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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비인기 종목 핸디캡에도... '아줌마의 힘' 연출로 첫 흥행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65> ‘우생순’의 임순례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에서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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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오며 대표적인 현역 여성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순례 감독은 인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본래 충청권에서 농사를 짓던 가족은 아버지가 미군부대 노동자로 일하게 되면서 인천 부평의 변두리 동네로 이사했는데, 장항선 철로를 통해 지방에서 올라온 일용직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착하던 곳이었다. ‘하나같이 어려운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오픈되어서 이웃까지도 가족처럼 지냈던 환경’은 뒷날의 영화감독 임순례에게 큰 영향을 남기게 된다. ‘세 친구’(1996)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에서 엿보이는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관심, 현실의 비루함과 막막함을 견디다 애초의 순수성을 잃는 밑바닥 인생을 안타까움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엔 성장기의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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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의 단편영화 ‘우중산책’(1994).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연출기회를 잡지 못했던 임 감독에게 돌파구가 되어 준 영화다.

고교시절 감독을 꿈꾸다

중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의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던 독서광 임 감독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영화와 만나게 된다. 도심에 인접한 동인천으로 이사한 후부터 애관극장, 미림극장 등을 드나들며 영화를 즐겨 보던 그는 1977년 여름, 당대의 청춘스타였던 임예진 주연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1977)이 모교 인일여고 교정에서 촬영을 하게 되면서 생애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임예진의 자리는 임 감독의 바로 앞이었고 이 때문에 클로즈업을 찍어도 카메라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이 쉬는 시간이면 임예진 옆으로 몰려들던 가운데, 임 감독의 이목을 끈 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나는 촬영에 들어가면 유독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더라. 정회철 감독님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으로 데뷔한 젊고 잘생긴 감독이었다. (중략) 아무튼 카메라 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배우들을 노려보는, 그러면서도 그 무리의 대장처럼 느껴지는 그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당시 여고생이던 내게 3일간의 교생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중략) 어쨌든 당시 3일간의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운명적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임순례 감독 글, 주성철 엮음, 책 ‘데뷔의 순간’)


고교 3학년 때 시험 성적 순위를 공개적으로 게시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등, 폭력적인 분위기가 만연한데 질려버린 임 감독은 학교를 자퇴하고 만다. 2년간 독서로 소일하면서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한 그는 처음엔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고자 했지만 곧 벽에 부딪쳤다. 연극영화과는 배우 지망생들이 가는 곳이란 통념이 있었고, 여성의 직업 선택과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이 전근대적이었던 시절, 여자가 영화감독을 한다는 건 황당한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국 임 감독은 한양대 영어영문학과 81학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 프랑스문화원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인 영화광 생활의 막이 열리게 된다.


당시 문화원은 일반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유럽 예술영화들을 접하는 귀한 창구였다. 임 감독은 주말마다 하루 4편꼴, 한 달에 족히 30편을 보는 등, 졸업 때까지 영화의 바다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 중에서도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영화들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한 임 감독은 같은 대학의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 시절의 영화과 대학원 수업은 “‘시민 케인’(1941)을 본 적도 없는데 ‘시민 케인’의 딥포커스(화면 앞쪽과 뒤쪽이 모두 뚜렷하게 보이는 촬영기법)를 공부하고” 있을 지경으로 체계가 없었고, 진지하게 쓴 논문은 심사에서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세 번이나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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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 친구’는 고교 졸업 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세 친구를 통해 한국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그려낸다. 오스카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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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음악이라는 꿈을 좇으나 비루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묻들을 통해 삶의 비애를 노래한다. 명필름 제공

프랑스어 독학해 영화 유학

지도교수 앞에서 제출했던 논문을 찢고 나온 임 감독은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는 1988년 파리 제8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1992년 귀국하기까지 4년의 기간에 임 감독은 파리 곳곳의 작은 예술영화관들을 찾아 다니며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같은 동구권 감독의 영화까지 챙겨보았고 논문 ‘미조구치 겐지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온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여성 영화인에게 충무로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연출부에 들어갈 의사를 밝히고 동명 원작소설을 독파하면서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외수 작가의 원작을 쥐고 최사규 감독이 준비하던 ‘들소’의 스크립터를 맡게 되었지만 촬영 도중에 영화는 엎어졌다. 별도로 동춘서커스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임 감독은 여균동 감독의 요청을 받고 ‘세상 밖으로’(1994)에 스크립터로 참여한다. ‘세상 밖으로’의 촬영 현장을 경험한 뒤 자신감이 붙은 임 감독은 감독 데뷔를 위해서는 실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호기롭게 35㎜필름으로 단편 ‘우중산책’(1994)을 내놓는다.


