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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공연기획자 이동근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저는 이동근입니다. 스물아홉이구요. 공연 기획자예요. 공연을 위해 대학로에 집을 구하고 공연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이고  공연을 위해 광고 대행사를 준비 중이에요. 그리고 공연을 위해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어요.

 

중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그 느낌이 그 강렬한 짜릿함이 너무 좋았어요. 그 짜릿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학창시절 내내 남해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연극을 배웠어요. 그 시절에 제 머릿속에는  연극만 있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머릿속에서 연극이 점점 지워졌어요.

 

여러 이유가 있었어요. 연극영화과 입시에 세 번 떨어지기도 했구요. 하하하. 또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요. 그 시기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사지마비가 오셨죠. 길게는 얘기 못 하지만  병원비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저 하나 뿐이었어요.

 

저는 그때 고작 스물한 살이었어요. 스물한 살이 그 엄청난 병원비를 혼자 책임져야 했어요. 미웠어요.  제 주변의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미웠어요.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어요. 심지어 군대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군대도 면제를 받았어요.  저 한 명이 우리 집을 책임져야 된다고 군대에서도 오지 말라고 했어요. 저는 점점 더 미워졌어요.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스물한 살 이후로 제 머릿속에서 연극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지고 돈이라는 단어만 남았죠. 저는 돈을 벌었어요. 그렇게 7년이 지나고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제 한 달 급여가 2700만 원이 되었어요. 차도 외제차를 샀어요. 세상이 미웠던 만큼  세상을 비웃고 싶었어요. 봤지? 나 이렇게 잘 살아. 나 이렇게 잘 살 수 있어. 봤지? 봤지? 봤지?

 

근데요. 이상하게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돈을 벌면 벌수록 더더욱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왜일까. 왜, 왜, 왜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어요. 예전에는 세상이 미웠지만 지금은 나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어요. 내가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싶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열정대학’에 들어갔어요. 나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모여서 스스로 과목을 개설해서 스스로 공부를 하는 대학이었어요.  어떤 과목을 개설해볼까 고민했어요. 갑자기 머릿속에 예전에 빡빡 지워버렸던 단어가 슬그머니 나타났어요.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연극'

다시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아니, 연극을 보고 싶었어요. 연극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연극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연극을 하면 정말로 행복한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공연 문화 비평학과’를 개설했어요. 반응이 뜨거웠어요.  정원의 몇 배가 넘는 인원이 신청했어요.  그 과목에서 만난 친구들과 미친 듯이 공연을 보고 다녔어요.

 

특히 저는 더더욱 미친 듯이 연극에 빠져들었어요. 1년에 200편의 연극을 봤어요. 평론가협회에서 주최한 비평워크샵도 들었어요.  <한국연극>과 <연극평론>을 달달 외우다시피 읽었어요. 서점에 나온 거의 모든 평론집을 사서 밤새 읽었어요. 물론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더 배우고 싶었어요. 연극을.  그래서 목표를 세웠어요. 30명의 연극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100권의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자.

 

그때가 스물여덟이었어요. 그날 이후로 만나고 싶은 연극인들의 리스트를 정해서 무턱대고 연락을 했어요.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평론가 허순자 선생님.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그 친절함과 진솔함 때문에 같이 갔던 학생들 모두가 사랑에 빠질 정도였죠.

 

연출가 정범철 형님. <만리향>을 보자마자 하염없이 걸어오다가 카페에 들어와 앉았어요. 내가 만들고 싶은 연극은 이런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무턱대고 쪽지를 보냈어요. 만나고 싶다고.

 

김소희 배우님과 김태훈 배우님. 두 분을 인터뷰 하고 몇 달 뒤에 <고곤의 선물>을 보는데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70프로가 기립박수를 쳤어요. 세상에, 그 엄청난 광경이라니. 두 분이 로비로 나오시는데 몇 달 전의 저를 기억하시고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해주고 안아주고 그 영광을 절대 잊지 못해요. (소희 배우님은 지금도 저를 보면 눈물을 흘려요. 그리고 꼬옥 안아주시죠. 생일파티 때 오셔서 새벽 4시까지 수다를 떨었어요. 가문의 영광이죠.)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형.  그때 기억나요?  내가 게릴라극장에서  형을 인터뷰 했을 때.  제가 형한테  행복하냐고 물었죠.  형은 그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무조건 행복하다고 했죠.  그 망설임 없는 말을 듣고  갑자기 눈물이 나왔었죠.  그렇게 나온 눈물이  다른 연극인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나왔어요.  아, 이 사람들은 행복하구나.  하지만 정말로 환경이 어렵구나.  내가 연극인이 될 수는 없지만  연극인들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공연기획자가 되자. 공연을 제작하고 축제를 만들고 극장을 마련하자. 나아가서 공연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자. 내가 이 좋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연극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당당하게 돈을 벌게 해주자.

