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그림 30년 민정기 “산길 물길 바람길 모두 역사다”
칠순의 풍경화가가 본 우리 땅
인왕산·양평 등 굽이굽이 다녀
전통 수묵화 닮은 현대적 화풍
실제인 듯 아닌 듯 묘한 긴장감
남북정상회담 ‘북한산’ 화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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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 물세 등 지리 형상과 배치에 무게를 실은 그의 풍경화는 친근해 보이면서도 막상 다가가 보면 새롭고 독특해 보인다. 서울 사직단 인근의 주상복합빌딩과 가로수, 산 정상의 손톱 만한 막사까지 놓치지 않고 그릴 정도로 디테일 묘사가 치밀한가 하면, 마치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점으로 묘사한 산세는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의 경관을 담은 고지도 같고, 또 전통 산수화나 민화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어떤 작품들은 아예 반추상화처럼 현대적인 느낌이 강렬하다.
◆풍경의 재구성= 구작 21점과 신작 14점 등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작 중 그가 유난히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 있다. 6개의 화폭으로 구성된 ‘인왕산’이다. 큰 화면에 풍경 하나를 담는 대신 위에 배치한 세 폭엔 산자락을, 아래 세 폭엔 주차장과 공사터, 기와집과 빌딩 등 복잡하고 친근한 도심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작가는 “도시와 산자락을 함께 담고 싶었다”며 “이것은 내 시선으로 풍경을 정리한 콜라주”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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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1972년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에 손장섭·임옥상·오윤 등과 함께 민중미술운동 그룹인 ‘현실과 발언’을 창립했다. 1987년 작업실을 양평으로 옮기며 풍경화 그리기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는 지리학자인 최종현(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와 함께 전국 곳곳을 답사하며 지형과 건축, 역사 문헌 자료를 탐구했다. 풍경화를 그리되 뻔하지 않은 그림,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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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연구로 빚은 그림= 그에 따르면 30년 넘게 풍경화를 그리는 일은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장 로비에 걸린 그의 산수화 ‘북한산’(2007·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 그림을 보고 “이것은 어떤 기법으로 그린 그림입니까?”라고 물으며 관심을 표해 화제를 모았다.
북한산 응봉에서 보고 그린 이 그림 역시 과거와 현재, 여러 시점에서 본 풍경이 한 화면에서 겹쳐 있다. “풍경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역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것은 회고 취미가 아니라 역사와 물길, 사람 길을 통해 지금 현재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유화인데도 옅은 수채 물감을 겹쳐 바른 듯 투명한 빛의 질감으로 가득 차 있다.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시 외곽 풍경, 역사로 얼룩진 흔적 등을 그려도 차갑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대신 작가는 자신이 역사를 끌어와 재구성한 풍경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만히 응시하게 이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는 민정기처럼 철저히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관객들은 그렇게 객체로 고정된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왠지 모르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 이유다. 그는 또 저서 『안목』에서 “민정기는 화폭에 땅의 원형질과 역사를 담아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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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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