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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3년 공들여 쌓은 성, 1500년 세월을 넘다

속리산 법주사보다 삼년산성, 충북 보은읍


속리산과 법주사를 제외하면 관광지로서 보은은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보은 읍내는 특히 그렇다. ‘충북 보은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할 보은대교가 17일 개통됐다. (중략) 보청천에 가로놓인 길이 111m, 폭 16m 규모로 교량 위에는 조선시대 익선관(翼蟬冠)과 같은 의미를 담아 매미 날개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얹었다.’ 2013년 10월 보은대교 개통을 알리는 통신사 기사다. 어디나 흔한 다리 하나가 자랑거리일 정도이니 조금은 딱하다. 1983년 읍내 중심에 ‘보은동헌’을 복원했지만 건물 한 채만 덜렁 남아 쓸쓸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읍내에서 몇 발짝만 벗어나면 보은의 진짜 보물과 맞닥뜨린다.

층층마다 장인의 숨결, 명품 삼년산성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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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보은의 보물이다. 성문은 사라졌지만 동문 부근 성벽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촘촘하게 쌓아 올린 모습에 장인의 노고와 정성이 느껴진다.

보은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오정산(325m) 능선을 따라 높이 13~22m에 이르는 석성이 둘러져 있다. 신라 자비마립간(왕) 13년(470)에 축조했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일선군(현 구미) 장정 3,000명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보수한 성이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성해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돼 있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지역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삼국통일 전쟁 때 무열왕 김춘추는 당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했다.


둘레 1,680m의 성벽은 상단 폭이 8~10m에 이르러 차량 두 대가 너끈히 비켜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이 정도 규모라면 성의 안쪽과 바깥은 돌로 쌓고 가운데는 흙으로 채우기 마련이지만, 삼년산성은 전체를 돌로 쌓았다.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한 층은 가로로, 한 층은 세로로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층층이 올렸다. 4개 성문이 사라지고 일부가 허물어지긴 했지만 1,500년 세월을 버틴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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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산 능선을 한 바퀴 두르고 있는 삼년산성. 왼쪽 하단 흰 부분이 1999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복원한 성벽이다. 나머지 부분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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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중심으로 한 성벽은 1999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복원했지만, 외지에서 가져 온 돌로 현대식으로 쌓아 옛 멋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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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의 '아미지' 석각. 김생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보은=최흥수 기자

산성 입구는 보은 읍내 방향, 서문이다. 아직까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도로 양편에 주차선을 그어 놓았을 뿐, 번듯한 주차장도 갖추지 못했다. 음식점은 고사하고 가게 하나 없는 상태다.


주차장에서 서문까지는 약 300m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터만 남은 성문 입구에 다다르면 좌우로 거대한 성벽이 이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돌이 크고 반듯하다. 서쪽 성벽은 근래에 복원했다. 반듯반듯한 직육면체 돌을 쌓아 올려 복원이라기보다 현대의 건축 기술을 동원한 신축에 가깝다. 그것도 현장의 돌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왔다니 문화재에 대한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삼년산성의 규모와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애써 위안을 얻는다. 성문 바로 뒤편 바위에는 ‘아미지(蛾眉池)’ ‘유사암(有似巖)’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라는 얘기가 전해 온다. 아미지 바로 앞에는 이름처럼 작은 연못을 복원해 놓았다.


다행히 서문 부근을 제외하면 삼년산성은 대체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북문 방향으로 이동하면 작은 절간이 하나 있다. 거창하게 ‘해동불교 직할본부’라는 팻말이 붙었다. 개인 사찰로는 가장 큰 담장을 보유한 셈이다. 조선시대에 그 자리엔 상현서원이 있었는데, 현재는 장안면 서원리로 이전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정(1486~1521)의 위패를 봉안한 사액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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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상현서원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개인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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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에서 장안면 서원리로 이전한 상현서원. 보통 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상현서원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어 그만큼 거리감이 없다.

사찰 뒤편 북문 터에 오르면 촘촘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공예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명품이 탄생하듯, 3,000여 장정이 3년간 차곡차곡 공들여 성을 쌓는 노고가 눈앞에 그려진다. 산책로는 성 내벽을 따라 이어진다. 명품 성벽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이다. 성에서 가장 높은 북동치성 마루에 오르면 한남금북정맥 산줄기와 그 아래 보은의 너른 들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한남금북은 한강의 남쪽, 금강의 북쪽을 의미한다. 산줄기가 두 강의 유역을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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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주변 성벽은 삼년산성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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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북동치성에 오르면 멀리 속리산 말티재에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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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삼년산성 성벽. 산책로는 성벽 안쪽으로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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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삼년산성 산책로. 성벽 안쪽을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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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동문 아래 수로. 성벽의 하단 폭인 14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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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에서는 어디서나 보은 읍내와 주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작은 도시지만 보은 읍내에는 고층 아파트가 밀집돼 있다.