 

그 날 이후로 극장을 구입할 계획을 세우고 20대들의 연극 페스티벌 <이십할 페스티벌>을 비롯한 다양한 축제기획도 참여하고  사회적기업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사무실도 알아보고 투자도 알아보고 정말로 제 인생에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정말 행복하게 하루하루 뛰어다녔어요.

 

그런데요. 올해 1월에 사고를 당했어요.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신에 화상을 입었어요. 8개월간 입원했고  수술을 28번 했어요. 손가락은 4개를 절단했고 성대가 달라붙어서 목에 꽂은 튜브에 손을 대지 않고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이것도 1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대요. 성대를 들어낼 수도 있대요. 그럼 저는 말을 못하게 되는 거죠.

고통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사실 말로 할 수 없어요.  피부이식 수술을 17번 했어요.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이  살이 타는 고통이라는데  그 살이 탄 자리를  매일매일 긁어냈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졸도만 4번을 했죠.  중환자실에 두 달을 있었는데  같이 있던 환자들 중에  10명이 넘게 눈을 감았어요.  너무 고통스러웠고  너무 무서웠어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만약  목숨을 건져도  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몸으로?

 

문득 너무 억울했어요. 오랜 시간을 거치고 거쳐서 다시 연극으로 돌아왔는데나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주는 거지? 누가?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고 싶지 않았어요. 알리고 싶었어요. 난 계속 연극을 할 거라는 의지를. 손등이 다 타버려서  건들면 부러지는 상태였어요. 터치펜을 손에 휘감고 한 글자 한 글자 간신히 누르면서 몇 시간동안 글을 썼어요.  눈 커플이 타 버려서 눈이 감기지 않을 때라 뿌옇고 잘 안 보였어요. 열이 40도를 육박해서 온 몸이 땀에 젖었어요.

 

그래도 썼어요. 계속 썼어요. 난지지 않을 거라고 난 이겨낼 거라고 반드시 이겨내고  반드시 연극을 할 거라고 반드시 공연기획자가 될 거라고.

 

그렇게 8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고통과 싸우고 드디어 퇴원했어요.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대학로 게릴라 극장 바로 뒤편에 집을 구한 거예요. 그리고 곧바로 게릴라극장으로 왔어요.  극장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마침 형이 공연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 역시, 대학로는 매일매일 연극인들이 극장에서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너무 행복했어요. 나도 이제 이렇게 연극 곁에서 살아가야지 몇 번이고 다짐을 했죠.  (그런데요.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그 날 새벽에 다시 입원했어요. 숨 쉬기가 힘들어서.)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저는 더 이상 내일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죽음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확실하게 깨달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늘 행복해지고 싶어요. 매일매일 연극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해나가고 싶어요.

 

페스티벌을 만들 생각이에요. 많은 청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작가를 꿈꾸는 사람 연출하고 싶은 사람  무대에 서고 싶은 사람 기획, 홍보마케팅, 포스터디자인, 사진작가 등등 연극에 관련된 모든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모두 기회를 주고 싶어요.

 

그런 기회를 만드는 회사 그런 그들에게 공정한 급여가 지급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얘기는 못 하지만 이미 진행이 되고 있고  조만간 아주 멋진 기업이 탄생할 겁니다. 사회적기업의 이름은 ‘ID 서포터즈’예요. 제 인생의 뮤지컬인 <맨 오브 라만차>의 ‘impossible dream’의 약자에요.

 

그 꿈을 이룰 수 없어도 우린 꿈을 꿔야 해요. 이룰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꿈을 꿔야 해요. 그 길이 험해서  다치고 아프고 깨지고 울 수도 있죠. 저는 연극하는 모두가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깨지지 않고 울지 않도록 제 삶을 쏟을 거예요.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깨지지 않고 울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멋진 회사를 만들 거예요.

 

연극의 가장 큰 장점은 live라고 믿어요. 이건 기록에 남지 못해요. 영상도 평론도 연극의 그 장점을 그대로 표현 할 수 없죠. 미술이나 음악과 같이  후세에 남아서 재평가 될 예술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올라가면 내일 이 순간 사라지는 살아있는 연극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꿈을 말이 되는 현실로 만들 거예요.

 

"나는 살아있고, 나는 꿈을 꿉니다"
일단은 첫 번째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5000명이 참가하고  1000개의 팀이 만들어지는  전무후무한 야외극 페스티벌을 만들 거예요.  전 전공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에요.  그저  죽을 뻔 했는데  그때 연극을 못한 게 너무 속상해서  몸이 좀 좋아지니까  진짜로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멋진 연극판을 만들어 보려는  젊은 청년에 불과해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응원해 주세요. 저와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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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응원해주시거나 제가 만들 회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누구든 연락주세요. 저한테 연극이란 저를 죽음에서 끌어내주고 저한테 행복을 가져다준 생명의 은인이자 영원한 애인입니다. 평생 연극과 살고 평생 연극을 사랑할 겁니다.

 

전 다시 입원을 해요. 그리고 목소리도 안 나올 거예요. 하지만 저는 살아있고 살아있기 때문에 꿈을 꿀 겁니다. 평생.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글.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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