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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드골공항에서 18년…죽어서야 공항 떠난 '알프레드'씨

Mehran Karimi Nasseri(1945~ 2022.11.12)

한국일보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 1청사에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만 18년을 살아야 했던 이란 출신의 무국적 난민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가 그 공항 터미널 벤치에서 별세했다. 비극적이라고 해야 할 그의 운명적인 삶은, 스스로 여러 갈래로 들려주곤 하던 그의 불투명한 과거처럼, 모호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숨지기 두 달여 전인 지난 9월, 타의에 의해 공항을 떠난 지 16년 만에 그가 다시 공항으로 돌아온 까닭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AP 연합뉴스.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Mehran Karimi Nasseri, 1945~ 2022.11.12)는 이름보다 ‘존재’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 1청사에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을 지낸,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4년 영화 ‘터미널’의 실제 주인공으로 불리는 사람. 그의 비극적인 삶은 실존과 휴머니즘에 앞서는 법-제도의 경직성과 1세계 이민정책을 환기하는 계기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너무 부조리해서 오히려 희극적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그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여러 매체 기자들이 그를 만나러 왔지만, 그 무렵 그는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았거나 스스로를 ‘재창조’한 뒤여서 그의 진술들은 오히려 그의 진실을 미궁 같은 허구 속으로 이끌곤 했다. 그는 이란인이라는 자신의 국적을 부정했고 모국어 페르시아어를 잊은 듯 소통을 거부했고 자기 이름조차 ‘알프레드 씨(Sir, Alfred)’라고 고집했다. 벨기에와 프랑스 정부는 뒤늦게 그의 난민 지위를 인정하겠다며 공식 서류를 그의 앞에 펼쳐 보였지만, 그는 국적과 이름란에 '사실'대로 기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말해 그가 믿는 바 자신을 고집함으로써 강요된 유폐를 자신의 선택으로 전복시켰다. 혹자는 그가 '공항 바깥에서 살아갈 자신감을 상실했으리라' 말했고, 어떤 이들은 정신분열 같은 지적 장애 탓이라고 추정했다. 진실이 뭐였던, 그는 그렇게 스스로 믿고 바라는 바의 자신으로 남고자 했다. 그가 샤를 드골 공항 1청사 출국장 심사대 인근 2층 라운지에서 11월 12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나세리는 배우 톰 행크스가 연기한 영화 ‘터미널’의 ‘빅터 나보스키’와는 공항에 갇혀 지낸다는 설정 외엔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 동유럽 가상국가 ‘크라코지아’의 쿠데타 때문에 여권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미국 J.F.K 국제공항에 갇힌 나보스키와 달리 나세리에겐 아예 신분을 증명할 여권도 입국사증(Visa)도 없었다. 나보스키는 조국의 쿠데타 사태가 종식되면서 9개월 만에 공항을 벗어났지만, 나세리에겐 프랑스 당국의 '예외적 선처’ 외에는 덫에서 벗어날 기약도 희망도 없었다. 영화 속 나보스키에게 힘과 의지를 북돋아준 아멜리아(캐서린 제타존스 분)와의 로맨스도 물론 그에겐 없었다. 나세리의 처지는 영화처럼 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보스키 못지 않게 점잖고 품위 있었다. 굶는 한이 있어도 구걸하는 법이 없었고, 공항 직원이나 승무원들이 건네주는 식권이나 식당 할인쿠폰 외에는 일절, 자신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여길 만한 ‘자선’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여행자의 지갑을 두 차례나 주워 주인에게 되돌려줄 만큼 윤리적이었고, 구내식당처럼 이용하던 공항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종업원에게는 어김없이 팁을 챙겨줄 만큼 신사적이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그와 1년여 간 함께 지낸 한 영화인은 그를 “선정에 든 구도자와 찰리 채플린 영화의 방랑자 사이 어디쯤의 위엄이 있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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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대합실 벤치의 잠자리에 든 2004년 무렵의 나세리(사진 위, AFP 연합뉴스)와 그를 모티브로 제작된 스필버그의 영화 '터미널'의 톰 행크스.

메흐란 나세리는 1945년 이란 후제스탄 주 마스제드 솔레이만(Masjid-Sulaiman)의 한 석유회사(Anglo-Perssian Oil Company) 직원 사택에서, 회사 소속 의사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은퇴한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수도 테헤란으로 이주했고, 현지 대학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사업가인 2년 위 형(Cyrus)의 도움으로 만 28세 때인 73년 영국으로 건너가 브래드퍼드대 유고슬라브학 3년 과정에 등록했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중퇴한 뒤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다 77년 이란으로 귀국했다.


