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을 다시 꿈꾸게 하는 것
극단 백수광부
쿡방(COOK+방송)이 한국사회를 열광하게 만든 것이 얼마나 됐을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맛있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삶의 질을 높이는 또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몇 년 전부터 방송가를 강타했던 ‘육아예능’이 또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며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현상 역시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단편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 현상에는 아주 명확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회성을 확장하는 만남과 관계다. 명문 학벌,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면 모든 것이 해결되던, 혹은 된다고 생각했던 이전과 달라진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이다. 음식을 만들면서 또는 좋은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회복되는 것, 아이들과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뭔가 특별한 상황을 만들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관계의 회복’이 가져오는 감동이다. 인간은 사회성을 얻기 위한 본능으로 진화한다는 말처럼, 태생적으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따라 꿈을 꾸기도 하고, 끝 간 데 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의 삶에 모든 것이었던 만남(인연)들이 떠났을 때, 남겨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여기, 한적한 시골 어느 집에서 만난 두 중년 남녀 역시 마찬가지다. 원하는 것은 다시 형성되기를 꿈꾸는 만남이나 그에 대한 불안함이 더 많아 경계하는 이들,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삶을 부여잡고 있는 아스라한 줄타기는 때로 귀엽고, 때로 난폭하며, 가슴을 저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계기다. 각자의 핍진하고 지난한 상처를 터트리는 곳은 그리 잘 차려지지 않은 식탁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풀린다. 극단 백수광부 <두 사람을 위한 만찬>(따찌아나A. 까찐스까야 작, 유명훈 연출)이 차려준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바로 만남으로 시작되는 위로다.
여자와 남자, 감각으로 만나다
40여 명의 관객들이 자리한 극장에 조명이 꺼지면 4명의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에 따라 공간은 러시아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동한다. 중년 남녀의 아스라한 감정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미 선명하게 그려지는 연극의 서사가 그리 맛깔스럽지는 않을 텐데, 객석을 채운 대부분의 관객들은 20~30대의 젊은 남녀들이다. 익살스럽게 무대에서 사라지는 연주자들을 뒤로하고, ‘비 갠 어느 오후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은 아주 세밀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두 인물을 만나게 한다.
연극 <두 사람을 위한 만찬>은 러시아 현대희곡으로 국내 초연작이다. 1990년대 러시아 교외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중년의 두 남녀에게 찾아온 낯설고 어색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일단은 상황자체가 별로 개연성이 없다. 만남의 목적은 있으나 그 만남까지의 과정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남자 오제르나야 25번지요?
여자 그렇다고 친다면요.
남자 그렇다고 친다는 거요, 아니면 오제르나야 25번지란 말이요?
여자 정말로, 원하는 게 뭔데요?
남자 광고. 누가… 당신이 광고를 냈소?
여자 광고요? ‘교외에 위치한 집에서 상시 거주할 경비 구함’ 정말, 우리 집 주소네. 당신… 개는 없어요?
남자 없소. 당연히, 개는 없소. 내가 개를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라도 있소? 하지만 당신에게 개가 필요하다면…
여자 아니요, 개는 필요 없어요.
남자 당신이 이 광고를 내지 않았소.
여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남자 냈소.
여자 내가 직접 낸 것은 아니고
남자 알았소, 잘 알았소. 지워야겠군.
여자 지운다구요? 기다려요, 내가 말했나요, 지우라고? 내 행색이 좀. 비 때문에 얼룩져서, 닦아야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경비 일자리를 찾는다는 거죠. 내 생각이 맞게 가고 있나요? (중략) 잠깐만, 그런데 당신은 경비로 일할 생각이 있다고 확신 할 수 있어요?
남자 확신하오. 나는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확신한다고 확신하오! 하지만 당신은… (출구 쪽으로 향한다) (당황하며) 하지만 나는… (매우 힘차게) 멈춰요! 2년 동안! 나는 미국으로 떠나요. 2년 동안. 좋소.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경비를 구한 것이 여자인지, 남자는 어떤 조건으로 경비를 수락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남자는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서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 있는 동안 경비를 하기로 한 것이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고용한다는 합의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뿐이다. 하여, ‘아, 이거, 서사가 너무 약한데?’ 한 장면만으로 연극을 선험적으로 규정한다면 공연이 이뤄지는 내내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 빠져 흥미를 잃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내 이 작품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만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연극은 치밀한 서사 구조보다 서로를 경계하는 인물의 감각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첫 장면에서 그 구조의 위험성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각 인물의 이야기는 더욱 더 섬세하고 치밀하게 다가온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에 대한 상처
여자 그가 됐다네! 편지. 볼데마르에게 보내는 내 편지.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어. 나는 미국에 갈 수 없어. 이건 꿈이 아니야. 회사가 무너졌어. 이건 꿈이 아니야. 나는 원했었지. 당신이 나를 쓰러뜨렸어. (밧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힘없이 손 안에서 구겨버리고 웅얼거린다) 목매달아야지. 이제는 어떻게 목매달지? 산다고? 나는 원하지 않아. 나는 할 수 없어. 당신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불행하게 웅얼거린다) 왜, 왜.
남자 생각지 못했소. 나는 회사가 무너진지 몰랐소. 근데, 무슨 회사가 무너졌단 말이오?
