표했다. 전세계적으로 부는 건강식 열풍을 감안해 선제적으로 '내츄럴 앤 헬시(natural and healthy)' 마케팅을 전개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최근에는 베리 쥬스를 즐겨마시는 러시아인들의 입맛을 겨냥해 '초코파이 라즈베리' '초코파이 체리' 등의 신제품을 출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대식 여시재 연구실장(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러시아 현지 문화와 러시아인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이를 마케팅 전략에 적극 반영한 오리온 현지 주재원들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에서 초코파이가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초코파이가 거둔 초기의 성공은 제품 속성이 러시아인들의 입맛·문화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지만, 30년 가까이 사랑받는 건 시의적절한 마케팅 전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초코파이가 이처럼 날개돋힌 듯 팔림에도 불구하고 오리온 러시아법인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있다. 제품을 대표할 콘셉트가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초코파이 하면 떠오르는 게 ‘정(情)’일 정도로, 이를 제품 포장지에 쓰고 이와 관련한 광고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브랜드 콘셉트화에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정(情)이 각별하다면, 중국인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인(仁)이다. 오리온은 이 점에 착안해 2008년 말부터 중국에서 판매되는 초코파이 포장지에 ‘인(仁)’을 새겨넣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2009년부터 현지어로 정(情)을 의미하는 ‘Tinh’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이처럼 한 단어로 압축해 마케팅에 활용할 만한 정서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때 무뚝뚝하지만 믿음직한 'Cool Friend(멋진 친구)' 이미지를 채택해 포장과 광고 등 마케팅에 적용했지만, 지속적인 캠페인으로 끌고 갈 만한 임팩트는 없었다.
오리온 러시아법인의 차찬모 수석 총괄매니저는 "정(情)이나 의리 같은 개념은 러시아어로 바꾸기 어렵다"며 "러시아인들이 초코파이 하면 쉽게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는 브랜드 콘셉트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대신 오리온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성향을 고려해 다같이 초코파이를 나눠먹는 단란한 모습을 광고를 통해 연출하고 있다. 엄마와 딸의 마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초코파이, 가족 간의 이해와 사랑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의 초코파이를 따뜻한 톤으로 그려냈다.
다른 나라들처럼 러시아에서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제품을 강조하는 광고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오리온 측은 밝혔다.
모스크바=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9 KPF 디플로마 '러시아전문가' 과정 참여 후 제작되었습니다.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