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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계의 성공신화’… “어느 자리에 있든지 난 배우 김소향”

앙상블로 시작해 여주인공까지…여성 원톱 서사의 장인

‘마리 퀴리’로 관객과 연대…“지독한 독기 닮았다”

어느 자리에 있든 “10년 후에도 배우 김소향”


시대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어느 한 시점마다 이름을 남긴 여성들이 있었다. “최소 다섯 명 이상의 실존인물을 연기했던 것 같아요.” ‘마리 퀴리’, ‘마타하리’,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이기도 했고, 귀족이기도 했고, 여러 사람을 섞은 시대의 캐릭터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붙은 별칭이 있다. ‘여성 원톱’ 서사의 장인. 여성 서사가 빈약한 뮤지컬 계에서 얻은 별칭인 만큼 의미가 값지다. 지금은 ‘마리 퀴리’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공연에 한창인 배우 김소향을 최근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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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퀴리’를 통해 관객과 만나고 있는 배우 김소향은 다채로운 색을 지닌 한 인간이자 성장하는 위대한 과학자로의 마리 퀴리를 연기하며 호평받고 있다. [라이브 제공]

김소향(40)은 공부하는 배우다. 2018년 초연 당시 마리 퀴리 캐릭터를 충분히 소화했음에도, 처음부터 다시 연구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땐 그 배역에 대한 조사를 워낙에 많이 하는 편이에요. 마리 퀴리는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어요. 어찌 보면 제게 이 역할은 도전이에요.” 그의 역사를 담은 전기를 만나며 김소향의 마리 퀴리는 다채로운 색채를 지닌 한 사람이자, 성장하는 과학자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됐다. “스물넷의 자신감이 부족한 폴란드 소녀가 라듐을 발견하고, 인류를 위해 과학을 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 위대한 과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소향이 그려놓은 마리 퀴리는 완벽하게 표현됐다. 회차마다 감정의 파동은 달라질지라도, 김소향이 도달하고자 했던 마리 퀴리의 모습에선 어긋남이 없었다. 150분 동안 ‘마리 퀴리’의 일대기와 성장 과정은 파노라마 사진처럼 선명하게, 오래된 인상화처럼 아득하게 관객들과 만난다. 여성 원톱 서사 장인이라는 별칭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나를 꺼내는 시간…“지독한 독기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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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C 제공]

매 작품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 인물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나,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방해를 받던 때도 있었어요. 이제는 저만의 노하우가 조금은 생겼어요. 그들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내 안에 있는 모습과 캐릭터의 공통점을 찾는 데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작품 안에서 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김소향 만의 노하우 중 하나다.


그의 마리 퀴리는 많은 것을 뛰어넘었다. 시대는 신분, 직업, 성별에 대한 차별을 만들었지만, 마리 퀴리에겐 권위도 없고, 계급도 없다. 여성이자 이민자로 억압과 차별을 딛고 과학자로의 삶을 살았던 마리 퀴리의 ‘디테일’이 살아나자, 관객들은 단숨에 설득당했다. 그의 표정과 몸짓, 노래에 울고 웃고 공감하고 연대의식을 가진다.


“사실 전 ‘마리 퀴리’에서 공식 싸움닭이었어요. 초연 때와는 작품이 많이 달라졌어요.” 적대 관계였던 마리와 안느가 ‘연대’를 쌓는 ‘영혼의 동반자’가 되고, 마리 퀴리가 라듐의 위해성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성장하는 모습은 초연과의 가장 큰 차이다. “당시엔 모두가 처음이었기에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고, 관객들에게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는 방법이 서툴렀어요. 시행착오가 많았죠. 이번에도 3주 전까지만 해도 지금 이 대본이 원래 대본이 아니었어요. 매일 논쟁과 화해와 웃음과 울음이 함께 했어요.”


‘마리 퀴리’를 만나며 김소향은 한국에서의 배우 생활을 접고 미국 유학을 결정하던 시기를 떠올렸다. 당시 김소향은 많은 작품의 선택을 받으며 여주인공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소위 ‘잘 나가던’ 배우가 하루아침에 홀연히 떠난 것이다.


“어느 날 저를 객관적으로 보니, 신선한 배우가 아니더라고요. 배우는 궁금해야 하는데, 전 너무 뻔한 거예요. 오디션을 가면 연출, 음악감독, 프로듀서 모두 저와 한 번씩은 작업한 분들이었죠. 당시 제가 느끼기엔 ‘김소향은 못 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되게 특별하지도 않아’, 그런 시선인 것 같았어요.” 서른이 넘어 유학을 결정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대로라면 여기에서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올 것 같다, 더 이상 불려다니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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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제공]

3년의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김소향은 “지독한 독기가 마리 퀴리와 닮은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늘 하던 얘기가 있어요. 무 하나라도 자르고 오겠다는 말이었어요. 유학 동안 한 번도 한국에 나오지 않았어요.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뼈를 묻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수없이 떨어지는 오디션을 견디며 오기도 쌓았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방인의 슬픔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 시기를 딛고 동양인 배우 최초로 ‘시스터 액트’ 아시아 투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 때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신경질적이고, 욕심 많고 부정적이었던 제가 미국에서 배우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고 돌아왔어요.”

뮤지컬 계의 성공신화…“어느 자리에 있든지 배우 김소향으로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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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블로 시작해 주연 배우로 자리잡은 김소향은 수많은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의 롤모델로 꼽힌다. [라이브 제공]

사실 김소향은 뮤지컬 계의 성공신화로 꼽힌다. “아무것도 없는” 앙상블부터 시작해 주연 배우로 무대에 서니, 무수히 많은 지망생들은 그를 ‘롤모델’로 꼽는다.


20년에 가까운 배우 생활 동안 좌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앙상블을 하면서도 배역을 맡았고, 배역을 맡았다가도 앙상블로 되돌아기도 했다. “주연을 하다가도 다시 앙상블을 할 수 있었던 건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진짜 이 일을 사랑하면 무대 위에서 어떤 포지션이든지 괜찮았어요. 좌절해서 그만 두면 지는 거니까요. 그러면 정말 배우를 할 수 없게 되잖아요.”


앙상블과 배역을 오갔고, 여주인공의 커버를 맡았던 긴 시간 동안 김소향은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욕심이 많았어요. 제가 나가지 않는 장면에선 주연 언니 오빠들이 하는 걸 쪼그려 앉아 지켜보고, 노래를 따라 불렀어요. 피아노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죠. 다들 저한테 독한 년, 독한 년 하더라고요. 그땐 그 말이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어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기다리며 실력을 쌓았고, 끝끝내 기회가 왔다. 2005년엔 ‘아이다’의 커버를 거치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티켓을 파는 여주인공으로 11번이나 이름도 올렸다. 김소향의 이름 앞엔 ‘동양 배우 최초’라는 수사가 붙고, 이젠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며 관객의 신뢰를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저는 지금 이 자리가 톱이고,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에서 내려온다 해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다고 해서 제가 배우가 아닌 것도 아니고요. 10년 뒤가 되면 여배우인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줄어들 거예요. 하지만 어떤 포지션에 있든 배우인 김소향으로는 꾸준히 있을 거예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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