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달라진 정부, 日욱일기에 묵언수행→정면대응, 왜?
지난 2013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일제 해군기 모형에 욱일기가 꽂힌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 |
2016년 5월 민간 차원의 욱일기 문제제기에 정부 ‘침묵’
올해 국제관함식서 日욱일기에 韓여론 극도 악화
정부도 日에 욱일기 게양 자제요청하며 ‘태세전환’
일본 자위대의 욱일기에 ‘국제관례’라며 입 뻥긋하기도 불편해하던 정부가 이달 해군 국제관함식을 앞두고 ‘욱일기 게양자제’를 요청하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달 예정된 해군 국제관함식에 일본 자위대가 불참을 결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올해는 일본 욱일기에 관한 한, 정부 차원에서 수동적→적극적 대응으로 전환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 해다.
일본 자위대 욱일기는 벌써 수년동안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적 대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항간에서는 똑같은 전범기인 나치기(하켄 크로이츠)는 서구에서 금기시되고 있는데, 일본의 욱일기는 오히려 서구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치기는 현재의 서구 선진국들에게 악행을 한 상징이고, 일본 욱일기는 아시아권의 상대적 약소국을 상대로 악행을 한 것이다. 서구 선진국들이 나치기에 거부감이 있지만, 욱일기에는 별 거부감이 없다.”
우리 정부 역시 국제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욱일기 사용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 욱일기 사용에 대한 여론을 바꾼 건 민간 차원의 문제제기였다. 민간의 문제 제기가 거듭되고 이에 따라 논리가 강화되면서 누구도 욱일기를 수긍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 전환이 너무 늦은 것일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침묵 수준으로 대응했다가 7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겨우 목소리를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긴 여정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16년 5월 국내에서는 욱일기 문제로 여론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욱일기 사용 활발…韓민간차원 대응에 의존
일본 축구 대표팀 유니폼, 나이키 에어 조던 시리즈 등 공공연한 스포츠 제품 디자인까지 욱일기가 사용된 점을 국내 민간 차원에서 지적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전범기 전 세계 퇴치 캠페인’을 벌이던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해당 제품에 대한 항의 표시로 FIFA 회장과 나이키 사장 등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서 교수는 그해 3월부터 5월까지 2달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일본 전범기 디자인 실태 조사에도 나섰다.
조사 방법은 조사 인력과 재원에 한계가 있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메일 등을 통해 전 세계 재외동포들로부터 제보를 받는 방식을 썼다. 이런 프로젝트는 전 세계 재외동포들의 적극적 호응으로 가능했다. 2달간 미국, 호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전 세계 주요도시에서 일본 전범기 디자인이 활보하는 사례가 서 교수에게 제보됐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뉴욕의 최대 백화점 메이시스에 비치된 관광 팸플릿, 호주 시드니의 일부 다이소(Daiso) 매장, 수제 버거로 유명한 영국 바이런(Byron)의 신제품 ‘번질라(Bunzilla)’, 이탈리아의 대표적 커피메이커 브랜드 비알레티(Bialetti) 등에 일본 전범기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확인됐다.
서 교수는 “그렇게 제보받은 일본 전범기 디자인 사용 사례가 총 40여건에 달했다”며 제보받은 모든 회사의 홍보 담당자 연락처를 수소문해 항의 서한을 보냈다.
서 교수는 미국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에 일본 전범기 퇴치를 위한 광고도 게재했다. 관련 회사에 전범기 퇴치를 위한 영어 동영상 CD 등을 묶어 항의서한을 보낼 계획도 세웠다.
정부나 공공기관 도움없이 민간 차원에서 일본 전범기 퇴치를 위해 사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점인 2016년 5월 24일 욱일기를 게양한 일본 해상 자위대함이 우리 진해항에 입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우리 해군은 ‘국제 관례’라며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일본 군함은 5월 25일부터 진해와 제주도 일대에서 실시되는 서태평양 잠수함 탈출 및 구조훈련 참가를 위해 우리 해역으로 건너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 해군은 “함정은 국제법상 자국 영토로 간주되고 있어 한국 해군이 일본에 욱일기를 달지 못하게 하는 건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한국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함정 앞에 해군기를 달고 뒤에 태극기를 다는 것처럼 일본 역시 해군기로 쓰는 욱일기를 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해명이 더욱 국민적 분노를 부채질했다.
민간에서는 일본 전범기 퇴치를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해군이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교육사령부 등이 있는 ‘해군의 총본산’ 진해항에 입항해도 쉬쉬하며 눈치만 본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日욱일기에 대한 비난여론 확산…정부도 태도 바꿔 ‘강력대응’
이런 국민적 분노는 2년이 지나 올해 해군 국제관함식을 앞두고 정부가 확 달라진 태도를 보이면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일본은 오는 10~14일 제주에서 열리는 해군 국제관함식에서 욱일기를 게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우리 정부는 욱일기 게양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물밑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됐다.
우리 정부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11일 해상사열 때만이라도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일본 자위대 함정에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대신 일장기와 태극기를 게양해 달라고 요청했다. 2년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일본 측은 법률상으로도 규칙상으로도 자위대 함정에는 자위함기인 욱일기를 달아야 한다며 우리의 요구를 일축했다.
논란이 이어진 가운데 북한이 일본을 비난하며 가세했다.
‘우리민족끼리’ 등 북한 매체들이 지난 5일 “일본 해상자위대 군함이 전범기인 욱일기를 게양하는 것을 단호히 불허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등 ‘남북:일본’의 전선까지 형성된 것이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최근 유튜브에 게시했던 ‘세계에서 욱일기(전범기)를 퇴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어 영상. [사진=유튜브캡처] |
지난 5일 일본 언론은 우리의 합참의장격인 가와노 가쓰토시 자위대 통합막료장이 전날 기자들에게 “해상자위관에게 자위함기는 긍지다. (자위함에서 욱일기를) 내리고 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11일 해상사열 때 참가국 함정들의 사열을 받는 좌승함을 현재의 일출봉함에서 독도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추가 대응 논의가 이어졌다. ‘독도’를 부정하고 있는 일본 측에 ‘독도함’을 좌승함으로 내세우는 건 일본에 일종의 외교적 굴욕을 안겨주는 대응이다.
2년 전 일본 해상 자위대 함정의 진해 입항 때 눈치만 보며 ‘묵언’으로 대응하던 것과 딴판이다.
정부의 달라진 태도에 우리 해군도 보다 당당하게 대응했다.
해군이 지난 8월 31일 국제관함식 참가국에 ‘해상사열 때 부대기 대신 태극기를 달아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지난 9월말 뒤늦게 알려졌다.
우리 외교부 역시 이와 관련한 의견을 9월말 일본 정부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일본은 욱일기가 한국인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며 대응의 격을 높였다.
결국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이 지난 5일 제주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를 불참시킨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러한 결론이 한일간 신경전에서 한국의 승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5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입장이 있다. 이를 확실히 끈기있게 주장해 가겠다”고 말했다. 즉, 이번 불참이 일본 정부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판단이란 것이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반성 없는 일본 자위대가 독일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지난 5일부터 전 세계에서 욱일기(전범기)를 퇴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어 영상(youtu.be/b6mXHaC1YgY)을 페이스북에 광고료를 지불하고 5일부터 게시한다.
또한 그는 자비를 들여 최근 유튜브에 게시했던 2분 분량의 영상을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오는 11일 제주 관함식에 참석하는 주요 국가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에게 일제히 배포했다.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soo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