동문 터에는 특별히 외벽을 관찰할 수 있도록 목재 덱을 설치해 놓았다. 성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쌓은 것처럼 이음새는 물 샐 틈이 없고, 벽면은 희고 매끈하다. 맨 아래에는 배수로까지 만들어 놓았다. 내부가 슬쩍 휘어진 오각형 맞배지붕 형태로 길이가 14m에 이른다. 유재관 보은문화관광 해설사는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나무하러 오던 주민들이 도시락을 보관하던 천연 냉장고이자, 민간신앙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8톤 트럭 2만5,000대 분량, 돌멩이 하나하나에 스민 노고와 땀방울을 더듬으며 약 1시간을 걸으면 출발 지점인 서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옛 멋이 사라진 서쪽 성벽 너머로 보은 읍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삼년산성을 비추는 달빛, ‘고성추월(古城秋月)’은 보은 팔경에서도 으뜸이라는데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농촌 소도시 풍경은 아무리 봐도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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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이 일부 훼손된 곳에 내부 성돌이 가지런히 쌓인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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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공법으로 새로 쌓은 서문 부근 성벽. 외부에서 가져 온 대형 석재로 쌓아 원래의 삼년산성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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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산책로에선 보은 읍내와 주변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동학혁명 기념공원이 보은에 들어선 까닭은?

삼년산성 북측, 속리산으로 가는 국도변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있다. 주차장에는 동학혁명의 배경을 새긴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개울 건너 산중턱에는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이 솟아 있다. 주차장에서 위령탑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동학의 기본 이념을 새긴 장승이 호위하고, 통곡의 계단에는 동학혁명의 역사와 의미를 되짚는 주요 사건이 석판 사진으로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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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북실마을에 들어선 동학농민운동기념공원의 위령탑. '위령탑'이 아니라 '기념탑'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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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기념공원의 통곡의 벽. 동학혁명의 주요 장면을 담은 석판을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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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기념공원의 12개조 개혁안을 새긴 비석. 보은 장내리 집회를 계기로 동학혁명군은 본격적으로 '척왜양창의'의 정치적 기치를 내세웠다.

동학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교인과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농민운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대 전적지로는 공주 우금치, 정읍 황토현, 장성 황룡강, 장흥 석대들을 꼽는다. 보은에 기념공원이 들어선 게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다.


보은 장내리(현 장안면)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1월 고종에게 복합상소를 올리기 위해 대도소를 설치한 곳이다. 말하자면 동학교단 총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전국의 동학교도를 규합해 대규모 집회를 연다. 최대 3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은 이 집회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정치적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1894년 남북접연합농민혁명군이 우금치전투에서 밀려나 해산되고, 북접농민혁명군은 보은으로 돌아왔지만 북실마을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다. 북실마을은 바로 기념공원이 들어선 곳이다. 그러니까 보은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종결된 곳이다. 기념공원은 개울과 언덕으로 산책로를 조성해 쉬어가기 좋도록 꾸몄다. 앙꼬 없는 팥빵처럼 동학혁명의 실상을 제대로 알릴 기념관이 없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대도소가 있었던 장내리에도 동학의 근거지임을 증명한 돌멩이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관군과 일제에 의해 고을을 메웠던 집들은 모두 불타고 동학혁명의 흔적은 철저히 지워졌다. 현재 삼가천이 양편으로 흘러 섬을 이룬 땅에는 우당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보성 선씨 우당 선영홍과 아들 정훈이 전남 고흥에서 이주해 1919~1921년 당대의 제일가는 대목들을 불러 후하게 대접하며 지었다. 구한말 한옥 저택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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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옥 대저택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장안면의 우당고택(구 선병국가옥). 안담과 바깥담을 합하면 800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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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고택 별채 인근에 전국에서 모은 대형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일부는 단지에는 실제 장이 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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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 우당고택의 철제 시혜비. 1922년 선정훈의 고향인 전남 고흥의 소작인들이 세운 것을 2004년 옮겨 왔다.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으로 구획된 대저택은 800m에 이르는 안담과 바깥담으로 구분되고 연결된다. 저택 어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별채 마당에는 전국에서 모은 항아리가 그득하다. 선정훈 공덕비 옆의 철제 시혜비(施惠碑)가 눈에 띈다.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나눠주고 세금까지 납부해 준 우당의 공덕을 기려 1922년 고흥의 소작인들이 세운 비석이다. 도로 확장공사로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자 2004년 이곳으로 옮겼다. 잇속 챙기기에 바빴던 당대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깨는 증거여서 녹슨 비석이 오히려 빛이 난다.


보은=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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