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묵은 한의 여인 장만월, 6년 묵힌 보람 있었네
‘호텔 델루나’ 시각효과 완성도 고려해 제작 미뤄
아이유 합류하고 판타지 스릴러 버무려 시청률 10%
가수 겸 배우 아이유(본명 이지은)는 지난해 가을 홍정은ㆍ홍미란(일명 홍자매) 작가를 처음 만났다. 아이유가 두 작가가 쓴 ‘호텔 델루나’의 대본 일부를 읽은 뒤였다. 두 작가는 ‘호텔 델루나’의 주인공인 장만월을 맡을 배우로 아이유를 욕심냈고, 제작사는 아이유 쪽에 가장 먼저 대본을 건네 출연을 제안한 상황이었다.
”지은씨 이렇게 강한 캐릭터 용기 내 잡아보는 건 어때요?”
가수 겸 배우 아이유는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1,000년을 산 장만월을 연기한다. 아이유는 순수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채 시공간을 초월하는 극중 장만월을 다양한 옷으로 표현한다. 드라마에서 장만월이 총을 쏠 때 입은 보라색 드레스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
아이유는 대본을 읽고 드라마에 호기심을 느꼈지만, 처음엔 출연을 망설였다. 당시 아이유는 가수 데뷔 10년을 맞아 전국 순회공연으로 정신 없이 지내던 때였다.
아이유의 마음을 돌린 건 두 작가였다. “지은씨가 고민하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이렇게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배우 인생에서 쉽게 만날 수 없어요. 이번 기회에 용기 내서 잡아 보는 건 어때요?” 두 작가와 격의 없이 ‘호텔 델루나’ 이야기를 주고받은 아이유는 결국 드라마 출연을 결정했다. 아이유 측과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가 들려준 아이유의 ‘호텔 델루나’ 출연 과정이다.
아이유가 역할을 맡을까 고민한 장만월은 1,000년 동안 ‘죽지도 못하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의 영혼이 ‘달의 객잔’(호텔 델루나)에 있는 나무 월령수에 묶인 탓이다. 신이 내린 저주였다.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과 비슷했다. 소녀의 얼굴을 한 장만월의 마음은 1,000년 묵은 한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장만월은 정작 스스로 생을 끝내지 못한다. 순수하면서도 팜므파탈(악녀)이고 주도적이면서도 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장만월은 아이유를 만나 생명력을 얻는다. “덜 자란 척 하지만 대충 속아줘요”(‘스물 셋’ㆍ2015)라고 노래하며 팜파탈을 자처하고, 우상이 됐지만 누군가의 꼭두각시이길 강요받는 ‘국민 여동생’ 아이유의 현실과 맞물려서다.
독특한 여성 캐릭터 구축은 홍자매의 특기였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안나(한예슬),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구미호(신민아), ‘최고의 사랑’의 구애정(공효진) 등이 대표적 사례다. ‘호텔 델루나’에서 두 작가와 만난 아이유는 장만월을 괴팍하게 소화해 개성을 입힌다.
’주군의 태양’과 이란성 쌍둥이
귀신 장만월(아이유)과 인간 구찬성(여진구)의 사랑을 그린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
‘호텔 델루나’가 인기다. 지난 11일 방송 시청률은 10%(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 중인 드라마(KBS 일일ㆍ주말극 제외)는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ㆍ종합편성(종편)채널을 통틀어 ‘호텔 델루나’와 SBS 금토드라마 ‘의사 요한’ 뿐이다.
‘호텔 델루나’는 귀신이 머물고 가는 호텔이란 소재의 새로움과 장만월 같이 톡톡 튀는 캐릭터로 재미를 빚어낸다. 귀신 장만월과 인간 구찬성(여진구)의 사랑이란 판타지 멜로에 회마다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스릴러의 특성을 부각해 몰입도도 높였다. 시청률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요즘 드라마 시장에서 ‘호텔 델루나’가 마니아용에 머물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김선비(신정근), 최서희(배해선) 등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산 게 아닌, 경계선에 놓인 인물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도 산 게 아닌 현실의 우리와 닮아”(윤석진 드라마평론가)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연 없는 죽음은 없기 마련. 드라마는 회마다 원혼을 달래고 그 과정을 통해 일그러진 현실을 환기한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두 작가가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를 고민”(‘호텔 델루나’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배종병 책임프로듀서)한 결과다.
‘호텔 델루나’는 사연 많은 드라마다. 홍자매는 2010년 방송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만들면서 ‘호텔 델루나’를 기획했다. 2013년에 ‘호텔 델루나’를 선보이려 했다가 포기했다. 상상 속 호텔을 영상화하는데 당시 드라마 제작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결국 두 작가는 ‘호텔 델루나’의 이야기를 비틀어 귀신을 보는 여인 태공실(공효진)을 내세운 ‘주군의 태양’을 먼저 선보였다. ‘호텔 델루나’와 ‘주군의 태양’은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애초 5층 호텔이었는데… ‘호텔 델루나’의 비밀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죽은 백두산 호랑이가 나오는 장면. '몽키킹3'(2018) 등 중국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동물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구현한 디지털아이디어사가 제작했다. 디지털아이디어 제공 |
‘호텔 델루나’ 제작진이 촬영에 앞서 제일 걱정했던 건 시각효과였다. 서울 한복판에 귀신이 사는 고층 호텔이 들어서고 귀신에 호랑이까지 등장하는 황당한 설정을 컴퓨터그래픽(CG)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면 시청자의 빈축을 살게 뻔했다.
‘호텔 델루나’의 판타지는 생생한 CG와 미술 작업으로 빛을 봤다. 온라인엔 ‘호텔 델루나의 CG 수준’ 같은 제목으로 극중 호랑이와 호텔 CG 등을 캡처한 사진과 더불어 시각효과를 호평하는 글이 적잖이 올라와 있다. 400억원 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보다 수준급이라는 내용이었다.
“드라마 ‘도깨비’ 보다 현실적인 판타지의 느낌을 주려고”(박성진 디지털아이디어 대표) 공을 많이 들인 덕이 컸다. 배우 이시언과 아이유가 마주하는 우주정거장 CG 제작엔 3개월이 꼬박 걸렸다. 시나리오에선 5층짜리였던 호텔도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며 수십 층 건물로 규모를 키웠다. 호텔 델루나 내부는 경기 용인시 양지IC 인근 6,600㎡(2,000평) 규모의 드라마 촬영장에 세트를 지어 촬영한다. “아이유를 상징하는 월령수는 시멘트로 기둥을 세운 뒤 표면에 일일이 나무껍질, 이끼, 꽃을 붙여”(최기호 미술감독) 살아있는 나무처럼 만들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