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연기하다 '대권'까지…우크라이나 코미디언의 역전드라마
정치 신인 젤렌스키 1차 최다 득표
드라마 인기 힘입어 창당하고 출마
현직 대통령 방산 비리에 당선 유력
"지지 기반·정책 없는 반짝 인기" 우려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가 진짜 대통령이 됐다?
곧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인데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투표에서 41살에 정치 경력이 전무한 그가 현직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 후보(15.94%)를 누르고 최다 득표율(30.23%)을 기록했습니다.
과반을 차지한 후보가 없어 오는 21일 젤렌스키는 2위 포로셴코와 함께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됩니다. 1차 투표에서 다른 후보를 크게 앞선 데다, 포로셴코 대통령 측근의 방산 비리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젤렌스키의 당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유명 TV 드라마 '국민의 종' 포스터. 젤렌스키는 이 드라마에서 정치에 도전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고등학교 교사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유튜브] |
소비에트연방 시절인 1978년 현재 우크라이나 땅에서 태어난 젤렌스키는 17살에 러시아 코미디 TV쇼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러브 인 더 빅 시티’, ‘스바티’ 등 TV 코미디 시리즈 영화에서 주요 배역을 맡거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는데요. 그를 ‘국민 배우’로 만든 작품은 2015년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국민의 종(從)’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부패한 정권을 비판하는 영상으로 SNS 스타가 된 고등학교 교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극 중 대통령이 되죠.
그가 진짜 대통령이 된다면, 드라마가 현실이 되는 셈입니다.
젤렌스키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은 2013년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로마이단(Euromaidan) 운동’이 시작됐는데요. 유로마이단이란 당시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EU)과의 무역 협정을 무기한 연기함과 동시에 친러시아 경제 정책을 천명하자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반발해 일으킨 저항 운동을 의미합니다. 2004년 이른바 '오렌지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야누코비치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이지만 이번엔 부정선거 규탄이 목적이 아니라 친러 정부를 향해 친서방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였습니다. 젤렌스키는 이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친서방파 안에서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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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젤렌스키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제목에서 이름을 딴 ‘국민의 종 당’을 창당했습니다. 당이 여론조사에서 기성 정당 못지않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자 젤렌스키는 지난해 12월 이 정당 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전문가들은 기성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아웃사이더 정치 신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분석합니다. 기득권 엘리트 정치에 대한 불신이 젤렌스키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는 것이죠. 파이낸셜타임스는 국민들이 최근 방산 비리 등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포로셴코 대통령 대신 드라마에서 정의로운 대통령 역할을 맡은 젤렌스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현 대통령인 포로셴코(왼쪽)와 젤렌스키 [AFP 연합뉴스] |
젤렌스키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해줄 참신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서는 '젤렌스키 돌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기성 정치에 신물 난 국민으로부터 반짝인기를 얻었을 뿐 탄탄한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이죠. 영국 BBC는 젤렌스키에게는 강력한 정치적 견해나 공약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망명 중인 우크라이나 금융 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유착 관계라는 의혹도 그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죠.
우크라이나에서 최초의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또 그가 당선된다면 EU 가입과 부정부패 척결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이목이 쏠린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은 오는 21일 치러집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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