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남자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2020년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는 고교 야구팀에서 유일한 여자 선수이자 천재 야구소녀로 불리는 주수인이 프로선수 선발 과정에서 성별 차이로 겪는 어려움을 그린다. 구단이 주수인에게 여자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선수가 아닌 프론트(구단을 운영하는 조직) 직원을 제안하자 이렇게 말한다.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
주수인은 한국여자야구 선구자 역할을 한 안향미씨를 모티브로 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한 안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여성은 선수로 등록할 수 없다”는 야구 협회와 싸워 선수 자격을 얻어냈다. 1996년 체육특기자로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야구선수는 남자에 한한다”는 교육청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 안씨의 노력으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1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만든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한다”는 규정을 없앴다. 1999년 안씨는 여성 최초로 KBO에서 주최하는 경기에 출전했다. 안씨 같은 스포츠 종사자뿐 아니라 남성 중심으로 여겨지는 직업에서 여성 최초를 기록한 사람을 찾아봤다.
현대상선 전경옥 선장, 고해연 기관장
2013년 국토해양부와 국제해사기구(IMO)는 전 세계 선원 150만명 중 여성 해기사(海技士) 비율이 1~2%라고 발표했다. 해기사는 선박 운항 등 분야에서 국가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다. 국내에서는 해운회사가 여성 채용을 기피하면서 해사고등학교 등 관련 학교에서 여학생 입학 정원을 제한하는 일도 있었다. 2019년 12월 국내 해운 회사 현대상선이 업계 최초로 여성 선장과 기관장을 임명해 화제를 모았다.
현대상선 전경옥(왼쪽) 선장, 고해연 기관장. /현대상선 제공 |
현대상선이 선장에 임명한 사람은 승선 경력 13년차인 전경옥(40)씨다. 선장은 선박에서 승무원을 지휘·통솔하고 선박 운항과 선적 화물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전 선장은 2005년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경찰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3등 항해사로 현대상선에 입사해 2006년에는 2등 항해사, 2008년에는 1등 항해사로 승진했다. 입사 후 벌크선(석탄·철광석·곡물 등 원자재를 나르는 배)을 탄 1년을 빼고 컨테이너선만 탔다. 컨테이너선은 컨테이너박스에 완제품을 실어 운반하는 선박이다.
여성 최초 기관장은 고해연(36)씨다. 기관장은 선장을 보좌하면서 선박 전체를 책임지는 임무를 맡는다. 고 기관장은 2008년 한국해양대학교 기관시스템공학부를 졸업하고, 현대상선에 3등 기관사로 들어갔다. 2011년까지 2등,1등 기관사로 승진했다. 입사 11년 9개월 만에 기관장으로 뽑혔다. 전 선장과 마찬가지로 고 기관장은 컨테이너선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4600TEU급부터 국내 최대 크기인 1만 3100TEU급 선박까지 두루 경험했다. TEU는 약 6m 길이 컨테이너 1개를 나타내는 단위다.
해양경찰청 역대 두번째 여성 총경, 고유미 경비과장
바다를 지키는 해양경찰에도 있다. 2021년 해양경찰 총경 승진 임용 명단에 오른 중부청 고유미(41) 경비과장이다. 총경은 경무관과 경정 사이인 계급으로 중간급 간부에 해당한다. 공무원으로 치면 4급 서기관, 소방관의 소방정, 국군의 대령(연대장)과 같다. 고 팀장은 역대 두번째 여성 총경이다. 고 과장에 앞서 2017년 8월 총경으로 승진한 박경순(58) 울진해양경찰서 서장이 여성 최초 총경으로 주목받았다.
해양경찰청 총경 고유미 중부청 경비과장. /해양경찰청 제공 |
고 과장은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경찰학과 졸업 후 2002년 해양경찰에 들어갔다. 2013년 해양경찰 창설 60년만에 첫 여성 함장을 맡았다. 2018년 해양경찰청 감찰팀장을 거쳐 2019년 1월부터 감사팀장으로 근무했다. 고 과장은 새로운 직책을 맡을 때마다 여성 최초라는 기록을 세웠다.
최우수기관사 ‘탑콘’, 인천교통공사 배윤경 대리
열차를 운행하는 여성도 있다. 인천교통공사 배윤경(29) 기관사는 2016년 입사했다. 인천1호선 본선열차를 운행해 13만km 무사고를 달성했다. 작년에는 여성 최초이자 최연소로 최우수기관사 ‘탑콘(Top-Con·Top master Controller)’으로 뽑혔다. ‘탑콘’은 무사고 실적 3만km 이상인 기관사 중 이론·실기·업무수행실적 등을 합한 성적이 상위 10%인 사람이다.
인천교통공사 승무지원팀 배윤경 대리. /인천교통공사 제공 |
인천교통공사는 인천1호선 개통 이후 매년 선발대회를 열어 ‘탑콘’을 선발했다. 앞서 배 기관사는 2018~19년 2년 연속 우수기관사로 뽑히기도 했다. 서울, 부산 등 지자체 지하철 운영기관에서도 우수 기관사를 선정하지만 여성이 뽑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인천교통공사 전체 기관사 182명 중 여성은 15명으로 약 8%를 차지한다. 배 기관사는 2021년 초 승무지원팀으로 발령 받아 고장·장애 등 비상상황에서 기관사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소방청 소방준감 고민자 소방분석제도과장
전체 소방공무원 6만1034명 중에서 9.3%를 차지하는 여성이 가장 높이 오른 직급 소방정(4급)이었다. 2021년 소방청 고민자(56) 소방분석제도 과장이 이 기록을 깼다.
소방청 소방준감 고민자 소방분석제도과장. /소방청 제공 |
소방 조직에서 여성이 소방준감 이상 고위직에 오른 건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내무부 치안국 소방과를 설치한 이후 73년만이다. 여성이 소방직에 처음 진출한 1973년 이후로는 48년만이다. 소방준감은 소방총감·소방정감·소방감에 이어 네번째로 높은 계급이다. 경찰의 경무관이나 일반직 공무원 3급 부이사관에 해당한다.
고 과장은 1984년 소방사 공채로 들어와 38년째 근무 중이다. 2016년 제주도 최초로 여성 소방서장을 맡았다. 2018년 소방청 중앙119구조본부 상황실장으로 있을 2018년 보임 시 소방청 최초 과장급 여성 소방 공무원으로 주목받았다. 소방공무원 약 6만명을 국가직으로 전환한 2020년 4월 이후 교육훈련과 채용업무를 총괄하는 교육훈련담당관 신설준비단장 업무를 수행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성시연 지휘자
클래식 지휘자도 남성 중심 성격이 강한 직업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여성 지휘자가 등장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지휘대에 오른 건 1989년 김경희씨가 대전시향을 객원 지휘하면서다. 동양 여성 최초로 독일 베를린국립음대 지휘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여자는 지휘를 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깼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성시연 지휘자.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이후 주목을 받은 지휘자는 성시연(45)씨다. 성씨는 2006년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했다. 다음해에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 137년 역사상 첫 여성 부지휘자로 임명받았다. 2014년에는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발탁하면서 국내 국·공립 오케스트라 첫 여성 단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글 CCBB 박규빈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