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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이다. ‘불의 기억’과 ‘물의 추억’ 그리고 ‘바람의 길’로 이어지며 지질과 해양 문화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진은 성산포의 시원한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터진목 해안.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이생진 ‘바다를 담은 그릇’ 중에서)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출봉과 우도 사이에는 물살 거센 바다가 있고, 오조리 마을 앞에는 호수 같은 잔잔한 바다도 있다. 이생진 시인의 이야기처럼 구멍 숭숭 뚫린 밭담이나 돌담에도 바다가 있고 일출봉을 낀 모래언덕에 핀 갯쑥부쟁, 갯기린초에도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들꽃 위를 넘나드는 나비, 꿀벌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다. 성산포에서는 모든 것이 바다이다.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

식산봉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굳을 즈음 화산탄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불의 기억’이다.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오조해녀의집에서 시작된다. 오조해녀의집에서 오른쪽으로 시작하면 식산봉과 오조리 마을을 만나게 된다. 식산봉은 해발 60m 정도로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독특한 생김새로 인해 왜구를 물리쳤던 재미있는 전설이 있고 주변의 풍경과 함께 ‘성산10경’의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식산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멸종위기 식물인 황근이다. 노란 무궁화로 불리며 7월부터 8월까지 제주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식산봉의 황근이 가장 정감이 있다. 그것은 식산봉 앞에 펼쳐져 있는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탓일 것이다.

 

식산봉과 오조리를 연결하는 바다 사이의 탐방덱도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린다. 덱 주위로 갯개미취가 가득 자라고 있다. 10월이 되어 갯개미취의 보라색 꽃이 수를 놓으면 이만한 가을 길도 없을 듯하다. 덱을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자 동백나무가 자란 둔덕 아래 용천수인 ‘족지물’을 만난다. 비가 오면 물이 쉽게 땅속으로 빠져버리는 지질 특성상 제주에서 물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땅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제주사람들에게 고마운 존재였고 마을에서는 잘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족지물’도 예외가 아니어서 돌담이 둘러져 있고 빨래터는 시멘트로 단장한 흔적이 남아있다. 오조리는 일출봉에 해가 뜨면 가장 먼저 햇살이 닿는 마을이다. 바다 위로 펼쳐지는 일출봉의 그림자, 마을 안길의 파란색, 분홍색 지붕을 한 집들, 사방으로 연결된 밭담은 언제 봐도 평화롭다.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

➊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에는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너른 바다도 있지만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호수같은 바다도 있다. ➋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흐르다 언덕을 이루고 가스가 빠져나가면서 굳어버린 튜물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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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리 마을을 벗어나는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마을 근처까지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와 습지를 만들었다. 왜가리 한 마리가 불청객에 놀라 급히 몸을 피한다. 왜가리가 앉아 쉬던 곳은 튜물러스라 하는 나지막한 용암언덕이다. 튜물러스는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흐르다 언덕을 이루고 가스가 빠져나가면서 굳어버린 것을 말한다. 화산활동의 흔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 와야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을 빠져나오면 성산포로 이어지는 긴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길에는 노란색 왕고들빼기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 제방은 고성리와 성산포를 잇는 큰 도로로 연결된다.

 

사실 성산포는 작은 섬이었다. 썰물 때가 되어야 드러나는 모래톱이 제주의 본섬과 이어줄 정도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연륙 공사로 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큰 도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여튼 물때에 따라 바닷물이 열리곤 했던 이곳을 ‘터진목’이라 불렀다. 광치기 해안이라고도 하는 ‘터진목’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인 제주4·3 당시 성산지역 주민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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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여행 내내 마치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어디를 가나 성산일출봉이 따라다닌다. ❷ 척박한 바닷가 바위지만 흙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바닷가 식물들이 뿌리를 내렸다. 사진은 갯까치수영 열매. ❸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을 안내하는 분홍색과 파란색 리본. 마치 ‘물과 불의 하모니’를 연상시킨다. ❹ 오정개를 지나 일출봉과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 ‘이생진 시비’가 있다. 잠시 길을 멈추고 시를 읽으면서 성산포의 바다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성산포 ‘앞바르 터진목’ 바닷물살 파랗게 질려 아직도 파들파들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강중훈 ‘섬의 우수’ 중에서)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들 눈에는 터진목에서 보는 일출봉과 해안 모래언덕은 황홀하다. 썰물이 되면 일출봉에서 떨어져 나온 화산쇄설물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암이 모습을 드러내며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또한 일출봉을 끼고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바다갈매기의 모습도 장관이다. 하지만 4·3을 겪은 사람들 눈에 바다는 파랗게 질려 파들파들 떨고 있는 생각하기 싫은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제주4·3은 지금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터진목을 걷고 있노라면 일출봉에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을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군은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결7호 작전’이다. 이 작전을 위해 일본군은 제주의 해안, 오름 곳곳에 많은 진지동굴을 만들어 놓았다. 일출봉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지동굴이 만들어졌는데 작업은 오롯이 제주사람들의 몫이었다.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성