당시 이란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집권 말기였다. 외세를 업고 40년대 집권한 팔라비는 60년대 이른바 '백색 혁명'을 주창하며 여성 참정권 부여 등 근대화 세속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오랜 부패와 권위주의적 인권 탄압으로 70년대 중반 무렵부터 거센 반왕정 시위로 휘청거렸고, 보수 이슬람 세력의 반세속-반서구주의 저항도 커져갔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1979)' 직전이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여러모로 모호하다. 그는 귀국 직후 이내 유럽으로 피신, 정치난민 지위를 얻기 위한 난민 신분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당시 유럽은 70년대 오일쇼크에 이은 불황으로 이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던 무렵이었고, 프랑스도 극우 민족전선(83년 출범)이 발호하던 시기였다. 그는 1981년 벨기에 주재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난민 지위를 획득했지만 파리 지하철에서 신분증을 잃어버렸고, 88년 8월 26일 영국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가 히스로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해 출발지 국가인 프랑스로 강제 송환됐다. 불법 입국자로 공항 경찰대에 체포된 그는 저명 인권변호사 크리스티앙 부르제(Christian Bourget)의 도움으로 92년 법원으로부터 “난민으로서 적법하게 입국했으므로 강제 추방은 불가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다만 법원은 그가 “국제법상의 난민 지위 인정서도 비자도 없으므로 공항을 벗어나 프랑스 영토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의 저 모순적인 판결로 그의 유폐생활이 시작됐다.


변호사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정부는 그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서류를 재발급 받으려면 당사자가 직접 사무국에 찾아와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서류가 없으면 공항을 벗어나지 못하고, 벨기에에 가지 않으면 서류를 받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덫. 95년 벨기에 정부가 ‘벨기에 난민 시설에 체류하는 조건으로 신분증을 재발급해주겠다’고 하기까지 만 7년 동안, 그는 공항 터미널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물리적 억압 못지않게, 저 완고한 법적 제도적 부조리를 기약없이 견뎌야 했다.


변호사 부르제는 “처음 만나던 무렵의 그는 무척 영민했고, 자신의 처지를 명료하게 설명하곤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매번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세리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어머니의 조국’ 영국이라며 벨기에 정부의 호의를 거부했다. 그에게 벨기에 행 통과사증(transit visa)조차 발급해주지 않던 프랑스 당국도 99년 그에게 임시 거주권(temporary residency)을 부여해 공항을 벗어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는 신청서류 국적란에 이란이라 기재할 수 없다고 버텼다. 당시 그는 이름도 영국 이민청이 그에게 보낸 서류의 오기에서 비롯됐다는 ‘알프레드’를 본명이라고 우겼다.


과거에 대한 진술도 오락가락했다. 그는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 직후 어머니를 통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회사 보건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간호사가 자신의 생모지만, 간통죄를 중벌로 처벌하는 이란 형법 때문에 양모인 어머니가 그 진실을 숨겨야 했다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친모를 찾고 '거짓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영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이란의 가족들이 대주기로 했던 학비 송금이 중단되면서, 동급생들의 진술에 따르면 시험에 낙제한 탓에, 학교를 중퇴했다. 이란으로 되돌아간 그는 영국 체류 당시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사실이 들통나 비밀경찰 ‘사바크(Savak)’에 의해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여권을 압수 당한 채 강제 추방됐다고 주장했다.


어렵사리 얻은 난민 지위 인정서를 분실한 경위 역시 불분명했다. 그는 벨기에 공공도서관 등서 일하며 여비를 마련한 뒤 88년 영국으로 건너가고자 경유지인 프랑스에 입국했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도난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다른 인터뷰에서는 배편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던 중 선상에서 ‘이제 난민증은 필요없다’고 여겨 벨기에 정부로 반송했다고 주장했다. 외신들은 전자의 진술을 더 그럴싸하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여권도 비자도 없던 그가 공항 출국 심사대를 통과한 사실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사연은 1993년 프랑스 배우 장 로슈포르(Jean Rochefort)가 주연한 영화 ‘Lost in Transit(원제 Tombés du ciel)'로 제작됐고, 영국 작곡가 조너선 도브(Jonathan Dove)의 오페라 ‘비행(Flight)’로도 만들어져 1998년 초연됐다. 이란계 핀란드 작가 겸 영상 제작자 알렉시스 쿠로스(Alexis Kouros)도 2000년 다큐멘터리 ‘드골에서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at De Gaulle, 2000)’로 그의 사연을 세상에 알렸고, 영국 사진작가 겸 영화 감독 글렌 루치포드(Glen Luchford)와 미국 감독 폴 베르첼러(Paul Berczeller)도 저예산 모큐멘터리(mocumentary, 허구를 가미한 다큐) ‘여기서 어디로(Here to Where)’를 제작했다. 스필버그의 드림웍스가 2003년 나세리의 사연 저작권을 27만 5,000 달러에 사들이고도 그의 생애와는 동떨어진 극영화를 제작한 데는, 저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스필버그는 영화 자료 어디에도 ‘나세리’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나세리는 할리우드가 준 돈과 인터뷰 사례금 등이 예치된 공항 우체국 은행 계좌 덕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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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무렵의 나세리. 그는 공항이 분주한 낮 시간이면 늘 대합실 구석 자신의 거처에서 책과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청취하며 정물처럼 머무르곤 했다고 한다. 한 영화인은 그의 모습에서 선정에 든 구도자의 풍모와 찰리 채플린 영화 속 방랑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키피디아.