여자 미국에 있는 취직알선 회사요. 무너졌어요. 고객들에게 사기를 친 건지 아니면 무너졌는지, 결국은 같은 거지만.
남자 어떤 직업으로?
여자 가정부.
남자 가정… 아… 흠… 볼데마르는?
여자 기다리지 않아요.
남자 과거에는 기다렸는데, 지금은 기다리지 않는다?
여자 과거에도 기다리지 않았고, 지금도 기다리지 않아요.
남자 그렇다면, 아마, 그가 미국에 없을 수도… 아마, 그는 아예….
여자 미국에 있어요. 내 아이, 내 의미, 내 인생, 내… 모든, 모든, 모든 것! 아,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아니에요. 그는 너무, 너무 멀리 있어요. (한 점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나는 거기로 갈 수 없어요.
여자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있다. 전 재산을 그를 위해 썼다. 그런 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알선업체에 돈을 주고 기다렸지만 사기를 당해 남은 재산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지금의 집과 창고 하나. 남자에게 계속 아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남은 선택은 자살뿐 그녀에게 남은 삶의 의지는 없다.
여자 당신의 결혼은 폭삭, 그 다음은?
남자 그 다음? 그 다음 나는 내 꿈을 향해 돌진했소. 집을 짓게 되었소. 내 집! 나만의! 나는 나의 꿈에 부족하나마 나의 모든 영혼을 쏟아 부었소. 아들이 커서 어른이 되었소, 장교가! 함대에 근무하게 되었소, 개 이외에, 유일한 내 혈육. 나는 집을 지었소. 그건 행복이었소. 열정이란 게 뭔지 아시오?
여자 집을 짓는 것.
남자 그건 영혼의 상태요! 나의 행복은 잿더미로 흩어졌소. 글자 그대로. 집이 불탔소. 불탔소 전부. 다 타버렸소. 땅도.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소. 아무 것도! 몽유병자처럼 눈멀고, 귀멀게 된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매달렸소. 잿더미를 치우고 집을 짓는 것, 바로 그 곳에 다시 집을 짓는 것! 웃긴 사람이죠. 보잘것없는. (천천히) 바로 그 때 다른 소식이 전해졌소. (조용히 겨우 들릴 정도로) 딤까, 내 아들이 전사했다는. (사이) 정말로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이미 두렵지 않게 되오. 팔도 이미 떨리지 않고, 눈에 증오가 가득하지도 않게 되오. 내면의 모든 것이 마비되고, 마치 로봇처럼 무엇인가를 하게 되오, 하게 되오.
남자 역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떠돌아다닌다. 이제 더 이상 정착이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술을 마시면 폭력적이 된다거나 음울해진다는 그가 만취상태에서 털어놓는 이야기는 여자의 상처와 일면 비슷하다. 기댈 곳도 없고 그러고 싶은 희망도 없다. 의미를 부여할 만한 삶의 지향이 없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될 뿐이라는 이들의 상처는 그렇게 툭툭 무방비 상태로 꺼내진다.
공교롭게도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놓기 시작한 날은 그들의 생일날이다. 생일, 자신의 존재감을 더 없이 각인하게 되는 그날, 부정하며 회피하려 했던 순간들이 더 없이 도드라지게 분명해지는 날,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절규하는 여자와 남자의 상처는 비로소 세상 밖에서 소통한다.
위로는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꺼내놓는 순간 시작된다. 상처는 혼자서 곪아터지기를 기다릴 때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줬을 때 치유되기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해결된 지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바로 경계심이다. 연극은 배우 정은경의 익살스럽고 애교스러운 감성, 무뚝뚝한 척 그런 여자의 감성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배우 유성진의 과하지 않은 감각으로 객석의 경계심 역시 보기 좋게 떨쳐낸다.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삶
연극 <두 사람을 위한 만찬>은 이들의 우연한 만남과 억지스러운 동거,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태의 두 사람이 먹고 마시며 나누면서 가까워지는 서로 간의 감각을 충실하게 전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무조건적인 희망을 이야기 하는 대신 “아직 우리의 만찬이 식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또 다른 인생의 기대감을 주는 것 가운데 멈춰 있다. 그래서 잘 됐을까? 아닐까? 그것은 보는 이들의 희망과 상상에 맡겨진 채.
남자 (1장에서의 그의 말을 반복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연다) 우리는 오래 동안, 너무 오래 동안 문지방에 서 있는 것 같소.
여자 기다려요. 그리고… (우물거리며) 당신은 아직까지 만찬이 식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거요?
그녀 식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천천히) 예, 식지 않았어요.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어떤 관계가 이미 형성돼 있는 경우가 많다. 연극이 작은 ‘만찬’을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는 궁극적인 이야기는 인간의 관계로 돌아온다. 50대, 두 중년의 남녀 간에 파릇파릇 애틋하고 상큼한 연애이야기가 아닌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 치유하고, 돌봄이 된다는 지극히 원칙적인 이야기, 그것이 연극 <두 사람을 위한 만찬>이 지금 우리 시대에 넌지시 던지는 가장 중요한 서사다.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최윤우 연극평론가, 본지 편집장
월간 [한국연극]에서 편집장, (사)한국소극장협회 정책실장으로 근무했으며 공연예술 관련 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arod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