❶ 일출봉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바람과 파도에 깎이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화산활동으로 쌓인 퇴적암층을 비롯한 지질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❷ 암회색의 바위와 초록색의 나무, 파란색의 하늘, 그리고 탐방객의 조화는 초가을 일출봉을 더 돋보이게 한다. ❸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폭발하면서 분출된 화산쇄설물들이 쌓이면서 바위를 만드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제주도를 닮았다. ❹ 저녁 무렵 터진목 백사장을 걷는 즐거움은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이 주는 또 하나의 혜택이다.

일본군 진지동굴을 벗어나면 일출봉 입구이다. 성산일출봉은 예전부터 제주의 제1경으로 꼽히는 유명 관광지이다.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주차장은 많은 사람으로 더욱 넘쳐난다. 2년 전 일출봉을 오르는 길을 하나 더 만들었을 정도이다. 일출봉은 이른바 응회구라고 하는 수성화산체이다. 약 5천여 년 전 땅속에서 끓던 마그마가 분출하는 과정에서 바닷물을 만나 폭발하여 만들어진 오름이다. 높이가 180여m인 일출봉은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드센 바람과 바닷물에 깎이면서 사발모양의 분화구만 남아 독특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일출봉의 이런 모습 때문인지 제주 개벽설화인 설문대할망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경사가 급하여 조금은 숨이 차지만 오르면서 만나는 기암괴석의 풍경, 정상에서 보는 소를 닮았다는 우도와 탁 트인 바다, 식산봉 너머 지미봉, 다랑쉬오름의 풍광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일출봉을 내려오면 자연포구인 오정개이다. 이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일출봉을 바라보자. 봉긋봉긋 솟은 자그마한 동산 너머로 불쑥 솟아오른 일출봉이 듬직하고 바다 건너 우도의 모습도 언제나 정겹다. 그리고 발아래 피어난 갯쑥부쟁이, 억새뿌리에 보금자리를 튼 야고, 잎이 나비를 닮은 나비나물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0월이 되면 장관으로 펼쳐놓은 해국으로 인해 이곳은 천상의 화원이 된다. 오정개를 벗어나면 성산포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 이생진 시비가 있다.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코스에는 어느 곳이든 일출봉이 있고 바다가 있다. 그래서 이생진 시인은 성산포의 바다를 가리켜 ‘기도보다 잔잔한 바다/꽃보다 섬세한 바다’라고 하며 성산포의 바다를 극찬한다. 이생진 시비를 지나고 내려오는 길 성산항 주차장에 우도로 향하는 관광객들이 타고 온 렌터카의 숫자에 또다시 놀란다. 우도 관광객이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지만 조그만 섬 우도는 무탈한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조금 북적대는 성산항을 거쳐 다시 오조해녀의 집으로 돌아오면 트레일이 끝난다.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일출봉을 끼고 있는 성산리와 오조리 마을을 돌아보는 과정이다. 오조해녀의 집에서 출발해서 식산봉과 오조리, 일출봉, 성산리를 거쳐 돌아오는 것으로 총 8.3km로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물론 그 반대로 걸어도 상관없고 일출봉을 오르지 않는다면 한 시간 정도 단축된다. 하지만 트레일은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살펴봐야 참맛을 느끼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

 

에디터 / 이성권(동백동산 자연환경해설사)

사진 / 오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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