혼기를 놓친 30대 노처녀의 꿈과 환상이 낡고 쇠락한 극장 같은 현실 앞에 아지랑이처럼 스러지는 상황을 그린 ‘우중산택’은 삼성영상사업단 주최로 열린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다. 이 작품에 쏟아진 호의적인 반응이 4억3,000만원의 예산으로 장편 데뷔작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활력을 띤 충무로는 차세대 한국 영화를 이끌 유망주를 발굴하고 있었고, ‘삼성영상사업단으로서도 1회 최우수작품상 수상 감독이 빠른 시일 내에 장편 데뷔를 하는 모양새’를 원했다. 고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군 입대를 강요받는 등 현실 앞에서 무력한 청춘을 그린 ‘세 친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이 데뷔작에서 임 감독은 제도의 틀 안에 갇힌 청년들의 우울한 모습을 통해 폭력과 억압을 기제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한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의 김응수 감독이 들려준 고향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임 감독은 충북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를 비롯한 온천관광지와 나이트클럽 밤무대를 취재하면서 출장 밴드로 전전하는 남성 4인조 그룹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내려 나갔다. 상업영화에 따르는 해피엔딩을 거부하고, 지리멸렬한 현실과 무너져 가는 꿈의 괴리, 주변부 인생의 고단한 삶과 전망 없음을 그린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는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었고, 제2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과 제38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받았다.


개봉 때의 성적은 실망스러웠지만, 영화의 진가를 알아본 열성 팬들은 당시 관객의 외면을 받은 ‘나비’ ‘라이방’ ‘고양이를 부탁해’(2001)와 묶어서 재개봉을 요청하는, 이른바 ‘와나라고’ 운동을 벌였고, 명보극장에 다시 걸린 영화는 장기 상영으로 전국 관객 12만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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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비인기종목 핸드볼 선수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변부 인생의 투혼을 그려낸다. 명필름 제공

비인기종목 그려 흥행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흥행에서 고배를 마신 뒤 한동안 공백이 있었다. 그 동안 임 감독은 단편 ‘우중산책’과 ‘세 친구’의 조감독으로 참여해 준 동료 박경희 감독의 ‘미소’(2003)에 프로듀서로 나섰고 국가인권위 옴니버스 프로젝트인 ‘여섯 개의 시선’(2003) 중 외모 지상주의 이슈를 다룬 단편 ‘그녀의 무게’를 연출했다. 차기작으로 준비하던 ‘무림 고수’는 거듭된 시나리오 수정과 캐스팅 불발로 연기가 거듭됐고 그렇게 7년이 흘렀다.


“심(재명) 대표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그 경기를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는데 영화화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그 소재를 영화화하자고 내게 말하는 순간, ‘이 사람은 제작자로서 확실히 생각하는 게 다르구나’ 싶었습니다.”(책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그 영화의 비밀’)


작품 준비가 지지부진하던 도중 손을 내민 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함께 했던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 경기와 일본에서 활약하던 임오경, 오성욱 선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히로시마의 두 여자’를 보면서 가능성을 보았던 심 대표는 임 감독과 약속을 잡고 만난 자리에서 ‘아줌마의 힘’이라는 영화의 기본 콘셉트를 설명하며 작품의 연출을 제안했다.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에 대표팀이 준우승에 그쳤다는 실화의 핸디캡,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비주류로 여겨지던 여성 주인공에 스포츠 영화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음에도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2008)은 400만 관객을 넘기며 영화감독 임순례에게 첫 대중적 성공을 안겼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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