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낭만, 3주 뒤엔 못 본다…연 40만명 찾는 '인제 자작나무 숲'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겨울이 가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다. 눈 덮인 하얀 산에 잎이 모두 져 하얀 수피를 드러낸 나무가 어우러져 순백의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승표 기자 |
어느새 겨울 끄트머리다. 물론 진짜 끝은 아니다. 꽃샘추위도 찾아올 테고, 눈도 몇 차례 더 내릴 것이다. 그러나 매섭던 겨울의 기세가 꺾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남쪽에서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떠나는 겨울이 아쉬우신가. 그렇다면 자작나무를 만나러 가자. 눈 덮인 숲에 새하얀 줄기가 도열한 순백의 자작나무 숲 말이다. 한대지방이 고향이어서일까, 하얀 수피가 눈과 닮아서일까. 겨울 자작나무 숲에선 북방의 정서가 느껴진다.
아이젠 차고 1시간 등산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겨울에 임도 코스만 개방한다. 주차장에서 약 1시간 걸으면 숲에 닿는다. 최승표 기자 |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를 찾았다. 목적지는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동홍천 IC를 빠져나가 44번 국도로 접어드니 주변 산이 온통 하얬다. 상고대가 연출한 겨울 풍경이다. 서울의 회색빛에 익숙했던 눈이 갑자기 환해졌다.
자작나무 숲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젠을 찼다. 자작나무 숲은 주차장에서 3.2㎞, 약 1시간을 걸어 올라야 한다. 자작나무 숲까지 이어진 임도는 눈이 많이 쌓인 데다 곳곳이 얼어 있어 아이젠 착용이 필수다. 설악산 대청봉 가는 차림으로 중무장한 등산객이 있는가 하면, 마실 나온 것처럼 가벼운 차림인 사람도 여럿 보였다. 안내소 앞 상점에서 아이젠을 빌리는 사람이 많았다. 대여료 5000원 중 보증금 2000원은 돌려준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1989년부터 산림청이 가꾼 인공 조림지다. 2012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최승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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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은 해발 500m, 자작나무 숲은 원대봉 정상부 해발 약 800m에 자리한다. 고도차 300m 정도면, 서울 아차산(287m)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등산은 질색이라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오르막이 완만해 경치 감상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닿는다. 자작나무 숲까지 가는 길은 모두 8개다. 겨울에는 안전을 생각해 '원정 임도' 코스 딱 하나만 개방한다.
자작나무 숲에 가거든 바쁘게 기념사진만 찍지 말고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고 하늘도 올려보길 권한다. 잎을 모두 떨군 하얀 나무가 쭉쭉 뻗은 모습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는 기분이다. 최승표 기자 |
코스 초반부터 길 주변에 자작나무가 듬성듬성 보였다. 예고편에 불과한 풍광을 보고도 사람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산악회와 함께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는 박윤정(54)씨는 "빙어축제(1월 29일 종료)도 즐길 겸 인제를 찾았다"며 "다른 계절에도 와봤지만 자작나무 숲은 역시 겨울이 최고"라고 말했다.
국가 대표 관광지로 떠오른 숲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북유럽의 어느 깊은 숲을 보는 것 같았다. 최승표 기자 |
아이젠을 착용한 지 정확히 1시간 만에 정상부에 닿았다. 소나무·참나무 일색이던 주변 풍광이 별안간 바뀌었다. 방문객 모두 아이처럼 소리쳤다. 눈 바닥에서 뒹굴고, 자작나무 어루만지고, 자작나무를 엮어 만든 인디언 집에서 기념사진 찍느라 다들 여념이 없었다. 동남아에서 온 여행객도 많았다. 말레이시아 국적의 친텍완은 "한국의 겨울은 춥지만 정말 멋지다"이라며 "자작나무 숲은 '환상' 그 자체"라고 말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진 명소 인디언 집. 자작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최승표 기자 |
외국인도 찾아오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불과 11년 전에 개방했다. 화전과 솔잎혹파리 떼로 황폐했던 산자락에 1989년부터 산림청이 자작나무를 심었다. 소나무 일색이던 강원도 산에 자작나무 약 70만 그루를 시험 조림했는데, 어느덧 20m가 넘게 자라 무성한 숲을 이뤘고 한국을 대표하는 생태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2019년 43만 명이 찾았고,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때에도 해마다 20만~30만이 방문했다. 2년마다 선정하는 '한국 관광 100선'에 2015년부터 5번 연속으로 들기도 했다
옛날 원대막국수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 인근에서 45년째 막국수를 팔고 있다. 곰배령에서 땄다는 곰취를 곁들인 수육 맛도 출중하다. 최승표 기자 |
여러 무리의 탐방객이 먼저 하산하길 기다렸다. 비로소 고요해진 숲에서 나무를 차분히 느꼈다. 줄기를 만져보니 화선지처럼 부드러웠다. 바람이 불어오니 잎을 떨군 가지끼리 부딪치며 탁탁 장작 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득히 먼 북방의 숲, 동화 속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자작나무를 볼 때면 늘 묘한 감상에 빠진다.
