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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식물이 위로해주는 시대


[더,오래] 김정아의 식(植)세계 이야기(10)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식물들이 잘 지냈는지 화분부터 살핀다. 실내 식물이 춥거나 건조하지는 않은지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고, 열대관엽식물을 위해 가습기 등도 준비해준다. 수십 개 넘는 화분 물시중을 들다가 뒤늦게 허리통증을 자각한다. 때로 원하는 희귀식물이나 화분을 구하기 위해 판매 전날 밤부터 가게 앞에서 줄을 선다. 요즘 식물에 빠진 식집사, 식덕의 일상이다. 왜 식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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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사진. [사진 김정아]

물론 식물이나 화분이 재테크 대상으로 떠오른 세태도 가드닝 인구가 늘어난 이유 중 하나다. ‘핫’하다는 희귀 필로덴드론 종류나 알보몬스테라, 무늬아단소니 같은 희귀식물은 번식해 마디마디 잘라 팔면 살 때보다 몇 배 높은 이익을 거둘 수 있다. 가드닝 인기에 덩달아 수요가 폭등한 국산 화분 중 인기 브랜드는 곰팡이가 생긴 토분까지도 구매가격보다 비싸게 중고시장에서 거래된다. 식물에 관심 없던 사람도 가격이 오르는 희귀식물을 처음부터 팔기 위해 키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꽤 많은 식덕이 식물을 단지 재테크 대상, 혹은 심미적 관상이나 인테리어 수단을 넘어 자신의 삶에 큰 의미를 가지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삶 그 자체라고 말하는 식덕도 있다. 실제로 재테크가 안되는 이른바 ‘흔둥이’ 식물이나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베란다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공통으로 살면서 겪은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식물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경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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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103’이라는 원예업체를 운영하는 손리은 씨는 반려견을 희귀 질환으로 잃고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에 식물 키우기에 몰두하게 됐다고 한다. 아픔을 잊기 위해 시작하다 보니 가드닝에 집중하게 되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키우는 사람이 드물었던 희귀관엽식물을 혼자 공부해가면서 이리저리 구하고 키워왔다. 치유에서 시작한 가드닝이 어느새 본업이 되었고 그는 현재 국내에서 손꼽히는 희귀식물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됐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적 고통의 끝에서 반려동물 혹은 반려식물을 돌보면서 정신질환이 크게 호전된 사례도 온라인 식물커뮤니티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직장 다니면서 집에서 300개 가까운 식물을 돌보는 A씨의 경우 수년 전 중증우울증을 진단받았다. 증세가 나아지지 않아 입원치료까지 권유받은 2년 전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식물 키우기를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우울증이 경증으로 크게 호전됐고 스스로 식물이 자신의 삶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의학적으로도 식물을 키우는 것이 사람의 건강을 긍정적으로 개선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2017년 3월 출간된 예방의학저널 ‘Prevention Medicine Reports’ 에 따르면 소가 연구팀은 2001년 이후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에서 발표된 ‘가드닝이 사람의 건강에 미치는 효과’를 주제로 쓴 22개 논문을 모아서 메타 분석(동일한 주제로 연구된 연구물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방법. 개별 연구보다 표본 수가 크게 늘어 통계적 정밀도가 높아짐)했다. 소가 연구팀이 이들 논문을 분석한 결과 ‘가드닝은 우울증, 불안증, BMI(체질량지수) 감소 등 인간의 건강과 관련된 다양한 병증에 현저한 개선 효과를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같은 정신건강 쪽에서 가드닝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건 예상할 수 있던 결과지만 체질량지수와 같은 신체적 개선 효과까지도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는 의외였다. 이 발표에는 ‘매일 정기적으로 자연과 접촉하는 것이 우울증, 불안증과 같은 정신건강뿐 아니라 당뇨병, 비만 심혈관질환, 수명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인용돼 있다. 식물 자체를 좋아해 식집사가 된 사람도 식물을 통해 받는 정서적 안정이나 스트레스 치유 효과, 가드너와 식물이 함께 성장해가는 성취감 등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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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집사 이종호 씨의 갤러리 정원. [사진 김정아]

단지 녹색이 좋아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종호 씨는 대학원 논문도 식물 관련 콘텐트로 썼으며, 향후 식물 관련 비즈니스도 준비 중이다. 그는 식물이 커가는 게 사람과 같아서 “식물을 키우며 자신도 성장하고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국보급 알보몬스테라 대품을 키워내는 거로 유명한 블로거 오션은 “10년 전 독립사업체를 차렸을 때 들어온 축하 화분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돌보다가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해가 잘 드는 자신의 갤러리 정원에서 관엽식물을 키우는 그는 “사람과 달리 식물은 정성 들인 만큼 보답한다”며 식물 덕분에 스트레스도 풀고 힐링이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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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오션 사무실의 초대형 알보몬스테라. [사진 정호성]

나도 평생 살면서 가장 큰 실망과 분노, 충격, 배신과 같은 상황으로 피폐해진 시기를 보내고 작년 봄에 처음으로 식물 키우기에 몰두했다. 억지로 잠들고 깨는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베란다 텃밭은 집중해야 했다. 식물이라는 새로운 우주에 빠져들면서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마음의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마디 한 토막에 수분만 공급해줘도 뿌리와 새순을 만들어내는 관엽식물과 잎이 죽어가면서도 열매를 키워내는 베란다 방울토마토는 포기나 좌절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인간보다 훨씬 먼저 이 지구에 정착해 진화해온 식물은 어쩌면 지구에서 생존하는 법을 인간보다 훨씬 더 잘 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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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스리움 폴리쉬스툼이 새 잎을 올리는 모습. [사진 김정아]

대다수의 사람이 낯설고 힘든 글로벌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다. 아파트나 주식 등 보유 자산의 가치 폭등으로 즐겁거나, 눈치작전 성공으로 미달이 발생한 명문대 최상위권학과에 합격한 수험생처럼 지금 행복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은, 일 년 가까이 거리에 사람이 없는 벼랑 끝 상황에서 폐업으로 몰리는 자영업자, 취업이 안 돼 영하의 날씨만큼 마음이 추운 청년과 실업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입시로 괴로운 수험생일 것이다.


끔찍한 아동학대 같은 드문 ‘악’이 아니어도 타인을 할퀴고 괴롭히는 평범한 ‘악’의 실천자는 포털의 익명 댓글, 콜센터 전화, 아파트 경비원을 대하는 입주민 등 여기저기 넘쳐난다.


모두 다양한 이유로 힘들고, 타인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때다. 과학 기술과 파시즘에 관한 풍자적 희곡 ‘R.U.R’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는 가드닝 분야의 명저 『정원가의 열두달』에서 “인간이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 (중략)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썼다. 상처가 많아 위로가 필요한 시대, 작은 초록색 식물과 손바닥만 한 정원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 아닐까.


전 금융투자협회 상무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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