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미당의 시처럼 걷다
팔도 이야기 여행 ⑤ 전북 고창 서해랑길
하늘에서 내려다본 고창 안현 마을. 멀리 줄포만 갯벌과 부안 변산이 내다보인다. |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인데 수상한 가을이다. 하늘이 분명 높아졌는데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맵다. 여름 끝자락이라고 하기엔 추석이 지척이고, 가을 들머리라고 하기엔 산야가 아직 푸르다. 9월 7, 8일의 전북 고창도 그러했다. 초록으로 반짝이는 선운사 동백 숲에서 막 봉우리 터뜨린 꽃무릇 한 송이를 만났다. 붉디붉은 가을꽃을 들여다보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계절에 들어서고 있음을 새삼 알았다. 고창에 내려가 긴 길을 걸었다. 길모퉁이마다 밴 이야기가 절절했다.
면적 55㎢, 끝 안 보이는 갯벌
고창 갯벌의 황금빛 석양. |
고창은 서해와 맞닿은 고장이다. 하여 서해안 종주 트레일 서해랑길이 지난다. 전남 해남에서 시작한 서해랑길이 인천 강화도까지 장장 1800㎞가 이어지는데, 전체 109개 코스 중에서 3개 코스(41~43코스)가 고창을 거친다. 구시포 해변에서 고창 갯벌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방향을 틀어 선운산 자락에 들었다가 나온 뒤 다시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북진해 부안 땅으로 접어든다. 고창 구간의 길이는 49.9㎞. 선운산을 넘어야 해서 사흘은 잡는 게 적당하다.
고창의 서해랑 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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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이 지나는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이다.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2021년에는 부안 땅과 마주 보는 줄포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지정됐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갯벌의 면적은 55.31㎢. 서해랑길 구간으로 보면 고창갯벌센터가 있는 만돌 해변에서 시작해 부안 땅 앞까지다. 고창갯벌센터 앞에 서해랑 쉼터가 있다.
해거름 갯벌로 나갔다.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었지만, 모래 갯벌이 워낙 넓어 한없이 거닐 수 있었다. 일행을 안내한 ‘주민공정여행사 팜팜’의 김수남(56) 대표가 해지는 대죽도 너머를 가리켰다.
김경진 기자 |
“저기 대죽도 넘어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이 위도입니다. 갯벌 건너편 벽처럼 서 있는 산이 변산이고요. 다 부안 땅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행정구역이 무의미해진다. 편 가르고 살았던 날도 지나고 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가을 하늘이 금세 새빨개졌다.
시로도 유명한 선운사
선운사 경내에 핀 꽃무릇. 9월 7일 촬영했다. 선운사 꽃무릇은 9월 하순 절정에 이른다. |
선운산(334.7m)은 낮은 산이지만, 이름난 산이다. 선운산이 품은 선운사 덕분이다. 봄에는 동백꽃으로, 가을에는 꽃무릇과 단풍으로 선운사는 붉은 물이 든다.
선운사는 시로도 유명한 절집이다.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선운사 동구’ 부분)는 선운사 건너편 질마재 마을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것이고,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선운사에서’ 부분)이라고 노래한 시인은 최영미다.
선운사 진흥굴. |
미당은 선운사를 자주 들렀었다. 미당이 선운사에 들르면 늘 묵던 숙소가 남아있다. 옛날에 ‘동백장’으로 불렸던 동백호텔이다. 미당은 동백장에서도 201호에서만 묵었다. 생전의 미당이 “소쩍새 소리 잘 들리는 방을 달라”고 해서 내준 방이란다. 오랜만에 들른 동백호텔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었다.
선운사와 도솔암을 잇는 숲길에서 막 피어난 꽃무릇 한 송이를 발견했다. 아직 철이 이른데, 용케도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선운사 경내가 꽃무릇으로 붉게 물드는 시기는 9월 하순이다. 꽃무릇이 지고 나면 선운사 주변은 다시 단풍으로 붉어진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다
선운사에서 나와 질마재를 넘었다. 질마재는 소요산(445m) 자락에 걸친 고개 이름이다. 질마재 아래가 질마재 마을이다.
“소요산 자락에서 큰 인물이 여럿 나왔지요. 신흥종교 보천교를 만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차경석,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가 다 근방에서 태어났지요. 녹두장군 전봉준의 아버지가 소요산을 한입에 삼키는 태몽을 꾸고 전봉준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요.”
서해랑길 고창 구간을 함께 걸은 ㈔우리땅걷기 신정일 이사장과 주민공정여행사 팜팜의 김수남 대표(왼쪽). |
이틀 내내 함께 걸었던 ㈔우리땅걷기 신정일(69) 이사장의 설명이다. 『신택리지』를 쓴 신정일 이사장은 “산 좋고 물 좋고 땅 좋은 고창은 예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고장이었다”고 말했다.
미당시문학관에 들어서는 도보여행자들. |
질마재 마을에 내려왔다. 미당이 살았던 생가가 말끔하게 복원돼 있다. 미당이 환갑에 펴낸 시집 『질마재 신화』는 사실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미당 특유의 언어로 되살린 것이었다. 『질마재 신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제 마을 주민이다. 시집에 나오는 외가 터는 물론이고 서당·빨래터·우물도 남아있다.
미당시문학관에 들어섰다. 시성(詩聖)으로까지 추앙받던 시인이 친일파로 낙인 찍힌 뒤 문학관을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 전망대 옥상에 올라 건너편 안현 마을을 내다봤다. 국화꽃 벽화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안현 마을 뒷산에 미당이 누워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른 가을날이어서 미당이 누운 산 너머 줄포 갯벌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인의 노래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내려왔다.
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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