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반도체 전쟁 중…
|산업의 필수재 '반도체'
반도체가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오래전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쌀'이라는 별명을 얻은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부품이자 미래 기술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모든 산업의 필수 부품으로 사용되는 반도체는 스마트폰에서 컴퓨터 그리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이제 반도체가 사용되지 않은 곳은 거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반도체 부족 현상이 오히려 심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나 일반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저성능·저가 반도체가 부족해 자동차 업계부터 반려동물용품이나 성인용품에 이르기까지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분야는 단연 자동차 업종입니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는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마이너스 옵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주요 전장장치들을 제외하면 가격을 할인하고 조기 출고를 보장하는 마이너스 옵션 상품을 내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K8의 경우 후방주차 충돌 방지 보조 시스템과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 기능을 제외하면 40만 원을 할인해 주는 방식이지요.
현대자동차는 최근 아산 공장의 생산라인을 며칠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반도체 수급난으로 전자제어장치와 변속기 제어장치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해외에서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용 샤워기 생산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반도체 수급난이 발생한 것은 저성능·저가 반도체를 주로 만드는 8인치 웨이퍼 파운드리 공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고성능 미세공정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자 이들 라인 증설에는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지만, 저성능·저가 반도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 공급량이 부족해진 것이지요.
또 사물인터넷이나 자율주행 등의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동안 반도체에 무심했던 자동차는 물론 생활가전부터 장난감 업체들까지 모두 반도체 확보에 나선 영향도 있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당분간 이 같은 수급난이 해결되기 쉽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수익성이 좋은 고가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굳이 저가인 8인치 제품 생산에 투자를 확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전략 무기 '반도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총 2,800억 달러(약 365조 68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용 '반도체과학법'을 공포하며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30년 전에는 미국이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0%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개탄합니다. 또 일상적인 비용을 낮추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들어야 하며, 미국이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며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의 경쟁 속에서 반도체는 전략적 무기입니다. 과거 군사 전쟁이 무역과 기술 전쟁으로 바뀐 현재 상황에서 반도체는 미·중 패권 경쟁을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술개발 노력과 함께 외교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최근 미국 정부는 자국 안보를 이유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뿐만 아니라 구형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까지 중국 판매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용 반도체 공급망 동맹인 칩4 참여 결정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칩4는 한국·미국·일본·대만 등 4개국을 말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칩 4 동맹에 참여하면 중국을 자극해 중국 의존도가 높은 소재·원자재를 비롯한 다른 분야의 보복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2021년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액 1,280억 달러 가운데 중국은 502억 달러로 약 3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홍콩을 더하면 거의 60%에 이릅니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주요 생산 기지가 중국에 있고 또 중국이 최대 수입국인 만큼 칩 4 가입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반도체 산업이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산업 구조상 생산에서는 미국의 반도체 기술이 필요하고, 수요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아직까지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오는 9월, 칩 4 예비 회의에 참여하기로 하고 예비 회의 결과에 따라 칩 4 참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연구 보고서를 중심으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내용을 살펴봅니다.
현재 미국은 자국 주도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나서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적 우위와 제품 기술 개발 역량을 기반으로 제조공정 기술이 강한 한국 및 대만과의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립·검사 및 생산의 비교우위가 높아지고 있는 중국을 대체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제조 산업을 부활하기 위해 R&D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으며, 또 기술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법안으로 보조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들 법안은 반도체를 포함해 미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강화하고 중국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며, 중국에 대한 제재 조치에 있어서도 동맹국의 협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은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반도체 소비 시장 역할을 할 뿐, 제조와 관련된 모든 핵심 기술들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반도체 매출의 5% 정도만 차지하고 있으며, 조립·테스트·패키징 부문에서 제한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반도체 수입의존도와 공급망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반도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유도하고 있으나,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대중 수출 통제와 투자 제재 그리고 금융 제재로 자국의 반도체 자립도를 높이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다만 화웨이, 레노버, 샤오미 정도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반도체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PC, 스마트폰, 태블릿 등 IT 기기를 생산하는 기업으로서 반도체의 소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설계와 제조에 특화된 중국의 하이실리콘과 파운드리에 특화된 중국 최대 반도체 기업 SMIC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습니다.
반도체 생산기업은 아니지만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웨이의 경우도 역시 미국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입니다. 화웨이에 물품을 공급하는 기업 중 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3%에 달하며, 판매처 역시 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20%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반도체 기업 SMIC 역시 부품 수입 기업 중 미국 기업이 1/3가량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그 밖에 영국·독일·네덜란드 등 유럽의 기업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 기업의 높은 대외 의존도는 중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의 자립화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며, 이는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들이 상당 기간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그동안 중국 및 미국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공급망 거점을 구축하여 지역별로 특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해왔습니다.
중국에는 패키징 업계가 많아 이를 활용하기 위해 반제품 수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국으로부터 수입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현지 투자 법인으로부터 한국으로 수출하는 기업 내 무역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원천기술의 미확보로 반도체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즉 이른바 소부장 산업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것이 큰 리스크입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반도체 주도권 강화를 위한 미·중 디커플링 정책은 반도체 산업 공급망 구조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것입니다.
반도체 핵심기술을 보유한 선진국의 자국 반도체 기술 통제와 독점적인 기술 보유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지배력 및 동맹국 간 공급망 강화는 향후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러한 요인들을 종합하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전환 시대에 직면해 있고, 공급망의 다원화와 중복은 필수적입니다.
결국 우리 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자체 공급망 안정화에도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특정 국가에 편중되어 있는 공급망을 분산시키기 위해 현재의 공급망 재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는 반도체 전쟁 중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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