다시 1시간을 걸어 내려왔다. 하산한 뒤에는 막국수 한 그릇 먹는 즐거움을 놓칠 수 없다. 1978년 개업해 3대째 이어온 '옛날 원대막국수'가 숲 인근에 있다. 메밀 향 구수한 막국수(9000원)를 호로록 들이키고, 곰배령에서 땄다는 곰취를 곁들인 곰취 수육(2만원)을 입에 담을 때마다 감탄이 터진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지 않는다. 월·화요일에는 입산을 통제하고, 3월 2일부터 4월 30일까지는 산불 조심 기간이어서 숲을 폐쇄한다. 한 달도 안 남았다.
■ 태백·양평·영양…자작나무숲 이렇게 많았어?
자작나무 숲 하면 대부분 강원도 인제를 떠올린다. 자작나무가 많을 뿐더러 길 관리나 주차장 같은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서다. 그러나 인제 말고도 대한민국 구석구석에는 자작나무 군락지가 여러 곳 더 있다. 덜 알려졌을 뿐, 인제보다 더 넓은 자작나무 숲도 있다.
우선 자작나무는 강원도에 많이 산다. 춥고 건조한 지역을 좋아해서 산림청이 영서지방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걷기 여행도 즐기고 자작나무 군락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지난해 10월 개장한 '운탄고도1330' 가운데 6길 태백 구간을 찾아가면 된다. 오투리조트 인근 '지지리골'에 약 20만㎡(6만 평)에 이르는 자작나무 숲이 있다. 1993년 함태탄광이 문을 닫은 뒤 조성한 인공림이다.
경북 영양군 죽파리에 국내 최대 규모의 자작나무 숲이 있다. 1993년부터 산림청이 가꾼 인공 조림지다. 사진 영양군 |
2021년 공식 개통한 '치악산둘레길'에도 자작나무길이 있다. 원주 신림면 구학리에서 판부면 금대리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임도에 줄지어 선 자작나무를 볼 수 있다. '육백마지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평창 청옥산 8부 능선에도 자작나무가 많다. 자작나무가 빽빽해 풍광은 멋지지만 주차장이 협소하고, 숲의 경사가 급한 건 단점이다.
수도권에도 유명한 자작나무 숲이 있다. 경기도 양평군에 자리한 개인수목원 '서후리숲'이 대표적이다. 방탄소년단이 달력 화보를 찍어 유명해져 ‘방탄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가족이 20년 세월에 걸쳐 30만㎡(약 9만 평) 규모의 숲을 가꿨는데 수목원 정상부에 자작나무 군락이 있다. 입구에서 약 30분 걸으면 자작나무가 보인다. 12월부터 2월까지 문을 닫고 3월부터 이용할 수 있다.
따뜻하고 습한 환경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작나무는 중부 이남에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의외로 가장 넓은 자작나무 숲이 경상북도에 있다. 영양군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30만㎡ 규모로 축구장 40개 면적에 달한다. 6만㎡인 인제 원대리보다 훨씬 넓다. 1993년 산림청이 인공 조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3.2㎞를 걸어야 하는데 거의 평지에 가깝다. 아직 인프라는 부족하다. 영양군은 방문자센터를 비롯한 기반시설을 점차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최승표 기자
인제=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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