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따라, 역사 따라- 북한산 둘레길 : 방학동길&왕실묘역길
서울이라는 이름의 갤러리
총 21구간에 이르는 둘레길 코스 중에서도 이 구간을 찾게 된 이유는 사실 별게 아니었다. 바로 연산군 묘역이 둘레길 20구간인 ‘왕실 묘역 길’에 있어서였다. 사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렇게나 자주 대하던 왕이 건만, 정작 묘소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니… 게다가 그 왕의 묘역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조금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막상 찾아가 보니 도봉구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역사 문화 관광벨트’ 조성과 맞물려 의외로 볼거리가 많은 구간이었다. 찾아간 날은 일제 시대 우리 문화재 보호에 큰 공을 기울이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옥이 개관한지 이틀째 된 날이었고,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한 평생을 헌신하신 함석헌 선생의 기념관도 최근에 개관을 한 직후였다.(아쉽게도 함석헌 기념관은 개관 일자를 잘못 알아 들리지 못 했다.)
어쨌거나 연산군묘를 들리러 가던 길을 수정하여 간송 전형필 가옥부터 방문하였다.
간송 전형필 가옥
간송 전형필 가옥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지하철 4호선 쌍문역 2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도봉 07번’을 타고 방학동 성당 앞에서 하차하면 된다. 성당 골목을 끼고 50m 정도만 올라가면 오른쪽에서 간송 전형필 가옥을 찾을 수 있다. 가옥에 들어서면 왼쪽에 간송 전형필의 부친인 전영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가 수탈해가려던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바로 간송미술관의 그 ‘간송’이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활용하여 10만 석에 가까운 가산을 만들었으나, 이 재산을 다 문화재 수집에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가 그렇게 수집한 소장품들에는 훈민정음해례본(국보 70호), 신윤복의 ‘단오풍정’(국보 제135호) 등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간송의 막대한 재력을 떠올리면 정작 그의 가옥이 너무 소박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번에 개관한 전형필 가옥은 그가 항상 머물던 집이 아니라 원래는 인근의 농장이나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 관리를 목적으로 지은 곳으로 10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부친의 사망 이후 이 집 근처에 묘소를 꾸미게 되면서 제사에 필요한 제구를 보관하고 일기가 좋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등 재실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목조 기와지붕 구조로, 정면 칸과 측면 칸이 ㄱ자형, 단층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전형필 가옥을 나와 조금만 더 비탈을 올라가면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진다. 이 구간은 둘레길 19구간인 방학동 길이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로 1km 조금 못 가면 정의 공주 묘역에 도착할 수 있다.
정의 공주 묘역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왕실 묘역 길이라는 간판이 나오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정의 공주 묘역이 나온다. 정의공주(貞懿 公主)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 공주의 남편인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의 묘가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정의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이두에 관심이 많았으며, 세종대왕에게 한자를 이두로 표기하는 것의 불편함을 이야기해 한글 창제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정의 공주의 남편인 안맹담 가문의 족보인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한다. 비록 정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한글 창제의 숨은 공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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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역
정의 공주 묘역 앞에 있는 큰길을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연산군 묘역이 있다. 연산군 묘역 바로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800~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높이만 해도 24m에 이른다.
바로 그 맞은편에 연산군 묘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시에 능하고, 1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즉위 초기에는 내정과 국방을 다스림에 있어 안정을 가져왔던 젊은 왕. 하지만 생모 윤 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후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다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결국은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연산군은 유배지였던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서 병사하여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요청하여 1513년에 지금의 자리에 이장되었다.
원래 왕족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하는데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 원은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친부모가 묻힌 곳을 말한다.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일컫는데 연산군은 왕이었으나 폐위된 까닭에 묘로 불린다고 한다.
연산군 묘역에는 현재 연산군과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군 부인 신씨를 비롯하여 연산군의 사위인 구문경과 딸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묘소도 함께 있다. 또 태종의 후궁이었던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 묘소도 함께 있는데 원래 의정궁주 조 씨의 묘가 있던 자리에 연산군의 묘를 이장해온 까닭이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문인석, 향로석, 장명 등 등이 잘 남아 있어 조선 전기 능묘의 석조물들을 엿볼 수 있다.
연산군묘를 나와 조금만 더 가면 작은 공원이 있고 연산군묘를 관리하는 재실이 있다. 오래된 약수터도 있으니 목을 축여볼 것.
김수영 문학관
다시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방학로 15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시인 김수영 문학관이 나온다. 문학관을 향한 길가의 벽에는 그의 시구들이 새겨져 있다. 총 4층으로 된 건물로 1층과 2층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1층의 제1전시실은 김수영 시인의 삶의 궤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두었다. 한국 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모더니즘 시학에서 참여시로 넘어가며 현실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담아낸 그의 육필원고들을 엿볼 수 있다. 또 한 편에는 그의 시를 낭독할 수 있는 공간,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에 자주 쓰이던 단어로 직접 시를 써볼 수 있는 공간 등 관람객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2층에 있는 제2전시실은 김수영의 시인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나, 그가 평소에 앉아서 작업을 하던 탁자 등이 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육필 원고들을 직접 대할 수 있다.
뚜벅뚜벅 가도 다 있습니다.
김수영 문학관을 나와 쭉 가면 발바닥 공원이 나온다. 가볍게 산책을 하기 좋은 공간이다. 생각보다는 꽤 먼 길을 돌아다녔다. 그저 연산군묘를 볼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산책인데… 하지만 돌이켜 보면 또 그렇다. 알고 보면 평소에 생각 없이 오가는 곳곳에도 그런 역사가 배어 있는 곳들이 많은 건 아닐지… 별생각 없이 오가다 보니 그냥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가을볕을 따라 산행과 문화를 함께 즐기기 좋은 길이었다.
INFO
1. 간송 전형필 가옥
주소 : 서울 도봉구 시루봉로 149-18
개방 시간 : 09:00~18:00 (매주 월요일 휴무)
2. 연산군묘
주소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호
개방 시간 : 09:00~18:00 (매주 월요일 휴무)
전화 :02-3494-0370
3. 김수영 문학관
주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32길 80
개방 시간 : 09:00~18:00(입장은 17:30까지/ 매주 월요일 휴무)
문의 : 02-2091-5673/ http://kimsuyoung.dobong.go.kr/intro.asp
글,사진 박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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