그의 공항살이 일과는 무척 규칙적이었다고 한다. 공항이 분주해지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인근 화장실이나 직원 샤워실 등에서 몸을 씻고 면도를 했고, 인터뷰 등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주로 여행자들이 두고 간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일과 등을 일기로 기록했고, 공항 상점들이 문을 닫고 환승객들이 잠을 청할 시간이 되면 그도 자신이 정한 거처 즉 2층 라운지 귀퉁이나 지하 쇼핑몰 구석 벤치에 몸을 누였다. 그는 공항의 질서를 따르며 타인의 일상을 존중했고, 공항 직원 및 상점 점원 다수와 친구처럼 지냈다. 공항 당국은 수시로 그의 건강을 보살폈다.


나세리의 사연을 알게 된 여행자들은 일부러 그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거나 읽을거리 등을 선물했고, 안부를 묻는 편지와 엽서를 보내오곤 했다. 수신인 란에는 대개 ‘샤를 드골 공항의 알프레드 씨’라 적혀 있었지만 편지가 전달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1청사 독일항공사 ‘루프트한자’의 한 카운터 직원은 “그는 우리 동료 중 한 명이었고, 우리가 그의 편지를 대신 받아 전달해주곤 했다”고 말했고, 지하 바의 한 매니저는 “그는 공항의 일부였다. 모두가 그를 알았다”고 말했다. 항공사 승무원들은 기내 승객에게 나눠주고 남은 칫솔 등을 가져와 그에게 안부를 물었고, 스타벅스 매장 직원들은 할인 쿠폰을 챙겨주곤 했다. 지하층 한 식당 매니저는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법이 없었고, 여기서 근무하는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옷가지가 담긴 낡은 트렁크 외에 자신이 소개된 신문과 잡지, 시민들이 보낸 편지와 책 등을 항공사 종이 박스에 가지런히 모아 보물처럼 간직했다.


최대 의문은, 99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것처럼, 그가 이미 유명해진 뒤로도 가족이나 친지 단 한 사람도 그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은 점이었다. 그 의문은 2000년 여름부터 약 1년간 그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이란의 가족을 수소문해 만난 미국 영화감독 베르첼러에 의해 일부나마 밝혀졌다. 형제들은 그가 독서를 즐기던 청년으로 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많아 지인들과 토론을 즐겼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듯 ‘출생의 비밀’ 따위는 없었다고, 그가 영국 유학을 가게 된 것도 가장 가깝게 지낸 두 살 터울의 형이 의료장비 무역업을 하며 영국에 머물던 때여서 가능했던 것이라 밝혔다. 대학을 중퇴한 뒤 그가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고, 백방으로 찾았지만 허사였다고, 91년 가족의 한 지인이 드골 공항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인사를 했는데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후로도 몇 차례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갔지만 모두 거부 당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원하는 바의 삶을 선택한 것이라 결론짓고 찾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는 것도 그를 지켜본 이들의 진술이지 의학적 진단은 아니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말과 고집스러운 태도가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 분노의 표현일 가능성은 물론 희박하다. 하지만 그 상황에 속박당하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기 위한 본능적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미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허구의 세계로 탈주했으리라는 추정. 베르첼러는 “알프레드는 스스로에게 완전히 만족한 듯했다. 그는 기자든 누구든 상대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법이 없었고, 어떠한 동정도 원치 않았다. 그는 술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노래하는 노숙자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 자신의 규율에 맞춰 이어졌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썼다.


그는 2006년 질병으로 입원해야 할 처지에 놓이면서 비로소 공항에서 벗어났다. 이듬해 퇴원해서는 한동안 프랑스 적십자사의 보살핌을 받았고, 공항 인근의 한 호텔에서 지내다 파리의 한 자선 기관 홈리스 시설에 수용돼 잊힌 듯 지냈다. 그러다 지난 9월, 조용히 공항 1청사 대합실로 되돌아갔다. 16년 만의 '귀향'인 셈이었지만, 아마도 낯익은 옛 지인들은 대부분 사라진 뒤였을 것이다. 인터뷰 때마다 그는 늘 자신의 처지를 일시적인 것이라고, "언젠가는 공항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두 달여 뒤 그는 출국장 반대편 문을 통해 공항을 떠났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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